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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3일 금요일

직업소개사

나는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
나는 미래직업소개소*에서 무직자에게 노동의 기쁨을 알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동을 소개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 있었다.

옛 사람들은 행복한 미래 하나와 불행한 미래 하나를 상상했다. 사람이 하던 노동을 기계가 도맡고 사람은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세상과, 사람이 하던 노동을 기계가 도맡고 사람은 노동 현장에서 쫓겨나는 불행한 세상.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하지 못하게 된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인지 불행한 세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더 이상 직업을 소개받으러 오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언젠가부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미래직업소개소에서 9시에 출근해 8시에 퇴근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방문객이 드물어진 초기에는 라디오를 듣거나 영상물을 보거나, 나중에는 막 나가자는 의미에서 게임도 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커다란 고민 속에서 시계만 쳐다보다가 시계가 멈추면 약을 갈아 넣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있노라면 텅 빈 사무실이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신과 장소가 동화되는 게 아니라, 장소에 자신이 편입되는 감각을 느껴본 이라면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다.

방문객이 오지 않는 것도 고민이지만, 노동하는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도 (여전히) 고민이지만, 당장에 내가 나에게 새로운 직업을 소개시켜줘야 할지, 아니면 일을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최대의 고민이다.

고민 끝에 사무소 한편에 비치되어 있던 월간 <직업 전선>이라는 책을 읽어본다. 여러 직업군에 속한 이들이 자신의 노동에 관해 기술한 체험기……인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다. 헛소리를 적어놓은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민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고민의 골만 더 깊어진다. (이딴 걸 왜 책으로 엮었지?)

‘미래에는 현재의 직업이 사라지고 줄어드는 한편 새로운 직업도 생길 것이므로 오래오래 일할 수 있는 미래의 직업을 소개받으러 오십시오’라는 기원을 담아 미래직업소개소라는 이름으로 직업소개소를 열었으나 대략 창업 20년을 맞은 지금 나는 정말로 대 위기다. 직업을 소개시켜주는 사람인 나 자신이 이 직업을 유지해야 할지,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할지, 그냥 일을 그만해야 할지 결정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사람들은 왜 여전히 일하기 싫어하고 일하고 싶어 할까?
궁극적으로는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일하고 싶은 마음인 채로 일하지 않는 걸 바라는 걸까?
(혹자들이 더는 책을 읽지 않아도 되지만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인 채로 책을 읽지 않듯이?)

에라 모르겠다. 이 고민을 <직업 전선>에 투고해보고 나서 생각해야겠다.



*대한민국 서울시 영등포구에 소재한 곳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2019년 8월 7일 수요일

노점상(인형을 파는)

해역을 건너온 아이들을 좌판에 벌여두고 난롯불에 두 손을 쬐고 있는 일요일, 겨울. 동묘는 16세기 말 선조가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지은 관우의 사당.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성인 가요. 가짜 브랜드, 가짜 시계. 권력도 약속도 없는 반지들. 이미 유물 같은 전자 제품들. 한창 허기질 때 길거리 음식 냄새. 옷 무덤이 군데군데. 그야말로 옷의 무덤. 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여기서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유독 추운 날이라 그런지 썩 밝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표정. 눈이 올 것만 같은, 오지 않는 하늘. 울 것만 같은, 울지 않는. 그러나 내가 너희들 부모도 아니고, 언제까지 너희들을 돌볼 수는 없단다……

2019년 8월 4일 일요일

장난감 공장 노동자

벨트를 따라 오는 저것들. 모두가 같은 것들. 아직 존재가 아닌 것들. 형상 없던 것들에게 형상 있게 하고, 혼 없는 것들에 혼 불어 넣어주는 자를 무어라 부를까. 신? 네 대답이 그렇다면 나는 신인 것 같아. 세상의 신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금발 인형들의 신이긴 하겠지. 인간의 혼은 어디에 깃들까. 심장? 뇌? 인형의 혼은 어디에 깃들까. 눈? 눈이 없는 장난감은 인형이 아니야. 눈이 있는 장난감만 인형이야.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도,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도, 자동차 모양으로 만들어도, 눈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인형(人形)이야. 눈에 혼이 깃들기 때문이지. 벨트를 따라 오는 저것들. 나는 저것들에 눈을 붙이는 사람이야. 혼 없던 것들에 혼 불어 넣어주는 사람이야. 날마다 수천의 영혼을 만드는 사람이야. 내 혼은 어디다 빼둔 채로 인형에 사랑과 슬픔과 공포를 눌러 담는 사람이야. 내가 만든 많은 인형들은 곧 친구를 만날 거고, 가족이 될 거고, 가족에게서 버려질 거야. 가족의 손에 의해 망가지고 더럽혀질 거야. 인형들은 그 역사적인 순간들을 영영 감지 못하는 눈으로 모두 지켜볼 거야. 망가진 인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죄책감을 아는 사람이야. 망가진 인형을 고쳐보려는 사람은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야. 망가진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을 아는 사람이야. 사랑해서 인형을 망가뜨리는 사람은 사랑에 미친 사람이야. 벨트가 멈췄으니 자러 갈 시간이야.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사랑? 그래. 사랑. 자면서 생각해보자. 안녕. 머리만 남은 나의 아이, 나의 신도.

2019년 7월 3일 수요일

펀드 매니저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빌딩 옥상입니다. 고객님의 소중한 자산은 고객님의 전부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전부를 파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열매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사무실입니다. 증시판에서 수직 하강 중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갈 곳 잃은 자신에 관한 존재론적 출구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뉴욕의 한 호텔입니다. 부는 행복과 상관이 없다는 증명에 의해 또한 부가 행복임이 증거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강을 건너는 철교입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와 교차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뜨거운 맥주 통 안입니다. 망가진 것들을 복구하려는 노력과 회생에 대한 의지가 최고조에 다다르는 순간에 번개처럼 내려치는 판결의 두 이름은 불가능과 무의미입니다. 이 지울 수 없는 이름들이 죽음의 혁명적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여기는 지중해의 휴양지입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공포의 행군입니다. 그러한 여정길에서 돈은 진통제입니다. 그러나 자살하면 고통도 없습니다. 진통제도 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2019년 6월 29일 토요일

헌병 수사관


헌병 수사관이 된 이후로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것, 바로 유서다. 논리적인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살인에 관한 소설들을 읽었을 때부터일까, 아니면 영정(할아버지의)을 처음 봤을 때부터일까. 나는 죽음에 일찍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에 관해 생각해왔다. 정확히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 (내 죽음? 알 게 뭔가. 나는 죽지 않을 텐데.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이 세상에 문자로 된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한다는 점은―그것이 시일지라도―인간이란 존재가 최후까지 생각을 놓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나에게 재확인시켜준다. 죽기 전의 유서 쓰기, 그것은 세상에 영혼의 잔량을 새기는 일인 것이다. 영혼이란 개념을 믿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인생은 안에서 볼 때엔 더없는 비극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우스운 희극이다. 지난 이 주 동안 발생한 두 건의 자살 사고는 그 점을 더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주 전 A중령이 죽기 전에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평생 나라에 충성하고 전우를 믿으며 살아왔는데 돌아오는 건 배신뿐이구나. 허망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는 주어진 진급 기회를 모두 놓쳐 중령 계급으로 퇴역을 준비 중인 군인이었다. 와중에 평소 의지하던 B중령이 솔깃한 투자를 제안했다. A중령은 퇴직금을 몽땅 B중령에게 맡겼고, B중령은 사라졌다. 다른 여러 군인들의 목돈과 함께.
그리고 한 주 전에 B중령이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멍청한 군인들.
개 같은 내 인생.

