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목요일

빈 방을 위한 허기진 이야기

  비어있는 곳을 비어있는 것들이 이어나간다
  나는 침묵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방에 
  뚝뚝 침을 흘리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 안에는 아직 당신을 삼키지 못한 내가 있고

  이곳을 지키는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늘어지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있어

  당신이 굴리던 볼펜 끝에서 망가진 문장들이 흘러나오고 당신이 남긴 침묵과 나의 침묵 사이엔 낯선 영원이 태어나고

  다만 이것은 오래된 일이어서  
  아직 나에게도 갓 태어난 소문인 일  

  왜 하필 당신은 사라지기를 사랑해서 

  당신처럼 이곳을 통과하려고
  눈을 감아보아도 나는
  여전히 아무런 미래가 없는
  꿈으로밖에 가지 못하는데

  이 사실을 어찌해야 해?

  당신을 없애기 위해
  조금은 혼잣말을 곁들여도 될까?

  나의 일기장이 메말라 가는 동안에도 
  어디서든 어디로 이어지는 당신은
  또 어딘가로 뻗어나가는 최선의 것

  구부러진 약속과 망가진 희망이 이어나가는 당신의 릴레이
  그러다 모순이 허기를 어루만지는 저녁이 오고
  오랫동안 자라나는 당신을 바라보다 잠에 들었어

  투명한 몸을 입고 온 당신이
  더 이상 비어있지 않기 위해
  어린 당신을 데리고 나간 것 같아
  아마 바다나 안개 그런 곳으로

  축축하고 끈적이는 아침

  포옹이었던 것들이 벽지 위에 찰랑인다

  밤새 오래된 이야기를 지키던 아름다운 단어들이 이제 이곳의 공기가 되겠지 더 이상 우리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약속이나 비밀이 되며 망가질 필요도 없이 구석구석 가지런히 흔적이 죽어가는 친밀한 현실 속에서 고요하게 잠든 완벽한 기억을 봐 도무지 이것은 이야기처럼 보이질 않을 거야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당신을 상상하는 것처럼

2024년 11월 25일 월요일

산의 중턱에서

산 중턱에 도착한 그들의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들도 알지 못한 사이에 숲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것 같았다. 산의 비탈을 따라 내려오던 그들이었다. 그동안 희미하게나마 길을 밝히던 달빛도 감지되지 않았다. 하늘을 보려 고개를 올렸지만 달라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그들의 눈앞을 지나가던 풀벌레들이 있었다. 달빛을 가로지르며 지나갈 때마다 수면이 깨어지듯 빛이 일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곧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갈 것이다. 이런 낙관으로 당혹감을 떨쳐내야 했다. 몇 걸음 걸어 보았지만 곧 멈추었다. 한 발 내딛는 일이 마치 깊은 골짜기를 뛰어 건너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온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다고 확신했다. 드디어 어둠이 그들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산의 중턱이었다.

온 세상이 어둠에 휩싸이기 전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다 마주친 중년 남성이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산의 중턱에서 그 순간에 직면할 것이다. 다들 그때를 준비해야만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산의 중턱이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 알 수 없다. 산의 중턱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당신들에게 내가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진실을 일러주겠다. 나는 이미 산의 중턱에 서 있다. 지금 이곳에서 빛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은 아직 산의 중턱에 도달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들이 다시 걷기로 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들은 일어나 어떻게든 계곡 사이를 뛰어넘어 가기로 했다. 빛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걸음은 산의 중턱에 도착한 순간부터 도약의 연속이 되었다. 몇 번의 도약이 있고, 그들 중 하나가 넘어졌다. 팔꿈치가 쓰리지만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가 크게 다쳤고 얼마간 쉰 뒤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둘 중 하나가 넘어지고 앞니가 박살 났다. 턱이 두 동강 났다. 어깨가 빠졌다. 무릎이 쓸렸다. 발목이 꺾였다. 별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럼에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멈추어 선 상태에선 아무런 가능성도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판단 유예도, 유보도, 추이를 살펴보는 모든 일들이 그들에겐 살점을 내어주는 일과 같았다. 그들은 이런 어둠을 준비해본 적도 없었고 아니, 그에 대한 준비가 가능하긴 한 건가. 다만 걷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아픔을 동여매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그들을 한 사람이 지나쳐 갔다. 그는 바닥에 긴 불꽃을 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불꽃에 드러난 것으로 보면 그는 마치 머리를 끌며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불러 어떻게 하면 불꽃을 그릴 수 있는지 물어보고자 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 새빨간 흙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가 그린 궤적을 따라 내려오는 한 무리가 있었다. 무리 역시 모른 채 지나갔다. 붉은 흙이 사그라들었다. 그들은 다시 어둠 한가운데 걷는 신세가 되었다.

