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0일 수요일

데모판

언젠가, (일은 안 하고) 그놈의 트위터에다 대고 이런 출판사 이름은 어떨까 저런 이름은 어떨까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던 와중에, 곡물창고의 필자 중 한 분이 ‘이판사판출판’을 슬쩍 제시해 주셨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색해 보니 출판사 ‘이판사판’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폐업했지만. 나는 대안으로 ‘개판출판사’에 방문하기로 했다. 개판출판사는 찾아가기까지 아주 고역이었다. 엄청난 언덕길... 겉옷을 한 꺼풀 벗어 둘둘 말아 쥐었다. 이런 언덕을 걸어서 오르는 이들도 있는가? 있다. 언덕을 걸어서 올라보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당연히 있다. 개판출판사는 이 언덕을 넘어가면 있다. 개판출판사가 있는 동네는 이런 언덕들에 둘러싸여 있다. 구덩이 같은 곳에 있는 셈이다. 지난번 찾았던 국립출판사 생각도 난다. 거기 사장은 정말 개새끼였다. 그 표정이며 말투 하며... 개새끼... ...끼 ... 같은 새... 꼭대기에 다다르니 바람에 땀이 식는다. 파헤쳐진 땅벌집 같은, 썩 좋은 풍경은 아니지만 풍경이 트인다. 머리가 맑아지는 듯하다. 맑아지는 듯하다고 생각하자마자 얼굴이 두 방향으로 찢어질 것 같다. 이제 겨울이란 말이지? 다시 옷을 입고, 나는 개판출판사를 잊는다. 잊고, 나는 출판사 ‘데모판’으로 방향을 다시 잡는다. 데모판에서 나오는 책들은 마무리가 안 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렇다. 내용, 표지, 편집, 교정, 어느 부분인가 하여튼 꼭 완성이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책이 너무 빨리 나왔나? 데모판의 구성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책이 세상에 나와야 하는 시간이 돌이킬 수 없이 정해져 있다면, 그 책을 만드는 데 사람들이 쏟을 수 있는 시간 역시 돌이킬 수 없이 정해져 있을 뿐이다. 나는 한쪽 귀에 걸쳐 놓았던 마스크를 다시 쓴다.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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