B중령은 A중령을 포함한 여러 동료들에게 사기를 쳐 10억을 모았고, 그 돈을 100억으로 만들어준다는 외국 투자자에게 맡겼다. 투자자는 사라졌다.
나이 많은 군인의 자살 사례는 대부분 돈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군 생활만 해서 세상의 이치에 밝지 않으니(나 역시 예외는 아니리라)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이다. 반면 젊은 간부의 자살은 크게 두 가지가 주된 자살 사유로 조사된다.

주희(가명)야.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니 나도 더는 갈 곳이 없구나.
부모님 죄송합니다.

처럼 연애 문제이거나,

내가 죽는 이유는 다음 달 있을 전군재물조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초급 장교로서 심적인 부담이 너무 크다. 매일 스트레스를 받아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다. 이 정도로 나약한 내가 한심하다. 나의 죽음으로 인해 사단장님이나 대대장님 등 다른 간부, 병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죽음은 오로지 나의 모자람 탓이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처럼 업무상 스트레스 문제 등이 있다. 장교일수록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비중이 높고, 부사관일수록 연애 문제로 인한 자살 비중이 높다.
병사의 자살 사유는 여러 가지인데, 가정 환경으로 인한 비관 자살이 가장 빈번하다. 대개 집안에 돈이 없고, 부모 사이가 좋지 않거나 이혼했으며, 자신이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이들이다. 최근 자신이 살던 시골집의 비닐하우스에서 나일론 줄로 목을 졸라 자살한 병사의 유언은 이랬다.

군에서 남은 2년을 보내려니 막막하다. 나와서도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잘하는 것도 없고…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떠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선규(가명)야, 짐을 얹고 가서 미안하다.

많은 자살자의 유서엔 공통적으로 죄의식이 나타난다. 혼자 죽는 게 인간이지만, 혼자 사는 건 아니기 때문일까?
오늘도 우리 부대에서 병사 하나가 죽었고, 나는 현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죽은 병사 가족의 집이다. 자살자는 두 시간 전에 아파트 15층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병사는 신병 휴가 중이었고, 오늘은 복귀 예정일이었다.
사고자 부친의 진술에 따르면(모친은 충격으로 입원해 있다), 사고자는 휴가 내내 자신의 방 안에서 지내다가, 두 시간 전 자기 방에서 나와 큰방에서 티브이를 시청 중이던 부모에게 “어머니 아버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친 후 그대로 베란다까지 달려간 뒤 뛰어내렸다고 한다.
부대로 돌아가 같이 생활하던 병사들의 진술을 들어 종합적으로 수사를 진행해야 하겠지만, 사고자 아버지의 진술과 유서를 살펴볼 때 단순 비관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 사고자는 학창 시절 간에 질병이 있어 입 냄새가 심하게 나는 사람이었고 이때 받았던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입 냄새가 치료된 이후에도 자신에게 끔찍한 입 냄새가 난다고 믿어왔다.
사고자의 유서를 읽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물론 사고 현장, 죽은 사람, 유서 등을 보는 건 언제나 좀 찝찝하고 씁쓸한 일이지만, 이 유서는 뭐랄까, 조금 평범한 언어로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유서 쓰기가 세상에 영혼의 잔량을 새기는 일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그렇다면 이 병사의 영혼은 매우 불쾌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괴퍅한 문투와 지독한 악필은 뭔가에 오염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오늘도 계속되는 세상과의 불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맨손체조. 윗몸 일으키기. 운동을 하면 잠이 온다. 이 위치가 가진 에너지를 설명할 수 없음. 중력이 내 몸을 처박기 전까지. 땀을 흘리면 기분이 낫다. 메들로 풍비의 지각의 현상학은 학수에게 주겠다. 정신의 테니스. 공은 내가 치려는 순간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오늘도 행인들이 비웃었음.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을 하면 잠이 온다.

메들로 풍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고자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작가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 친구에게 저작을 유증으로 남길 정도이니 말이다. 전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자와 책의 이름은 사악한 자력이 있는 것처럼 나의 영혼을 끌어당긴다. 매우 불쾌하다. 그가 최후까지 놓지 않은 망상, 피해의식을 읽노라니 구토가 일 것만 같다. 뭔가를 써두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펜, 당장 펜이 필요하다. 지금 써두어야 한다. 나는 지금 당신의 시체가 아니라 당신이 쓴 글을 보고서 극렬한 구토감을 느꼈다고. 나를 그렇게 만든 건 죽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2019년 5월 30일 목요일

왕(무인도의)

나는 일국의 왕이니라.

나의 영토는 내가 20년 전 표류한 이 섬으로, 그 넓이는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반나절은 걸어야 끝에서 끝으로 종단 가능한 정도이니라. 섬에서 생활한 지 8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이곳에서 무한한 자유와 함께 이 땅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복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국가의 탄생을 선포했노라.

나의 백성은 최초에는 각각 넷이었으나 지금은 저마다 수십으로 불어난 개와 고양이 들, 그리고 국가법에 따라 엄격히 다섯 마리로 제한하고 있는 염소들이니라. 염소들은 노동과 함께 평화롭고, 개와 고양이들은 서로의 영역을 나눠 분쟁 중이나, 나누어진 그 영역마저도 엄연히 짐의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내가 행차하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스레 애교를 부리매 그 또한 노동임을 내 모르지 않노라.

내 섬의 많은 것들이 내게 많은 것을 선사하기에 나는 이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함을 아노라. 또한 내게 필요한데 없는 많은 것들을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신께서 주셨기에 이 나라에서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는 오로지 신뿐임을 모르는 이 없노라. 그리하여 나는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되면 언제나 나의 옥좌―평범하게로는 원두막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노라. 표류한 뒤에도 오랫동안 기도문을 기억했으나 인생에서 가장 큰 절망을 겪었던 표류 4년에서 7년 차에 잠시 신앙을 놓아 전에 알던 기도문은 이제 잊었노라. 표류 8년 차 어느 날 불현듯 내 삶과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니, 내가 그전에 알던 종교는 거짓된 종교임을 깨닫게 되었노라. 그리하여 나는 오로지 신만을 위한 진실된 하나의 종교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기도문부터 해서 모든 의식을 새롭게 만들었노라. 나는 일국의 왕이며, 또한 단 하나뿐인 진실된 종교의 유일한 신도요, 수장이니라.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은 말벗이었노라.
처음에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서 큰 안식을 얻었노라. 대화는 늘 나에게 피로와 메스꺼움을 느끼게 만드는 행위였으매 더는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할 일이 없으니 인간 사이에 있을 어떠한 문제와 불편도 없고, 그리하여 나는 불행의 근원은 바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노라.
그러나 어느 여름날 장마철에 질병에 걸렸을 때, 사경을 헤맬 때, 절로 내 입에서 기도의 말이 나오더라. 그러나 기도의 말 들어줄 이가 곁에 아무도 없더라. 그때 처음으로 신을 원망하였노라. 신이 내 목소리를 듣고 계신다면 나를 이렇게 버려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앉아 나의 땀을 식혀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있다면 그가 누구더라도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그리하여 한때 나의 가장 충직한 신하였으며 나의 총애를 누린 회색앵무가 하나 있었으니 나는 그의 이름을 일요일이라고 지었노라. 그가 나의 성―평범하게로는 움막이라 불리는 곳으로 날아온 이후 나는 그에게 많은 단어를 가르쳤으매 그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단어의 뜻을 하나둘 이해하기 시작하니,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더라. 교육자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더라.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나는 크나큰 안식을 얻었으니, 그 작고 영리한 존재가 내게는 바로 안식일 같더라. 내가 900일하고도 스무날쯤은 더 지난 시간 동안 그에게 가르친 단어가 일백 개는 넘었더라. 내게 오라 하면 내게 오고, 망을 보라 하면 홰 위에 올라 망을 보고,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자연!”이라 대답하였으니, 그야말로 일요일은 자연에서 온 가장 큰 선물이었으며 신께서 내게 내린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더라.