그 불꽃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그들 중 하나가 쓰러지며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그 과정에서 두개골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다. 넘어지지 않은 다른 하나가 두개골이 땅에 부딪히며 발생한 불꽃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불꽃의 정체가 규명되었다. 달빛도 별빛도 꺼진 이 세계에 두개골로 만든 빛만이 점멸하게 되었다. 그들은 애써 머리 가죽을 벗겨내고 땅에 머리를 부딪쳤다. 붉은 불꽃이 사그러지는 동안 서 있는 하나가 나아갈 길을 가늠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즉 빛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개골이 드러나야만 했고, 그것은 당사자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 일을 한 사람만 하자는 것이다. 한 사람은 계속 머리를 끌고 한 사람은 계속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제 한 사람에게 고통이 집중된다는 점에서 이전에 그들이 취한 방식보다 진보했다고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아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머리를 끄는 동안 하나는 비명을 참기 위해 애써야만 했고, 나머지 하나는 억눌린 비명을 고스란히 들으며 그의 시야를 겹겹이 메운 의심을 몰아내야만 했다. 그것이 안쓰러워 나머지 하나가 두개골을 드러내고 땅을 기며 피고름에 시야를 가릴 순 없었다.

이런 식의 여정이 이어지고, 놀라운 일이 발생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머리를 끄는 쪽의 두개골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의 머리에서 안구는 곪아 사라졌고, 그 사이를 응고된 핏덩어리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코 또한 쓸려 사라졌다. 목뼈는 이미 뒤로 휘어 있었으며 비명을 감추기 위해 부푼 혀가 입안을 채우고 있었다. 바닥에 붙은 코 대신 터진 고막이 펄럭이는 귀를 통해 호흡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사지를 헤매고, 으깨어진 뇌가 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빛이 빠르게 사그라진 것이 몇 번이었다. 그의 귀에는 굳은 뇌수의 거품이 엉겨붙어 있었다. 서로의 역할을 바꿀 수 없을 만큼 멀리 갔기에 아예 몹쓸 동정심으로 이 여정을 포기하기로 결정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두개골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며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덕분에 이전보다 더 밝은 빛을 낼 수 있었다.

내 생각엔 그것은 뼈보다는 아주 단단한 각질에 가까웠을 것이다. 지금 이곳을 낮게 울리는 거대한 존재들의 성장 과정 또한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존재들은 그 크기에 걸맞는 어떤 폭발적인 계기가 있었을 뿐 그가 전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이따금 그들을 지나치던 무리가 있었다. 대체로 세 명에서 네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무리가 머리통을 운영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머리통의 운동 기능을 살려두거나 머리통의 운동 기능을 다른 이에게 전담시키는 것이다.

