2024년 1월 31일 수요일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後)

이건 어떨까. 실험용 쥐 rat을 ‘랫드’라고 부르는 과학계의 해괴한 표기법에 대해 황당해하는 이야기를 봤다.
가장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과학용어 중에 실험용 쥐 rat를 “랫드”라는 해괴한 표기로 쓰는 전통이 있음. 왜 이걸 랫드라고 쓰는지 아무도모름. 근데 교과서 같은데도 저렇게 쓴 책많음. 심지어 국가 법령같은데서도 저렇게 씀. 그냥 단체로 이상한 표기인걸 다 알면서도 그냥 다같이 틀리는거임
@JaesikKwak. 2022년 10월 6일, 오후 10:38. Tweet.
‘랫드’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신비에 대해 약간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직업적으로 이런 일에는 나도 약간의 책임감을 느낀다. ‘랫드’는 물론 일하다가 종종 마주치는 단어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말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또한 책의 바깥과 안의 말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정해진 규범을 따르거나 규범을 정해 고치는 것이 우리 교정공의 일이다. 기본적으로 ‘랫드’ 같은 게 나오면 표기법에 맞도록 다 고쳐야 맞는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거를 왜 맘대로 고쳤느냐고 따지는 교수님이 계실 수 있고, ‘학술적’ 영역이므로 무엇이 표기법에 맞는지부터가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그 누구도 나 대신 싸워 주지 않는다). 실상을 말하자면 교재 한 권에서 rat 하나를 놓고 그 번역어로 ‘랫드’, ‘래트’, ‘랫트’, ‘랫’, ‘시궁쥐’, ‘쥐’ 등등으로 다 다르게들 쓴다. 아예 rat이라고 그대로 쓰는 사람도 있다.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한국어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 이게 교수님들끼리만 통일을 못 하고 있는 거면 그래도 행복한 경우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한 교수님이 맡았다 하는 한 장 안에서도, 분명히 한 사람이 썼어야 하는 한 문단 안에서도, 심지어는 바로 옆 문장에서도, 나로서는 다르게 쓸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는데 다르게 쓰시는 (자연히 얼굴을 찾아보게 되는) 분들이 적잖다. 즉 대부분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해 아예 처음부터 쥐털만큼의 관심들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책 한 권에서 ‘랫드’로 통일되어 있기라도 하다면 그나마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rat은 ‘랫드’라고 옮긴다고 하는, 어쨌든 이 책 안에서만은 통하는 약속을 세우려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교정지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달아 물어봐야 한다.
‘rat’의 번역어가 ‘랫’, ‘랫드’, ‘래트’ 등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요?
만약 전체 감수를 맡아 끌고 가는 교수님이 없다면, 그 메모를 본 교수님들이 다 같이 모이려 들 수도 있다. 모여서 회의한 끝에 어떤 결과가 나오기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하고, 그 결과가 나오면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 어쨌든 출간일은 정해져 있고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책은 한 권이 아니다. 시간이 정 부족하면 나 외에 다른 외주 교정자를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구한다 해도, 그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 하는 것은 결국 내 일이다. 해 달라는 대로 그가 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멋대로 고쳐도, 또는 전혀 안 고쳐도 아무도 신경 안 쓴다. 나는 항상 그런 유혹에 시달린다. 어쨌든 그 시점에 전체를 읽어 본 사람은 나 혼자다. 그럼에도 각자 자기 생각들이 있으신 여러 교수님들 사이에서, 무슨 교통정리 비슷한 것이라도 가능한 나이 지긋하신 교수님으로부터 교정공이 받은 답이 ‘랫드’라면, 이 구조 속에서, 그것은 그냥 랫드면 그만인 것이다. 랫드라고요? 왜죠? 이렇게 되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전에는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사장님은 그냥 교수들이 해 달라는 대로만 하라고 말한다. 네가 입씨름을 하려고 들지 말고, 교수들이 해 달라는 대로만 해라. 너는 시간만 맞춰라, 너의 업무보고에 따르면 너는 지금 하루에 몇 쪽을 보고 있는데, 어쨌든 네가 하루에 몇 쪽 이상 봐야 우리가 수지타산이 맞고…….