그런데 하루는 “오너라” 해도 앵무가 말을 안 듣더라. 재차 “오너라” 해도 들은 체도 않고 홰에서 내려오지 않기에 “일요일아,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대뜸 “외롭다!”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놀랐노라. 첫째로 나의 말을 거역하여 놀랐으며, 둘째로 나의 말을 거역하는 까닭이 저가 외롭기 때문이라 놀랐으며, 셋째로 내가 외롭다는 단어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그 단어를 스스로 깨친 것인가 싶어 놀랐으며, 넷째로 일요일이가 온 이후로 더는 외롭지 않다고 느꼈으나 내가 잠꼬대로 외롭다고 중얼거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내가 모르쇠 했던 속마음에 놀랐노라. 그 모든 놀라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으니, 근처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네 이놈, 하며 일요일이를 마구 혼냈노라. 일요일이는 작대기질에 매우 놀라며 날개를 푸덕이더니 이윽고 떠올라 창공으로 날아올라 사라지더라. 그리고 더는 돌아오지 않더라. 나는 얼마 안 가 후회했으나, 떠난 말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섬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벗을 잃으며 알았노라. 그렇게 왕국은 다시 침묵의 왕국으로 돌아갔노라.

이 말 없는 왕국은 그래도 내게 충분히 주었고 하여 나는 충분히 행복했노라.
가끔 두렵고 외로웠으며 고통스러웠고 불행했으나,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혹자들의 말이 완전히 틀렸음을 나는 내 삶을 통해 증명했으며, 본래 자연에 없었으나 인간이 새로 만들어낸 것들은 대체로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아니 없는 게 낫다는 걸 이 왕국을 운영하며 배웠노라. 그리하여 나는 이 왕국에서 내가 느낀 점들을 이렇게 남긴다. 고기를 위해 염소를 도축할 때마다 말려둔 가죽(양피지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만) 위에 얼마 안 남았던 잉크를 사용하여, 하루하루 잊어가는 단어들을 되살려가며.
‘쓰기’는 스러져가는 기억들의 부활이며 영혼의 방부제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배우노라.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자네가 만약 우연히 나의 섬을 방문한다면 나는 말을 않은 채 자네를 극진히 대접하리라. 자네를 위해 내 염소를 내어주고, 깨끗한 물을 내어주고, 표류 15년 차부터 만드는 법을 익힌 빵을 나눠줄 것이며, 표류 당시부터 가지고 있던―내 가장 진귀한 보물!―브랜디를 한 잔 내어줄 것이며, 개와 고양이를 한 놈씩 데려와 충분히 만질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나 자신 또한 모닥불 앞에서 멋진 춤을 추리라. 그리고 그대를 위해 진실된 기도를 드리리라. 그 모든 일을 말없이 하리라.
그리고 자네가 나의 섬을 떠나간다면 점점 작아지는 나의 왕국을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나의 삶, 나의 왕국, 복되고 복되고 복되었으며 앞으로도 일천만 세 복될 것이라.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바리스타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는 에밀리입니다.

네? 얼마 전까지는 제인이 아니었냐고요? 네, 그랬죠. 카페 매니저와 상담 후에 바꿨어요. 제인은 너무 올드하고 무뚝뚝한 느낌인 것 같다는 말을 들어서 좀 더 사랑스러운 느낌의 에밀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강요나 압박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내린 결정이에요.
일하기 전에 탈의실에서, 혹은 일하다 잠깐 짬이 나서 한숨 돌릴 때, 저는 배지로 가득 찬* 저의 앞치마를 두 손으로 잡고 펼쳐봅니다. 아기자기한 배지로 빼곡하지요. 우리 카페는 직원이 손님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배지를 약 일곱여 종 정도 앞치마에 부착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네, 강요는 아니에요. 강요는 아니지만 카페의 얼굴인 바리스타로서 손님들에게 개성적인 인상을 심어주면 좋을 듯하여 아끼던 배지 중에 일곱 개를 골라 달았어요. 새를 좋아해서 새 모양의 금속 배지를 몇 개 달았고요-흰머리오목눈이, 뱁새, 퍼핀, 오리, 홍학 등-, 좋아하는 아이돌의 배지도 달았습니다.
네? 일곱 개를 골라 달았다더니 왜 앞치마에 달린 배지가 서른일곱 개나 되냐는 말씀이시죠? 카페 매니저와 상담 후에 추가했어요. 매니저가 그러더군요. 왜 배지를 일곱 개만 달았냐고요. 손님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배지를 약 일곱여 종 정도 앞치마에 부착하는 것이 규정상 권장 사항 아니냐고 말씀드렸더니, 그건 말 그대로 권장 사항일 뿐이라고 하더라고요.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지 않으세요? 돌아보니 조이, 리나, 헤일리 모두 앞치마에 배지를 수십 개씩 달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제야 저는 현실을 깨닫고 퇴근한 뒤 곧장 후원 사이트에 접속했답니다. 여러 곳에 후원하고 배지 받으려고요.

제가 근무하는 시간은 점심 무렵부터 저녁 전까지입니다. 주변에 회사들이 많은 곳이라 점심에는 몰아치는 폭풍을 맞은 듯 정신 없다가, 폭풍이 지나가면 급격히 한산해지며 고요를 되찾습니다. 서너 시쯤이면 여느 여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로 돌아가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피곤한 때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저기 구석에 앉아 언제나 제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중년의 넥타이맨 때문이지요. 결코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제게 말해줘서 알게 된 바로, 그는 백수가 된 기러기 아빠였어요. 아내와 아이는 몇 년간 국외 생활 중이고, 자신은 그사이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됐는데 차마 밝힐 수는 없었대요. 집에 혼자 있는 게 외롭고 힘들어 남들처럼 출근하는 척하며 이 카페에 오게 됐고, 덕분에 저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러고는 저 때문에 계속 이 카페만 찾게 된다며, 정말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그런데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거 있죠. 당연히 알려주지 않았죠. 엄청 난감했고, 화도 좀 많이 나고 그래서 울 뻔했는데 마스카라 번지는 거 엄청 싫으니까 참았고요. 그냥 어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죄송합니다 고객님 했어요. 그러니까 이해한다라고 말하며 그래도 카페에는 계속 와도 되는 거냐고 묻는 거 있죠? 아니, 그런 걸 왜 물어요? 자기가 언제 나랑 만났다가 헤어지기라도 했나? 저 같은 말단 직원이 솔직히 안 왔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혼자 머릿속으로 이상한 중년 로맨스나 찍고 한심하네요! 마음속으로만 백만 번 외쳐주고, 셀카 찍으며 화 풀었어요. 필터 한 방 먹이고 증강된 내 얼굴을 보면 마음도 더 단단해지는 기분.
이 카페에서 6개월 일하는 동안 각각 다른 남자 손님들로부터 열다섯 번이나 고백 받았어요. 정말로 저를 좋아해서 그런 건지, 고백해서 혼내주자**는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저는 딱히 손님들에게 쌀쌀맞게 굴지도 않았다고요), 정말 그런 일 있을 때마다 피곤해요. 개새끼들!