이전의 무리는 전자의 방식이었다. 한 명의 ‘머리통’을 데리고 있고 또 하나의 교대할 머리통을, 나머지는 반쯤 기능을 잃은 눈으로 길을 판독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길을 찾아 나갔는데, 그러기 위해서 머리통이 탈진하기 직전까지 몰고 다닌다. 결국 그 머리통이 탈진해 운동능력을 상실하고 나면 나머지 머리통이 뒤를 잊고 탈진한 머리통은 다른 한 명이 부축해 가는 방식이었다. 저들이 두 머리통을 어떻게 무리에 포섭했는지, 혹은 무리 내에서 뽑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을 걷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그들’ 또한 한 명의 고착된 머리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죄책감의 연대 때문에 감히 물어보지 않았다. 누구도 서로를 지옥으로 떠밀진 않았다. 다만 누군가는 결국 지옥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이런 일들은 항상 아무 말 없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또 다른 무리는 머리통의 운동 기능을 다른 이에게 전담시키는 예가 될 수 있겠다. 다른 누군가가 탈진한 머리통을 끌고 가는 것이다. 이 방법은 무리 안에서 머리통을 하나만 보유하면 된다는 장점이 있으나 그 머리통을 끌고 가야 할 사람이 탈진할 경우를 대비해 나머지 하나가 길을 살피는 한편 교대를 위해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이전의 무리에 비해 무리의 덩치를 더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머리통의 크기 자체도 다른 무리보다 더 크다. 머리통은 거의 가사상태로 내버려 둔다. 역시 이 무리의 머리통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끌고 가는 사람이 앞에 위치해야 했기 때문에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어떤 무리가 다른 무리와 마주치게 될 경우에는 아무래도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각 무리 간에 싸움 전야의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그 무리가 몇이건 상관없다. 어떤 무리가 먼저 앞으로 가면 생기는 불꽃으로 나머지 무리가 뒤따라간다. 물론 나머지의 머리통은 땅에서 떨어진 상태로. 아무리 굳은살이 빠르게 발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국면을 넘어서야만 한다. 대개의 머리통은 그것을 못 버티고 죽는다. 대부분의 무리가 그런 머리통을 보유한 상태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 국면 이전에 있는 머리통을 땅에 끄는 것은 무리에 있어서 아주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신경전 끝에 여러 무리가 한 무리로 통합되는 경우가 있고, 치열한 싸움 끝에 대부분이 죽는 일도 벌어진다. 이럴 때는 살아남은 몇 사람들은 죽음의 긴장을 안고 한 무리로 통합한 후 다시 산 아래로 향한다. 결국 누군가는 머리통이 된다.

나는 머뭇거리는 무리와 마주친 일이 있다. 나는 아직 산의 중턱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길을 안내하길 자청했다. 그들 또한 내가 그곳에 도착하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무리에 끌어들이고자 노력했으나 나는 그냥 안내만 하겠다고 거절했다. 다만 그때의 내 걸음은 긴장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산의 중턱에 대한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이렇게 걸음을 재촉하다 산의 중턱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무리 사이에는 희미한 빛을 덮으며 등장하는 산 너머의, 산 아래의, 산의 골의 엄청난 빛의 근원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저 빛은 너무나 강해 이들이 길을 찾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산의 중턱에 닿기 전 그 빛의 근원을 본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그것이 거대한 머리였다고, 거대한 바위였다고, 거대한 산이었다고, 거대한 산이 움직이며 우리가 산 아래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 거대한 것이 이동할 때 울리는 대지의 소리는 이미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 중 하나는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운동능력을 갖춘 머리통이 스스로 팔과 다리를 움직여 무리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거대한 머리를 끌며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그 빛이 다른 머리통에 비해 강했기에 그가 지나간 땅은 한동안 달아올라 있었고, 그 빛을 따라 이동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며 그런 식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거대한 머리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무리는 오랫동안 나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얼마 지나 나는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미 각자 머리통을 갖고 있었고 머리통들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피부가 두개골을 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부가 두개골을 가리기 전에 다시 사용해야만 했다.

내게 굳은살에 대해 말한 ‘그들’을 또 보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내가 이전에 안내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둘이 머리를 끌며 이동하던 중 십수 명의 시체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마침 발생한 산 아래의 빛을 통해 그들 중 몇 명의 머리통에서 각질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통은 이미 너덜너덜하게 박살 난 상태였다고 한다. 추정컨대 그들은 각질이 생긴 머리통의 독점 여부를 놓고 다툼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머리통의 시체에서 발생한 각질은 여전히 쓸모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들은 그의 머리통의 머리에 굳은살이 생긴 머리통 일부를 보철하는 시도를 해 보았다고 한다. 그 시도는 효과가 있었다. 이미 죽은 머리통은 꽤 큰 상태로 발달했고, 보철한 머리통 세 개 중 하나로부터 굳은살이 발달하기 시작해 그와 함께하던 머리통의 각질과 더불어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기꺼이 그들을 안내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은 처음 내게 중요한 정보를 선뜻 알려준 이들에 대한 예우였다.

