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0일 금요일

붉은 말

그 붉은 말이 보일 때마다 이름을 붙여주려고 했거든

그를 뒤따라간 지 벌써 십수 년이 넘었다

그를 볼 때마다 그가 점점 커져서 나는 그의 뒤에 있기도 나는 그의 앞에 있기도 나는 그의 위에 있기도 나는 그의 아래 있기도 했고

그는 너무 커서 나는 너무 작아서

토끼에 물린 상처는 낫지 않았지 내가 흘린 고름이 모이면 나만 한 덩어리가 되겠지 덩어리는 내가 되겠지 토끼에 물린 상처는 낫지 않았지

그는 오늘 처음 만난 내게 수십 쌍의 덩어리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나도 그 덩어리들을 봤어요 토끼에 물린 상처는 낫지 않았죠 당신도? 당신도! 그날 우리는 두어 번 떡치다 잠들었습니다 피와 오줌과 똥과 정액과 침과 발끝

에서더러운물을뚝뚝흘리는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은. 나를두고그사람은떠나갔어요씨발 그 사람은 또 다른 남자는 오늘 처음 만난 내게 우리가 흘린 덩어리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내겐 죽은 엄마와 산 엄마가 있어 나는 산 엄마의 편이지 산 사람은 산 사람의 편이지. 내가 죽고 나서야 죽은 엄마는 제 편을 갖게 될까

엄마, 엄마 나는 산 엄마의 편이에요 미안해요

그 사람은 붉은 말의 등 위를 걷는 한 무리의 덩어리를 봤다고 한다. 말은 너무 커서, 덩어리는 너무 작아서 말은 덩어리의 앞 뒤에서, 위 아래에서 소근소근 무어라 말했지만, 나는 듣지 못했어요. 바닥에 물을 뚝뚝 흘리며 걸쳐있는 내게 그 사람은 나는 산 사람의 편이에요.

미안해요.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