저는 그저 ‘취준생’ 신분으로서 생활고 때문에 카페에서 일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커피를 사랑하고, 커피가 필요해요. 검은 그것은 영혼의 연료예요. 언젠가부터 하루 한 잔이라도 들이붓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고, 돈과 인간에 시달려 지쳤을 때 시럽 듬뿍 넣은 커피를 한 잔 마시면 그래도 조금 살 만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도 다음에는 절대로 카페에서 일하진 않을래요. 물론 내 카페를 차리지도 않을 거고요. 영혼의 연료를 파느라 제 영혼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어요. 계속 이러다간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그리고 여기, 주문하신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왜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냐고요? 야, 이 개새끼야.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시올, 2018. 72쪽을 참조함.

**김태훈, “왜 알바에게 고백해서 혼내주려 하나요ㅠㅠ”, 경향신문, 2019년5월1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111235011&code=940100

2019년 4월 25일 목요일

어부

그물 걷는 날이라 낚싯배 끌고 나갔지. 채비도 살피고 별신굿도 드렸지. 하늘 화창하고 풍랑도 잔잔해 가슴이 두근두근한 거라. 그물 걷어 올렸는데 뭣이고. 고기는 한 마리도 없고 뭔 해골바가지 하나 걸려 있는 거 아니겠나. 와, 나 황당해서 던져버리려는데 가만히 보니 해골 두상이 제법 잘 생겨 보인다. 뭔가 익숙하고 그립고 어디선가 본 듯한 두상. 나어린 꼬마가 대문 앞에서 손 흔드는 거 뒤로한 채 바다로 영영 떠난 아버지의 마지막 뒤통수. 맞나. 아버지 맞나. 해골 니가 내 아버지가. 내 아버지였던 무엇이가.

2019년 4월 18일 목요일

고서 감정사

이 책의 표지에서는 이론서의 냄새가 난다.
이론서는 냄새만 맡아도 이론서이고, 에세이는 냄새만 맡아도 에세이이다. 특히나 전도서는 잊을 수 없을 만큼 고풍스러우면서도 악독한 냄새를 품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질식사할 것만 같다.
종이책=고서들은 저마다의 냄새를 품고 있다. 어떤 종이로 만들어졌는지, 주로 어디에서 어떻게 보관되었는지, 어떤 이들의 손을 거쳤는지에 따라 다른 냄새를 입게 된다. 아,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 냄새를 통해 정말로 어떤 책인지를 정확히 감별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오해는 말기를. 우리는 책 감정사이지 책 소믈리에가 아니다.
선조들은 종이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오리라고까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때때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고어들을 번역해보면 ‘어쨌거나 종이책은 남아 있을 것이다’ 따위의, 추락하는 캡슐 속에서 보내는 희망의 구조 사인 같은 메시지들이 당대 여러 작가의 잡문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선조들이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책은 여전히 ‘생성’되고 있지만, 종이책은 유물이 되었다. 아직 개념 합의가 완전히 된 것은 아니나, 책은 더 이상 ‘물성’(선조들이 종종 사용했던 단어인데, 왜 이런 개념이 필요했는지는 모르겠다)을 지닌 단어가 아니라 지시적인 단어에 가깝다. 어떠한 대상에 대해 어떤 이가 그것을 ‘읽어내야’ 한다고 요구하면 그것은 책이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책의 개념에 관하여 선조들이 동의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종이책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더불어 책이 ‘전자책’이라는 과도기적 개념을 벗어난 뒤에도) 책이라는 단어가 이토록이나 모호한 형태로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어떠한 식으로라도 ‘책’이라는 단어를 존속시키고자 많은(소수의) 지식인들이 암암리에 공을 들였다는 점을 알아채도록 만든다.
손님은 내가 이론서에 책정한 감정가를 듣고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는 우연히 손에 넣게 된 고서를 팔아 크레디트를 여유롭게 채우고자 했던 모양이다. 감정받는 책이 이론서라는 걸 알면 높은 감정가를 받을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에세이라고 다 낮은 감정가를 받는 게 아니듯이 이론서라고 다 높은 감정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 이론서 및 저자가 당대에 미친 영향력이 막대했더라도 그 작가들이 살던 시간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진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런 점들이 ‘그다지’ 고평가의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 제본의 형태나 디자인 등도 확실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어떤 얇은 페이퍼백은 어떤 두꺼운 하드커버보다도 훨씬 비싸다. (대중들이 책을 소비하지 않아 출판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을 시기에는 시답잖은 책들까지도 죄다 하드커버로 제작되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우리 고서 감정사들은 고서 수집가들이 어떤 책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어떤 책이 고가의 책인지를 명확하게 분류해낼 수 있었는데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책등이 깨끗하며 눈에 띌 것. (가장 중요하다.)
2. 표지가 깨끗하며 개성적이면서도 아름다울 것.
3. ‘기분상’ 책을 몇 장 넘겨보더라도 종이가 바스러지지 않을 만큼 상태가 좋을 것.
4. 작품성이 있는 책이라고 전문가로부터 인증을 받았을 것.
5. 1~4의 조건들을 갖추면서 입수하기가 어려울 것.
6. 1~5의 조건들을 갖추면서 영향력 있는 작가일 것.
7. 1~5의 조건들을 갖추면서 완벽한 무명작가일 것. (현재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당대에 무명이었던 점이 중요하며, 단 한 권의 책만 가지고 있을수록 좋다. 이를 가려내는 데 있어 당대에 여러 필명을 사용했던 작가들이 무더기로 밝혀졌다.)

더는 종이로 만든 책이 생산되지 않고, 어떤 책은 그 책에 쓰인 언어가 더는 상용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을 거래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은 재미있다. 그들 중에는 고서를 번역해 읽는 이들도 극소수 있지만, 대부분은 전혀 읽지 않는 사람들이다(물론 그들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저 딱히 고서를 읽을 이유는 없기에 읽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어떤 물건을 모으는 수집가들이 어째서 그 물건을 선택하게 되는지 그 이유가 가끔 궁금하다.
고서 수집가들의 성배 중 하나는 21세기에 출간된 『카페 인터내셔널』이다. 이 에세이는 지금은 사용자가 거의 사라진 한국어로 쓰였으며, 작가가 죽기 전까지 개정 증보하여 총 여섯 개의 판본을 가지고 있다. 책등은 무채색으로 판본마다 음영의 깊이를 달리하며, 신국변형에 무선 제본으로 제작되었고, 서체로는 노토 세리프가 사용되었다. 작가는 생전에 이 ‘여섯 개의 판본을 가진’ 단 ‘한 권의 책’만 썼으며, 책은 판본에 따라 각각 한 권씩만 제작되었다. 이 책은 작가의 자기만족을 위한 개인 소장품이 아니었으며, 매 판본은 제작될 때마다 판매되었고 몇 차례 그 주인을 달리했다. 여러 가치 있는 수집 대상 중 특히 그 책을 언급한 까닭은 내가 고서 감정사가 되기로 한 이유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그 책의 실물을 보고자, 만지고자, 그리고 마침내 읽어보고자 이 직업을 택했다. 잠깐, 지금 앞에서 이해되지 않던 많은 것들이 이해되려는 참이니 생각을 끝낸 뒤 다시 이야기하겠다…….