우린 오랫동안 길을 걸었고, 나의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우정이라고 할 만한 감정이 오갔다. 그가 보인 머리통에 대한 우정, 피할 수 없는 희생에 대한 죄책감에 나는 깊이 공감했고, 그가 언뜻 내보이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모색은 내게도 깊은 충만감을 선사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나의 실수였다. 나의 잘못된 안내로 그의 머리통이 길에 튀어나온 바위를 무리하게 넘어가려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친구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한편 내게 위로를 건넸다. 나는 죽음의 슬픔보다 실수에 대한 책임에 사로잡혀 겁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그는 서럽게 울다 나를 위로했다. 나는 위로 한마디 못하고 그저 그 상황에 있어서 내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의 잘못이었는지 판단하는 일에 사로잡혔다. 결국 나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거대한 책임에 사로잡혀 길에 주저앉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죽은 머리통의 경련이 멈추었다. 그가 일어나 내게 말했다. 내게 큰 돌을 구해다 주렴. 한 무리가 우릴 지나치며 혀를 찼다. 나는 일어나 큰 돌을 찾아 그에게 건넸다. 그는 그 돌을 죽은 머리통의 뒤통수에 내려찍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내려앉고 뇌수가 튀었다. 그는 완전히 내려앉은 머리통의 머리를 완전히 열고 그 안에 있는 기관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손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들어낸 후 그 안에 가득 찬 피를 빨아내 밖으로 뱉어냈다. 이후 그 안에 흙을 넣어 내부를 깨끗이 닦고 흙을 모두 꺼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끝내고 숨을 돌리며 머리통의 머리맡에 앉았을 때 이를 부딪치며 떠는 내게 말했다. 별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텅 빈 머리통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게 인사를 남기고 단단하게 굳은 시체를 끌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기꺼이 길을 안내하겠다고 소리쳤으나 그는 빠르게 내 시야에서 벗어났다. 피투성이가 된 길가에서 단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몇 개의 무리가 나를 지나쳤다. 그러다 내가 다시 일어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어쨌든 별수 없이 어떻게든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둠의 정오에서 나는 산의 골을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빛을 보았다. 산의 귀퉁이를 무너뜨리며 이동하는 거대한 덩어리들을 보았다. 덩어리를 따라 대지가 으르렁거리며 뒤따라갔다. 먼 산의 탄내가 내게 도달할 무렵, 나는 내가 산의 중턱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겁에 질려 내달리다 땅에 고꾸라져 머리를 처박은 내게 무리가 찾아왔다. 그들이 나를 끌기 시작했다.

2024년 11월 24일 일요일

물건

K는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사기엔 수중에 있는 돈이 조금 모자라다. 조금의 선호를 포기하면 딱 알맞은 돈으로 비슷한 종류의 물건을 살 수 있다. K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 그런데 잠깐. 선호를 포기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물건을 사려는 계획은 취소다. 꼭 원래의 물건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 바뀐 그 물건을 사기엔 왠지 손해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원래의 물건이면 참 좋을 것이다. 하지만 수중에 있는 돈이 모자라다.

K가 사려고 했던 물건은 사실 다른 이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다. 이에 따라 K의 물건에 대해 망설이는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K는 처음 사기로 했던 물건을 사기로 한다. 이럴 때를 위한 것인 듯 잊어버린 현금을 지갑에서 발견했으므로.