자, 사장님은 나를 왼쪽으로 당기고 동료님들은 나를 오른쪽으로 당긴다. 원청업체는 앞에서 나를 당기고 교수님들은 뒤에서 나를 당긴다.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나를 아래로 당긴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위로 당긴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교정지를 양쪽으로 동시에 당기고 싶다. 이것이 내가 만들고 있는 책이 당하고 있는 얼차려의 구성이고 가련한 예비-책들이 처한 상황이다. 말 못하는 책들, 그러나 만들어져야만 하는. 내가 교정 보고 있는 원고 외의 모든 것이 내 눈과 손과 마우스 포인터를 당긴다. 나도 당연히 업무시간에 몰래 트위터 합니다! 랫드가 어쩌고 하는 얘기도 그러다 본 것이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쉼 없이 교정만 봅니까? 내가 항상 하고 싶은 말: 당신이 한번 해 보세요, 네가 해 보세요! 눈앞이 깜깜해지도록 아침부터 밤까지 한번 봐 보세요! 그리고 항상 하는 생각: 이래서는 어떤 책임 비슷한 것이 나올 만한 구조가 아니다. 무슨 책임? 최선의 의사소통을 시도할 책임? 나와 교수님 사이에, 책과 학생들 사이에, 말하고 싶은 사람들, 책과 책들, 화면과 화면들 사이에?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말해 보라 하면 다들 저마다의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장님에게는 사장님의 이유가, 편집자에게는 편집자의 이유가, 교수님에게는 교수님의 이유가, 교정공에게는 교정공의 이유가, 없을 리 없다. 어떤 분들은 한마디도 더하실 필요가 없는 분들이신지도 모르지만, 한 말씀에 필요한 값이 다른 분들이신지도 모르지만, 학문에 열심이시라 언문의 필요를 등한시하시는 분들이신지 아니면 그 반대이신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바로 그런 필요들의 분배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데에 누구를 탓할까? 다 나의 탓이다! 내가 그 분배들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인 한 이 오류들은 바로잡히기 어렵다. 그러면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 답일까? 내가 더 수준 높은 교정공이 되는 것이? 아니면 교정공보다 나은 것이 되는 것이? 나 교정공의 눈에, 여기에서 분명하게 틀린 것은 우리가 우리 되기에 실패하고 있는 이 사태다. 책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정공처럼 말하자면, ‘모양이 어색하다’. 사랑하는 교수님들, 내가 우리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내가 부르면 그렇게 됩니까? 내가 분배될 수만 있다면 나는 사라져도 좋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는 데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맞게 했나? 내가 내게 주어진 지면에, 일생에 있을까 말까 한 기회에, 필요한 말을, 해야만 하는 말을 적절히 늘어놓은 게 맞나?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한 게 맞나? 내가 매일 보고 있는 어떤 원고들과도 같이, 헛되이 글자로 똥칠을 해 버린 건 아닌가? 아니, 지면이 굳이 나에게 필요한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 나 교정공이란 이를테면 사라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교정공이 개입할 수 있는 지면은 오늘날 점점 좁아지고 있다. 또는, 교정공이 개입할 수 없는 지면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아와 어의 다름도 점차 사라지는 듯, 아와 어가 다르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들과 어와 어가 다르다고 우기는 사람들 사이의 다름도 사라지는 중인 것만 같다. 가끔 우리가 견딜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 합쳐졌던 적이라고는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으니 이상한 생각이다. 대체 어떻게 감히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겠니? 말하는 얼굴들을 보면 그야말로 박살이 나 있다. 전에도 이랬던가? 이러지 않았던가? 우리 산산조각의 양상이 과연 바뀌는 것이라면 산산조각을 대하는 우리의 양상도 분명 바뀌는 것이겠다. 내가 지금 맞게 대하고 있나? 글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살 난 우리 사이에 쌓이고 녹고 쌓이기를 반복하며 서로 합쳐지려고 이어지려고 이를 악문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틀림없이 그렇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