2019년 4월 4일 목요일

프로레슬러

이번 달 또 한 선수를 방출했다. 선수라는 호칭도 아까운 놈이다. 프로레슬링에 관해 아는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을, 체격 크고 발전 가능성이 있어 보이길래 거둬줬더니 운동도 안 하고, 아프다고 우는소리나 하고, 도무지 남자답지 않아서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 단체에 남은 선수는 단장인 나를 포함해 4명이다. 아나운서이자 레프리이자 진행요원이자 선수를 겸하고 있는 김맨슨은 나더러 성질 좀 죽이라고 한다. 형이 레슬링을 사랑해서 그러는 건 알지만 너무 “FM”대로만 하면 다들 오래 못 버틸 거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딴 새끼들이랑 가짜 프로레슬링을 해나갈 바엔 나 혼자서라도 진짜 프로레슬링을 하는 게 낫다고, 다시 한번 그딴 소리 하면 너랑도 안 볼 줄 알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김맨슨은 더는 말 않고, “형 맘대로 하슈.” 하고는 남은 술만 퍼마시다 갔다.
가짜 프로레슬링은 뭐고 진짜 프로레슬링은 뭐냐고? 원래 프로레슬링은 다 가짜 아니냐고? 당신 같은 무지한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프로레슬링이 망한 거야. 알아?
프로레슬링은 짜고 치는 쇼가 아니다. 각본 있는 드라마다. 같은 말 아니냐고? 같은 말이면 당신도 앞으로 말 좀 저렇게 하고 살아라. “쇼네, 쇼!” 하지 말고 “드라마네, 드라마!”라고. “생쇼를 한다, 생쇼를!” 하지 말고 “리얼 드라마네, 리얼 드라마야.”라고.
드라마의 각본은 무대와 지문과 대사 들로 만들어지는데, 프로레슬링의 각본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프로레슬링에도 무대와 지문과 대사가 있다. 대형 프로레슬링 단체에는 각본을 쓰는 각본진도 따로 있지만, 우리 같은 작은 단체에는 문서화 된 각본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하자 상의만 한 뒤 디테일한 부분은 즉흥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각본의 유무와는 별개로, 프로레슬링을 단순히 각본에 의한 드라마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없는 것은 링이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경기는 링 위에서 짧게는 몇 분, 길게는 수십 분간 펼쳐지는데 이 동작 하나하나에도 각본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수행해내는지 말이다.
링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액션이 각본하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본이 지시하는 부분은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어떤 방법으로) 승리하는가”까지다. 그 디테일은 선수들이 채운다. 선수들은 저마다의 레슬링 스타일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상대의 스타일과 기술을 이해하고, 상대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줘야(이를 “접수”라고 한다) 부상도 최대한 피할 수 있으며 관객들이 보기에도 멋지고 깔끔해 보이는 기술을 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서로 잘 맞는 선수들이 링 위에 서면 멋진 경기가 나오게 되고, 서로 안 맞는 선수들이 대결하면 지루한 졸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프로레슬링은 각본이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각본 없이 몸으로 펼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멋진 경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상대의 스타일을 배우고, 배려하고, 자신 또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선수의 기본자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본도 안 된 자식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지난번 내한해 한 경기 뛰고 간 하드코어대디 그 자식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산산조각이 난 형광등 위에 굴러도 봤다며 흥행 걱정은 말라던 놈이, 정작 경기 내용 조율 중에는 무슨 다 안 된대요. ‘새마을 킥’은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안 되고, ‘유신 밤’은 최근 디스크 판정을 받아 조심해야 해서 안 되고…. 이거 안 되고 저거 안 되면 무슨 기술을 접수하겠다는 건지. 나, 원, 참. 해머링이나 하다가 끝내자는 말이야? 도대체 뭐가 하드코어라는 거냔 말입니다. 저런 놈들이 바로 프로레슬링을 생쇼로 만드는 놈들이다.
내 레슬링 스타일은 일반적으로 파워하우스라고 부르는 스타일이다. 난 신장이 그다지 크지 않다. 178cm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작은 편은 아니지만, 서양 빅맨들과 비교하면 작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서양 빅맨들에게 체격적으로 꿀리지 않기 위해 근육량을 늘렸다. 밥 먹고 운동하고 밥 먹고 운동했다. 지금도 하루 최소 한 시간은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 벤치 100킬로그램 깔끔하게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라. 그자만이 나랑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할 것 같으니까. 운동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근육량이 일정 수치를 넘어서면 근육량이 비슷한 사람과만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진다. 흔히 말하는 ‘멸치’들이랑은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다. 근육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지 내가 언어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이런 것들에 관해 연구하지 않고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고 있을까? 제대로 된 연구 좀 하세요. 그전에 일단 운동도 좀 하시고요. 운동을 해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그거 맨날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이상한 글이나 쓰고 있으니까 사람이 이상해지는 거야. 근육이 있어야 ‘몸의 대화’가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대화” 좀 하자는데도 자꾸만 거부하는 놈들을 방출시킨 겁니다. 아니, 나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왜 대화를 하려 들지 않아? 근육 좀 단련하라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가? 운동은 하기 싫고, 링 위의 슈퍼스타는 되고 싶고? 완전 도둑놈의 세상이에요, 아주. 안 그래도 노력 안 하고 얻기만 하려는 빨갱이 새끼들이 넘치는 판국인데, 레슬링 하고 싶다고 기어드는 놈들마저 그러니 내가 기가 안 찰 수가 있을까? 이건 진짜 기믹*이 아니라 내가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소신 발언 하는 거야. 내가 링 위에서는 로프에 태극기 걸어두고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 다 욕하고 혼내주고, 박정희 대통령님 찬양하고 하지만 그건 내 기믹이 ‘국뽕맨’이라서 그런 거지, 사실 저 미국인 좋아합니다? 일본인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비록 일본이 과거에 죄를 짓긴 했지만 일본 국민들 개개인의 인성은 썩어빠진 한국 놈들보다야 제대로거든. 아, 중국인은 예외. 걔들은 너무 더럽고 게으른 것 같아. 하여튼 나는 박정희 대통령님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잘못하신 점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국뽕맨이 아닌, 나라를 사랑하는 건전하고 건강한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진짜 나라가 걱정됩니다.
솔직히 이제 한국에서 레슬링 못하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내가 레슬링 망한 땅에서 제대로 레슬링 일으켜 세워보려고 내 돈 들여서 땅 빌리고(주변에 논밭이 펼쳐져 있는 시골이지만), 경기장 짓고(주변에 논밭이 펼쳐져 있는 시골의 비닐하우스이지만), 링도 만들고(비록 직접 땜질하다가 경기 중에 한 번 무너졌지만), 그렇게 열정 하나만 가지고 계속해왔는데 레슬링 하겠다는 놈들도 죄다 환상과 허영심뿐이고, 좌파가 잠식한 한국 땅 자체에 정나미도 떨어졌다. 세계적으로 프로레슬링 자체가 완전히 망한 거나 다름이 없다. SWA도 완전히 망했어요!  요즘엔 남자들이 빌빌대서 여자가 단체를 이끌어가고 있다면서? 어이구, 근육이 아깝다 이것들아. 왜, 불만 있어? 링 위에 올라와서 얘기해. 내 필살기인 유신밤으로 콱 그냥… OK,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기믹: 링 위에 선 프로레슬러는 어디까지나 선수가 링 위에서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연기하는 선수가 실제로 캐릭터와 같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도록 포장하는 수법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합니까?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머리 수집가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머리 수집가입니다.