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다정 같은 것

죽어 있는 짐승이었다
다시는 그 무엇과도 싸우지 않아도 되는
영원히 자고 있는 듯한
짐승 일부

머리는 남아 있어
다시 깨어나 입 열면
다 꿈이었습니다
잘 놀다 갑니다
무릎 탁 치고
일어날 것 같았는데
아주 일어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전면적으로 눈을 질끈
감게 하는 짐승
약간이었다

나는 커다란 장정 아니지만
마치 그런 사람인 듯
거대한 물러터짐이
가슴께에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한쪽 어깨에 메고
설산을 내려왔다

강추위 속에서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고
너무 죽어서
살아 있었다
털과 이빨이 내게도
있었고 우리의 공통점
조금이었다

숨 쉴 때
옆에 있으면
아주 커다랗게
따뜻하겠지
하지만 숨
안 쉰다는 차이

나는 너무 무거워서
아니 이걸 어떻게
흘려보낼 수 있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 넣어둘까 하다가
제일 아래 칸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 안에서 짐승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라고
푹 죽어 있으라고

매일 나는
일 마치고 돌아와
씻고
옷 갈아입고
서랍을 열어본다

오래도록 안쪽
모서리에 끼어 있는
먼지 같은 짐승 죽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죽어도

셋, 정원

광대가 가지를 끊고 나를 본다. 웃는 얼굴. 광대가 깎은 나무들은 테마파크인 것처럼 모양이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마주 웃었다. 저 광대의 눈에 내가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광대가 이상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광대는 이상했다. 나는 웃음이 일그러졌고 광대는 나를 보며 웃지 않았다. 아까까진 웃었는데. 지금은 웃지 않는다. 무표정한 광대 얼굴. 그 뒤로 테마파크 같은 나뭇가지들. 광대가 내 뒤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직 깎고 다듬지 않은 정원의 나머지 장소를. 여기는 광대의 정원이었다. 광대의 안부를 묻기보단 특별한 정원의 모양새에 관심이 있어 오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나, 나는 광대 앞에서 생각이 저해되었다. 나의 리듬이 느려지고 있었다. 비 올 만하던 날씨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졌고 나를 바라보던 광대가 다시 환한 웃음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검지 손가락을 자기 입 위에 올렸다. 무엇으로부터? 조용하란 뜻인 걸까?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걸까? 광대가 웃음을 떠올린 것은 안도되는 일이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 앞에선 여기 있기가 난감했었으니까. 난 여기에 왜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김광석의 노래가 한쪽에 있는 공원 스피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광대가 공손하게 눈웃음 지으며 왜 여기 있었는지 모를 나에게 뒤늦은 인사를 한다. 나는 광대의 시간을 빼앗고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광대도 마찬가지로 나의 시간을 뺏은 것과 다름없었으나, 나는 왠지 나에게 동정적인 구석이 있다고 느껴졌다. 저 광대에게는 선의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엇을? 광대는 다시 쉿, 하는 제스처를 했고 검지 손가락이 그의 입에서 다시 떨어질 때 그의 턱 주변에 걸려 있던 마스크도 함께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가 마스크를 걸고 있었던 걸 몰랐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가 끝났다. 다른 김광석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광대가 손에 그러쥔 마스크를 놓는다. 김광석의 노래는 이렇다 할 감정을 담고 있었는데 와닿지 않았다. 여기로 오기 전까지 나는 좋아했었는데 말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여기로 오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지? 그것을 광대가 보며 눈웃음 짓는 것 같았다. 새로 꺼낸 마스크를 다시 걸고. 올라가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려오려는 듯 말을 마쳤다. 그 사이에 있던 말은 왜, 왜…… 뒷말은 잘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과장된 나뭇가지 모양들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대가 뒤돌았고 보이지 않는 그의 입에서 나직이 아까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니, 들려오기보단 다가왔다. 나에게 닿아 왔던 것 같다. 아, 생각났다. 나는 검은 고양이를 좇아 여기에 왔다. 그날은 지금처럼 공기가 습하고 빗방울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광대가 한 말처럼 그날은 오늘로 닿아 왔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날이, 앞두었던 그날이 미루고 있었던 오늘로 왔었다는 것이다. 광대는 이렇다 할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무엇을. 그 검은 고양이는. 나는 평범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이 후회되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준비를?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다 기억나지 않았어도 나는 그동안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았다. 광대는 내 앞에서 웃었다. 여기서 정원 만들기를. 하고 있죠. 그 검은 고양이는. 나도 잘 모르겠군요. 광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으나 오직 표면적인 부분만 건드릴 뿐이었고 그는 나보다 준비가 된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건가요. 