머리 수집가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말 그대로 머리를 수집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어디에서 수집하나요?
-주로 길거리에서 수집합니다만, 간혹 숲이나 갈대밭, 저수지나 방파제 등등에서 수집하는 때도 있습니다.

대강 ‘어떤’ 머리입니까?
-정확히 ‘인간’의 머리입니다.

왜 머리를 수집하는 겁니까?
-그게 내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수집한 머리는 어떤 용도로 사용됩니까?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합법적인 일입니까?
-법전에 머리를 수집하면 안 된다는 법이 없으므로 이것은 불법적인 일이 아닙니다. 더불어 저는 머리를 수집하기 위해 다른 어떠한 불법적인 일도 저지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당신은 살인을 저지르거나 혹은 살인을 교사하지 않나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를 수집할 뿐입니다. 이런 머리들은 주인도 없는 머리들입니다.

머리에 주인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머리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떨어져 나갔다고 가정되는 몸통이 머리의 주인일까요? 하지만 몸통은 판단하는 주체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몸통에는 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뇌가 있는 머리가 머리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머리가 머리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굴러다니는 머리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장난처럼 느껴지는데요.
-당신도 굴러다니는 머리가 되어보면 제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노동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머리를 수집하기 위해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머리를 얻습니다.

수집한 머리는 어떻게 됩니까?
-제 코트 안에 보관됩니다.
-이렇게요.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비밀 관리자


방금 고객 한 분이 엉덩이를 털고 밀실 밖으로 나갔다. 대단히 육중한 엉덩이였다. 그는 무려 두 시간 분량의 비밀을 털어놓고 나갔다. 얽히고설킨 그의 여자 관계에 대한 비밀들이었다. 길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1급에 해당하는 개인 비밀이다. 이 비밀에 대한 보안은 굳게 유지될 것이다. 우리는 고객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니까.
어떤 비밀들은 지키기 어렵다. 아니 비밀이란 원래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이 비밀의 형성에 기여한 1차 공모자이든, 아니면 타인을 통해 비밀을 공유하게 된 2차 공모자이든(“비밀은 2차 전파 이후에는 약 99%의 확률로 비밀로서의 효력을 잃는다”라는 세계밀어관리국 통계에 따라 3차 공모자라는 개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비밀 관리 능력을 훈련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만한 언어의 압력을 감당할 만한 차폐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비밀이 생김으로써 받게 되는 언어의 압력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어내기 위해 그들은 비밀 관리 사무소를 찾는다.
우리 비밀 관리 사무소 직원들은 고객의 말을 성심껏 들어주고, 무의식이라는 토양 아래에서 저 스스로 의미의 잔뿌리를 뻗어나가는 언어적 특성상 발생되는, 고객 자신도 미처 몰랐던 비밀 속의 비밀을 놓치는 법이 없도록 진술되는 비밀에 대해 세심하게 반문하며 비밀의 투명함을 교차 검증한다. 불법 유출의 위험이 존재하는 비디오, 오디오, ‘대나무숲’ 등의 기록 장치는 일절 사용하지 않으며, 입사시 3개월간의 교육 과정을 통해 익히는 초월 기억법을 통해 그 내용을 뇌에 반영구 보존한다(초월 기억법은 뇌 사용에 관한 고도의 효율을 기대하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므로 사원 선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수행에 관계된 신체 능력이다. 특히나 입술의 무게는 최소한 21그램 이상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채용을 위해 입술 속에 이물질을 삽입하다 적발되는 경우도 있다). 고객 관리 차원에서 그들이 다시금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견디기 어려울 땐 같은 내용을 재차 들어주고, 기억 훈련이 되지 않은 고객들의 진술에 혹여나 오류가 있을 때는 이를 정정해주는 애프터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이를 비밀 강화 서비스라고 한다).
비록 훈련받았다고는 하나 비밀 관리 사무소 직원들도 한낱 인간이기에 비밀의 압력을 견뎌내는 데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직원들은 비밀 입력 후, 그 압력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독방에 가둔다. 그 독방은 목소리가 벽을 통해 수차례 반사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직원은 그곳에서 입력받은 비밀을 더 이상 육성으로 말하거나 듣기 싫어질 때까지 중얼거리다 나온다. 때때로 비밀 유지에 탁월한 성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레몬 추출물을 합성한 크림을 입술에 바르는 경우도 있다.
계약서상 명시된 비밀의 보존 기간은 특별한 언급이 없을 경우 계약자(갑)의 사망일까지이다. 때문에 갑이 사망한 후 세상에 알려진 비밀들 중 몇몇은 큰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다. 주로 기밀 문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군의 기밀 작전, 유명 인사의 성 추문, 갑의 사후에 발생하는 예언들(생전에 공식적으로 말한 바 없는 대 예언가들의 예언이 알려지는 대부분의 경우가 이를 통해서다), 연쇄 살인 사건의 ‘진짜’ 배후와 원인, 종교 지도자의 본체가 보존된 은신처, 사라진 보물들이 보존된 장소, 베이퍼웨어인 줄 알았던 소프트의 실존에 관한 진실, 500년 이상 이어진 맛집의 육수 레시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만약 갑의 사후에도 비밀이 지켜지길 원하는 경우 계약 사항에 특수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 대개는 “내가 죽고 나면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 때문에 가성비에 관한 딜레마가 따른다. 또한 이는 ‘죽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영원한 비밀’을 견딜 수 있는 직원을 필요로 한다. 오직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만이 가능한 일로서, 업계에서는 이들을 침묵의 수호자라 부른다.
계약 기간 중 계약자의 잘못에 의한 사건 사고로 비밀이 누설되거나 갑이 비밀 유지를 포기하거나 비밀 자체가 무의미해져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을 경우 갑과 을 중 한쪽이 계약 해지를 요청할 수 있다. 2급 이상의 비밀이었던 경우 묶여 있던 언령을 해방시키며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기도 한다.
뇌 속에서 항상 온갖 비밀들이 들끓고 있기에 직원들은 일평생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충분한 급여와 최대한의 복지가 제공되지만 결국 미쳐버려 폐인이 되거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직원들도 있다. 이러한 직원들은 내규에 따라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처리된다. 나는 갑으로서 이상의 비밀을 당신이 보관하도록 요구한다.

2018년 4월 2일 월요일

산역꾼

터로 간다. 아직 세상은 어둡다. 우리들은 지관(地官)을 따라 희푸른 산으로 들어간다.
삽을 들기 전에 산신께 공물을 바친다. 날이 밝으면 손이 올 것이니 그 손을 잘 보살펴달라고. 준비해온 술, 과일, 포 등을 차리고서 우리는 절을 한다. 이를 핑계로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명태를 묶은 삽을 광중(壙中)이 될 자리에 꽂아두고 그 주변에 술을 뿌린다. 광중의 네 귀퉁이에 흙을 한 삽씩 떠내고 공물을 올린 뒤 다시 절한다. 이를 핑계로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주변의 나무들을 벤다. 특히 광중 부근의 나무들은 뿌리까지 캐낸다. 그 뿌리가 자라 광중으로 뻗도록 하지 않기 위함이다. 너무 고되기 때문에 땀을 식히기 위해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삽 댈 부분에 술을 붓고, 지관의 지휘에 따라 삽질을 시작한다. ‘천광(穿壙) 낸다’고 한다. 지관은 패철을 살피며 폭과 길이와 깊이를 알려준다. 역시나 너무 고되기 때문에 이때 삽차가 동원되는 일도 있으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땅을 판다. 구덩이를 판 뒤에는 그 구덩이가 적당하게 깊은지 보며 한숨을 돌린다. 휴식하며 술 한 잔 걸친다.
술잔을 내려놓은 뒤엔 당신이 오기를 기다린다.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오기로 되어 있다. 당신은 세신(洗身)을 하고, 정갈하게 차려입고서 여기로 올 것이다. 후대의 손에 들린 채, 편안하게.
아직 세상은 어둡다. 당신은 당신의 초상과 함께 마침내 여기에 다다를 것이다. 당신은 노래를 들으며 올 것이고 노래를 들으며 떠날 것이다. 당신의 머리는 산봉우리를 향하고 당신의 발은 산기슭을 향한다. 지관은 당신이 좋은지 살필 것이다. 당신은 좋을 것이다.
당신은 흙을 덮을 것이다. 우리는 남은 술을 마저 걸칠 것이다.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볼 만큼 취하고 오늘을 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산에서 하는 일[山役]이다.

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길 주인

박스 안에 앉아 있다. 길을 지나는 차량으로부터 도로 요금을 징수하기 위해서다. 말해두지만 나는 요금 징수원이 아니다. 나는 이 길의 주인이다. 이 길은 먼 조상 때부터 집안의 길이었다. 이 길은 할아버지의 길이었다가, 아버지의 길이었다가, 지금은 내 길이다. 먼 조상 중 하나는 둘도 없는 로맨티스트로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다른 조상에게 청혼할 때 자신과 결혼해준다면 그를 위한 길을 사주고 그 길에 그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때 지어진 길의 이름은 더 이상 전하지 않지만 길은 유산으로서 전한다.
명절이지만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박스 안에 앉아 있다. 명절은 나에게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니까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만날 가족도 없다. 더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형제도 없다. 아버지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친인척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려 부모 외에 내 핏줄이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집이 없다. 원래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도 귀찮고, 귀찮게 돌아가도 반겨줄 이도 없어서 그냥 팔아버렸다. 나는 이 박스 안에서 생활한다. 박스 안에서 자다가, 밥을 먹다가, TV를 보며 웃다가, 차를 보며 요금을 징수한다. 이 길을 물려줄 자식이 나에게 없으므로 나는 이 길과 함께 죽을 작정이다. 아니면 영원히 살거나.
이 길 안쪽에 땅이 있긴 하지만 밟아본 적 없다. 저 땅은 주인 없는 맹지(盲地)다. 그 땅을 둘러싼 모든 길은 나의 길인데, 대대로 우리 집안에서 도로 이용 허가증을 내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출입할 수 없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그 땅으로는 풀과 벌레가 무성하게 번식한다. 푸서리를 지나 정중에는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있다. 조사원들조차 그 땅을 밟지 못해 그 나무의 나이도 모른다.

2017년 8월 31일 목요일

포크 가수

당신의 손에 들린 도구에 대해 들려주세요.
당신의 육체 피로에 대해 들려주세요.
그러면 나는 내가 아닌 당신의 이야기를 소리 나게 만들 겁니다.
당신이 휴일마다 되풀이해 보면서도 매번 처음인 양 좋아하는
자연 풍경들도 잔마디와 잔마디 사이로 스밀 겁니다. 그러나
그 풍경들이 인간을 대신하지는 않도록 할 거예요. 조물주의
자연은 노동을 하지 않으니까요. 세계는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새의 근육에 대해서만 노래하진 않을 겁니다.
나는 당신의 날개가 쉴 그늘에 대해서도
그늘 속에서 울려 퍼질 지저귐에 대해서도 노래할 겁니다.
서로의 깃에 부리를 파묻는 순간에 대해서도
그리고 당신에게 깃털 하나만 남기고 떠날 이에 대해서도
당신의 보금자리에 대해서도 노래할 겁니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종류의 새가 아니라면
낙엽이 되는 당신에 대해서도 노래할 겁니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은 어떤 것도 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모든 것이니까요.
그러나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까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서 노래할 겁니다.
당연히도 조상에 대해 노래할 겁니다.
조상의 사랑에 대해
조상의 시장에 대해
조상의 산과 조상의 숲과 조상의 바다와 조상의 노동에 대해
조상의 증기 기관에 대해 노래하고
조상이 만든 노래를 노래할 겁니다.
가능해지지 못한 조상의 미래에 대해 노래하다 보면
인간사가 짧기도 하겠지요.
나는 H빔 위의 당신에 대해서도
용광로 앞의 당신에 대해서도
전화기 앞의 당신에 대해서도
방 안에 있는 당신에 대해서도
거의 당신 같은 당신의 사물들에 대해서조차 노래하겠지만
그러나 그런 생각은 관두세요.
나는 전쟁에 대해서는 노래 않을 겁니다.
군악은 장르를 넘어선 문제입니다.
나는 앰프와 토마토의 시대 이후로 점점 늙고 약해지겠지만
아마 죽지는 않을 겁니다.
노동이 사랑이 있는 곳에는
저도 있어야 하니까요.
아마도 합창이라는 것으로서 말입니다.