모두 노는 시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광대 당신이. 이들을 여기로 불러 모은 건가요. 아니요. 스스로들 온 것입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 광대는 세 번째로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나는 그에게서 의미를 가져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좇았던 검은 고양이에게 가고 싶었다. 광대는 잠시 기다려보라는 듯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광대의 품에는 검은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그렇게 광대가 나타낸 것은 광대 자신보다 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이. 검은 고양이가 뛰어내려 야옹,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에게로 다가와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나는 검은 고양이를 안아 들고 광대에게 말했다. 이것이 내 기다림의 결과입니까. 광대가 고개를 저었다. 그와 어떤 말을 나누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광대나 고양이에게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핥았다. 부드럽고 까끌까끌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나는 광대나 고양이를 제외하고도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나도 마스크를 쓰고 싶었다. 말할 때는 마스크를 내리고 그것을 손안에 쥐고 있다가 내려놓고 싶었다. 광대처럼. 나는 광대가 되고 싶었다. 내가 좇은 검은 고양이를 감쪽같이. 불러내는 일을 할 수 있는 광대. 허공의 만족을 위하여.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겐 이성이 있었다. 나는 광대가 아니었다. 그러자 광대가 잠시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 존재와 더 이상 교분 나눌 것이 없었다. 독특한 이성이랄 수 있는 광대가 그런 날 보며 마주 웃었다. 그런 뒤 그는 내 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무들을, 곧 테마파크처럼 가꾸려고 가늠하려고. 나는 광대에게서 사선으로 나란히 걸으며 긴장을 버리지 않았다 고양이가 내 뒤를 따라오는지를 살폈다. 따라왔다. 나는 광대를 방해하고 서 있지 않았다. 그런 도중 가운데쯤의 허공에 누군가의 웃음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눈에 보이는 웃음은 나타나기만 했을 뿐 자기가 누구의 것인지는 표시되지 않았다. 광대가 그 웃음을 만지려는 듯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 품에 있던 고양이가 그곳으로 천천히 뛰어내려 걸어갔다. 거기에는 웃음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흔적]이 남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따라 웃지 못했다. 그건 내가 모르는 것이었으며 이미 지난 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안다는 생각이 곧이어 들었다. 지금 서로 가까워져 가고 있는 저 광대와 고양이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왜인지 익숙한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분위기란 것과 비슷했다. 그것에게로 광대와 고양이가 다가가 셋이 50cm 정도의 원 안에 있게 되었고 광대가 재밌는 것이 생각났다는 듯 원 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하자고, 아무도 안 듣는 권유를 했다. 내가 심판이라고. 고양이는 그것을 묵살했고 둘 사이에 엷어져 가는 그 웃음의 흔적은 이제 [증거]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기다리고 있으면 [쓰레기]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된 웃음이었던 것은 밖으로 내던져졌다. 광대의 손에 의해. 그것은 탄력이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던져진 곳으로 내려앉았다. 기체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잡고 싶었다. 그것은 내 바람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그것은 흔적이자 증거이며 늘 쓰레기가 될 테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것이 웃음의 장막 저편의 다른 무언가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대는 아까 나타난 웃음으로 이미 끝이 난 극이었고(아무도 웃지 않았으나) 남겨진 이들에겐 아무런 유열도 없었다. 나는 이들이 그런 배우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배우들이 광대가 되고 고양이가 되는지 알고 있다. 그건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 생각이 부끄럽기도 했고, 이들이 배우로서의 과거를 가졌다면 존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레이트를 내린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가능성]이 뚱뚱한 고양이의 엉덩이로 쿵 떨어졌으며 광대와 고양이는 훤칠한 인상의 남녀가 되어 고양이였던 배우가 광대였던 배우의 뺨을 한 대 때리고 뒤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고양이]가 광대 남자 배우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원래 고양이였던 여자 배우는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나는 이 정원에서 나갔고 정원 안은 금세 어두워졌다. 지금 누군가가 서 있는 이 가지 숲 아래엔 무언가 작은 새가 있었는데 그것은 웃음과는 달랐다. 말로만 듣던 슬픔인 것 같기도 했다. 지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정원 안의 선생님에게 혼날 것이었다. 정원은 그런 생각을 하곤 웃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다시 틀며.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적극성 같은 것

인터넷에서 사진 하나를 주웠다
모스크바 개념주의 사진이라고 했다
미술 노동을 하는데
가끔 미술에 역정 내는
e님의 추천이었다
e님은 모스크바 개념주의 사진을 볼 때마다
울고 싶어진다고 했다
(이유는 모른다)
(묻지도 않았다)
(모스크바 개념주의란 무엇인가?
묻고 싶었지만 알고 싶진 않았다)
크기가 너무 커서
그림판에서 축소한 뒤
화면 가운데에 깔았다
나무들에 흰 현수막이 매여 있고
그 위에 빨간색 키릴문자가 적혀 있었다
나무들이 온통 검은색이어서
빨간 글씨가 더 강렬해 보였다
배경은 검은색으로 설정했다
이제는 검은 배경 속의
검은 나무들 사이의
흰 현수막 위에 쓴 빨간 글씨가
훨씬 더 강렬해 보였다
그 위에 한글문서와 피디에프를 화면분할로 깔아놓고
타닥타닥 작업했다
(e님한테는 이렇게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지는 9개월 정도 되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나
하던 작업창을 닫았을 때만
사진을 볼 수 있고
바탕화면은 그런
아무렇지 않은 느낌이다
나는 바탕화면 속 사진을 보기 위해
작업창을 전부 닫기도 한다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024년 11월 6일 수요일

눈물

 

 

오늘 말을 하다가 눈물이 났는데, 그 공식적인 상황에서 일부러 울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물이 났고, 그 눈물의 기원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눈물의 기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눈물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어하던 사람처럼. 하지만 나는 그냥 눈물이 나는 대로 눈물을 흘렸고, 우리는 굳이 그 눈물에 대해 분석하지는 않았다. 그 눈물은 어떤 과거와 관련된 눈물이라기보다는 그냥 흐르는 눈물이었다. 유년시절과 관련되지 않은 눈물이었고, 내가 하던 얘기가 과거의 얘기긴 했지만, 슬프지는 않은 눈물이었다. 눈물이 났을 때 당황하며, 어 내가 왜 이러지, 원래 잘 안 우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고, 그냥 눈물이 나는 대로 나게 두었다. 그는 나에게 눈물에 대해 묻지 않았는데, 휴지 같은 것도 건네지 않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눈물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잠시 말을 멈췄고, 눈물이 끝나자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창문이 바람에 열렸고, 밑에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지나간 뒤에, 나는 시계를 봤고, 이 시간이 끝나기까지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었다.

2024년 11월 4일 월요일

겨울 게스트하우스

타버린 나뭇가지에 대고 숨을 들이마신다. 사향이랄까. 잘 모르지만 그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겨울날이었다. 왜냐하면 계속 겨울이었으니까. 내 언 손을 붙잡아주길. 다른 사람들은 이 장소처럼 계속 겨울이 아니다. 겨울이 되어버린 건 마주 잡을 수 있는 손들을 뿌리쳐버린 것에도 있었다. 불길로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외로움을 감당하기 어려웠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은근히 불길 안에 감자를 구우면서 군침을 삼키는 사람들이 내가 피운 불길을 보고 있었다. 이런 대화는 내가 숨기고 싶은 것이 그 사람들 눈앞에 드러나 있고 사람들은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관심이 없는 건지 그저 감자들을 베어 물 뿐. 다들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얼게 하는 추위 때문에 그렇다. 누군가가 내게 건넨 화관이 풀려 봄의 꽃잎들이 잠시 동안 내 머리 위로 흩날려 떨어진다. 콧물이 나온 사람들. 불길 안에 손을 가까이한 사람들. 불길 안에 붙들리는 듯이 있는 사람들이 마주 보며 제 자신에 대한 소개라기보단 서로에게 평상시에 쓰이는 익숙한 말씨로 알게 하고 있다. 저들끼리를. 무언가 추운 것이 있는 사람들이 털레털레 웃으며 추위와 관련된 기억을 얘기한다. 여기 말고 다른 데는 무섭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게 되어가는 불길 앞에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 이곳을 오래 지키고 있으면, 불길의 주인인 것처럼 굴 수 있고 또 나뭇가지도 구울 수 있다. 나뭇가지 숯을 만들기란 몸통을 베어 그렇게 만드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불길을 오래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만 했다. 사향이라고 한 그 냄새를 또 맡고 싶었다. 불길 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까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한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나 혹은 불길이. 아니면 그 감미로운 느낌들이. 이곳의 모두는 제한되어 있다. 추위 탓에. 눈송이를 돋보기로 보더라도 과학 시간에 배운 결정 모양이 안 보인다. 하지만 이 추위는 진짜였다. 대부분의 일이 그런 것 같은데,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고 타버린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면 그 둘 중에 하나가 된다. 곧 있으면 저녁이 된다. 그렇다면 곧 밤이 될 것이며, 캠프파이어로는 이 한데서 버틸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자리에 눕는다. 방 안에는 온기가 감돌고 사람들은 피곤했는지 금방 잠든다. 이 밤의 밖은 정말 춥고, 난 잠이 안 온다. 불길 안에 손을 가까이한 사람들. 왜 시간을 버려가며 이곳에 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사람들. 나도 그랬으니까.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딱 그 부분만은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불길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 불길이 나의 것이 되겠노라 하며 펄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이 된 나처럼 계속 겨울이 아니었다.