2017년 7월 21일 금요일

교정자

모든 것이 너무 많다.
모든 것은 너무 많고 모든 것은 불완전하며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다.
불완전한 것들을 더 완전한 것들로 만들려는 노력은 시기와 불확실성이라는 제약하에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결국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제약이 고려되지 않는 가장 불필요한 것들뿐이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을 손보는 사람, 사람들의 필요와는 상관없이 스스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말 그러한지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착란에 빠져버리고 마는 사람. 보통 사람들이 별반 신경 쓰지 않는 정서법 하나하나에 연연하고 위법 사항을 보면 거슬리고 화가 나 견디기 어려운 사람. 언어 법은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며, 언어가 있다면 언어 법도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보다 차라리 법 기계에 가까운 자. 마감하기 위해 원고를 쓰는 자들의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 쓰는 자의 마감을 기다리는 자. 즉 그러한 잡다하게 필요한 불필요의 장인.
그것이 나라는 사람이다.
나는 산업의 그늘 속에서 존재하고 한 번도 그 그늘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나의 노동은 흔히 무시된다. 사장에게, 소비자에게, 업계 관계자에게, 학자와 교수에게, 또한 수많은 편집자에게. 나는 편집자로 불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가장 은밀한 단계의 감독자라는 욕망조차 없으며 나는 나의 노동이 포괄적으로 분류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낀다.
나는 온갖 텍스트라는 숱한 소세계들을 교정하고 있으나 사실 세계라는 건 딱히 교정될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회의 또한 품고 있다. 하지만 내가 회의한다고 해서 교정되어야 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교정되어야 할 것이 내 손에 들어오면 나는 그것을 즉시 교정하거나 혹은 이런 식으로 교정될 만한 것이라는 제안을 전달한다. 세계가 딱히 교정될 필요가 있든 없든 내가 교정한 것이 반영되든 안 되든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다만 교정할 것이 눈에 들어오면 교정할 뿐이다. 곧 이러한 나의 노동은 넓게 보자면 산업적인 맥락뿐만 아니라 법과 시선 사이에서 발생한 신경질이 낳은 전기 신호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업무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교정되든 교정되지 않든 사람들은 대개 그 차이와 변화를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이것이 인간이기에 극도로 낮은 빈도로 저지르는 내 실수가 자학에 그치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교정이라는 것은 가시적 효과보다는 비가시적 증강과 관계된 기술이다. 내가 당신의 척추를 접는다면 그것은 교정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이며 혁명이다. 하지만 내가 당신이 자세를 바꾸도록 만들어 점차적으로 척추 원반 탈출증, 다시 말해 디스크를 앓게 만든다면 그것은 교정이다.
나는 교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교정하고 싶기에 당신 또한 교정하고 싶다. 가령 이런 식의 교정 말이다. 내가 교정한 책을 구입하시라.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당신의 서가에 꽂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보기에 좋을 것이다. 어차피 오랜 출판 산업의 역사 속에서 책을 읽기 위해 책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는 근래에 책이 아닌 다른 읽을거리를 찾는 풍조로 인해 나타난 급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19세기 말에 출간된 어느 소설책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어차피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내 책 또한 벽을 장식하는 데나 사용될 뿐이다.” 세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봐야 뭣하겠는가? 출판 산업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탄식만 숱하게 접할 것이다. 그것은 구텐베르크 이후부터 심화되어온 문제이다. 물론 최근에는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말 대신에 이미 죽었다는 말을 더 많이 쓰기는 한다. 나는 시체가 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 중에서도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시체로서 나는 할 말을 하노니, 당신이 책을 구입하기를 바란다. 이는 나의 사후를 연장시키는 길이니 개인적인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주변을 여러 소세계들로 가득 채우는 일이며, 결국 세계를 좀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시원찮은 벌이를 하면서도 온갖 글들을 교정하는 이유이다. 하찮아 보이는 나의 교정이 세계의 교정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나는 버리지 않고 있다. 어리석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나는 진즉에 자살했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더는 혁명을 통해 변화할 수 없다. 오직 교정될 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나의 철학이며 내 노동의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부한다. 정기적으로 책을 구입하기를 바란다. 책이 쓸데없는 것이라면 그 쓸데없는 것들을 당신의 주변에 두길 바란다. 온갖 불완전하고 쓸데없는 것들로 인해 당신의 영혼은 끝내 구원받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나를 믿어도 좋다. 일단 책을 구입한다면 그다음 교정 단계를 내가 알려주겠다…….

2017년 2월 11일 토요일

가마꾼

어디로 가는 중입니다. 어디로 가는 중이냐굽쇼?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가마에 탄 자가 가야 하는 데로 저는 갑니다. 가마에 누가 탔냐구요?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가마에 누가 탔는지 보이지 않으니까요.
저는 앞에서 가마를 메고 있습니다. 제가 뒤를 돌아볼 수나 있겠습니까? 제게 감히 그럴 기회가 주어질까요? 모가지가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 아니겠습니까? 주춤거리다 넘어지면 또 어찌 되겠습니까? 저의 처지를 생각해주십시오. 설령 천운으로 뒤를 돌아본다 한들 가마 구경이나 할 모양이지, 열리지도 않을 들창 안쪽에 누가 있는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가마를 몇 명이나 수행하고 있는지나 알까 말까 할 노릇입니다. 가마에 누가 타고 있는지 가장 궁금한 사람은 제가 아닐까요? 그러나 제가 직접 들창을 열어볼 수도 없습니다. 제 두 손은 가마채를 붙들고 있습니다. 제 머리통은 언젠가 제 몸뚱이를 떠나더라도 제 손은 가마채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어디로 가는 중입니다. 가마에 탄 자가 가야 하는 데로 저는 갑니다. 가마에 타고 있는 게 사람이기는 한 것일까요? 혹시 제가 메고 있는 것은 그저 작은 교여(轎輿)에 불과하고, 창을 열어 보면 그저 달달한 냄새 풍기는 술 단지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면 가마꾼들 모두 가마 내려놓고 노송 빽빽한 숲 어느 곳에서 자처해 길 잃으며 취하고 마는 것 아닐까요? 그러다 우리 모두의 머리통이 한데 모여 사이좋게 되는 것 아닐까요? 또는 귀신이 타고 있으면 어쩔까요? 하필 죽은 게 지체 높은 어른이고, 죽어 열명길 건너갈 때도 지체에 따라 가마를 타야 하는 바 제가 사역을 나와 있는 것이라면 저는 지금 제 발로 이승을 뜨고 있는 중이 아닐까요?
가마에 누가 탄 줄도 모르면서 가마에 탄 자가 가야 하는 데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까? 저는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제가 발 디디는 곳마다 구종(驅從)들의 벽제(辟除) 소리에 모두 피하여 길이 쫙 열리는데 저는 그 열린 길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벽제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으면 그곳이 당도할 곳 아니겠습니까? 저는 당도할 곳에 당도할 예정이고 걱정인 것은 딴 게 아니라 버선 속에서도 어찌할 수 없이 문드러져가는 제 발가락들뿐입니다. 아 불쌍한 발가락들이여.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고통은 모른다고들 하지 않던가요? 그러나 기실 이런 노래야말로 가마 메는 고통을 모르는 이들이 노래한 것이니, 이들이 대저 무엇을 알겠습니까? 고통에 메인 이들은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가마 메는 즐거움을 노래한 적 없는 이들만이 가마 타는 즐거움을 알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가마를 멘 저는 아니, 가마에 메인 저는 이만 갑니다. 저는 갑니다.

2017년 2월 10일 금요일

직업 전선에 대해

(웹용 서문)

안녕하세요. 이 글은 <직업 전선>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직업 전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막론하고 노동 현장에서 꿈꾸듯이 일하고 있는 모든 이상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달 1~2회 연재됩니다. 간혹 파업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애매하지만 일단은 직업 전선에 있는 사람이니까 간혹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으니 양해해주세요.

아직 직업을 결정하지 못하셨습니까? 그들의 체험 수기를 읽고 당신의 직업 결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면용 서문)

『직업 전선』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노동 현장에서 꿈꾸듯이 일하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이 쓴 수기 모음집입니다.

시인의 성정을 타고났으되 시인이 되지 못한/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환경 때문에, 진로 결정을 하다 보니,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물론 시인들도 공부는 안 합니다만), 시인이 하찮아 보여서, 등단을 시켜주지 않아서(개 같은 등단 제도), 그냥 사는 대로 살다 보니까 등등 사유는 다양합니다.

시인의 성정을 타고났으되 시인이 되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안타깝게도 사실로 말하자면 대부분의 시인 또한 시인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란 그렇게나 차가운 것입니다).
『직업 전선』에는 그런 이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엔 그들의 전문 지식과 애로사항과 희로애락과 꿈과 상징과 물거품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아직 직업을 결정하지 못하셨습니까? 그들의 체험 수기를 읽고 당신의 직업 결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