2024년 11월 2일 토요일

초월일기 17

지겨운 것

1, 11월에도 등장하는 모기 2. 입만 산 놈들 3. 자신의 신념을 설명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놈들 4. 보다 더 지겨운 건 5. 자신의 신념에 대해 설명도 못하는 놈들

2024년 11월 1일 금요일

두 가지 일

오늘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A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그 일을 오늘 알게 되었다. A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아니면 병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A가 죽기 전에 그에게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 일을 오늘 어쩌다가 알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의 삶이, 하지만 그는 나름의 이름을 얻고, 아마도 살면서 그 명성을 누리기도 했을 텐데, 이렇게 끝나버리고. 그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 그의 작품을 기억할 사람이 세상에 1백 명도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그 사람의 작품에 크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어떤 위치, 뭐랄까, 새롭고 독창적이라는 이름, 어떤 아이콘, 어떤... 아무튼 그런 타이틀을 달고 지내던 사람이 죽자,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들, 50년 100년 전의 작품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그의 그 독창적이고 새롭다, 라는 타이틀은 20년도 채 살아남지 못 하고 끝나버린 것이다. 허무하다. 모든 게 너무 빠르기 때문에, 빠르게 성공하고, 빠르게 타이틀을 얻고, 하루아침에 말이다. 그런 뒤에 빨리 끝나버린다. A가 죽었다는 사실, 그 사람을 직접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실제로 교류하던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까 그렇다고.

두 번째는 B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B와 두세 번 만난 적이 있고, 그가 이 분야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하지만 오늘 우연히 B가 일하는 곳에 방문하게 되었고, 그가 거기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B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 사람을 거기서 만날 것이라고 전혀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하지만 나가는 길에 B를 알아보았지만 굳이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냥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오는 것이, 인사를 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이런 일기를 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에게 인사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B가 거기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B는 이 분야를 전공하지 않았고, 어쩌다가 그 일을 하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분야를 전공하고 있고, B가 일하는 바로 거기 지원서를 냈으며, 아무런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B를 마지막으로 만난, 6개월 전에 우리가 이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B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그곳에서 일하는 B를 만난 것이다. 내가 지원하고 연락을 받지 못한 바로 그곳에서 말이다. 나는 그들이 내 지원서에 답장하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바로 그 이유에서 B가 그곳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있고, 애쓰고 있는 반면에 B는 그 분야와 상관없고,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그 분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 내게 일어난 일과 상관없이,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진지하고, 항상 너무 진지해서, 그 일과 계속 멀어지게 되는 느낌 말이다.

두 가지 일을 알게 되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었다. 커피를 두 잔 마셨고, 마지막에 마신 커피는 조금 남겼다.

24년 10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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