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6일 화요일

포도 기사 ➌


폭죽처럼 솟은 고더린의 손목이 붉은 원호를 그리며 멋지게 돌았다. 기사들이 함성을 내뱉었다. 이내 그것은 바닥에 툭하고 떨어져 꿈틀거렸다. 대장이 짓이겼다. 발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기사들의 눈알이 고더린에게 모였다. 손을 잃었으니 끝난 싸움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고더린은 거뜬히 서 있었다. 기사들은 무슨 말을, 저 비열한 자식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내뱉을지 눈여겨보고 있었고 기대도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는 킥킥 웃으면서 왼팔 견갑을 벗어던졌다. “뭐 하나 내놓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왼손 정도면 꽤 값싸네요.” 기사 몇 명이 침을 삼켰다. 과연 우리가 아는 대로의 고더린이구나. 저 나쁜 자식. 이상하게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더린도 마찬가지였다.

한 손 검술도 좋지. 이 나름의 장점이 있으니까. 그는 검을 한 손으로 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옆으로 몸을 틀어 검과 자신을 일직선으로 만드는 형태였다. 팔이 처졌다. 한 손으로 든 장검은 무거웠다. 목숨이 걸린 것이니 당연한 건가? 그는 아린 통증을 외면하며 이렇게 말했다. “검을 처음 쥔 게 여섯 살 때라고 하셨던가요?” 노기 어린 눈이 고더린을 쳐다봤다. 순간 무섭게 빛이 어른거렸다. 대장이 얼굴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가까스로 쳐낸 고더린이 반격하려는 순간, 가슴 밑으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급급하게 검격을 쳐내고, 손목을 틀면서 내려 베었는데 힘이 실리지 않아 속도가 느렸다. 비웃음 같은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대장의 공격은 간격이 짧으면서도 묵직했다. 어떤 점, 혹은 선, 또는 면을 보고 있다는 듯 대장은 도망치기 어려운 궤적으로 찌르고 휘둘렀다. 고더린은 악 소리를 질렀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는 중이었다.

“여섯 살 때 난 아버지 밭에서 포도를 따 먹고 있었어요.” 뒤로 굴러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고더린은 턱과 귀, 코끝이 보기 흉하게 잘려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죽일 생각이 아니로군.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하던 고더린이 갑옷을 벗었다. 처참하게 죽이려는 거야. 추한 모습으로. 기사들이 목을 길게 뺐다. 갑옷을 벗다니 무슨 생각이지? 자살? 투구만 남기고 다 벗은 고더린은 제자리에서 통통 두어 번 뛰고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다. “좋은 놈들만 골라서 따 먹었죠.”

“그때부터 야비했구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대장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대장 주도의 공세가 이어졌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고더린은 맞받아치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장이 여섯 번을 휘두르는 동안 고더린은 한 번도 먼저 휘두르지 못했다. 그 사이 대장은 강경한 진압자처럼 점점 더 고더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평민이 기사들 박력에 맞설 수는 없는 법이라고 고더린은 생각했다.

“야비했다니, 틀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족을 이겨 참수된 평민에 대한 노래를 알았다. “사실 맞출 거란 기대도 안 했어요. 무식하단 건 미리 알았으니까.” 그는 그 노래를 좋아했다. 돈을 내고 청해 듣기도 했다. 뒷맛이 안 좋은 얘기이지만, 좀처럼 찾기 힘든 통쾌함이 있었다. “아버지가 시킨 거였어요. 어떤 게 좋은 녀석인지 알려주려고 그랬던 거였죠.” 어쩔 수 없군. 고더린이 손가락 하나를 내주며 물러났다. 그는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린 항상 제일 좋은 것만 먹었어요. 그런 게 가족이고, 그런 게 사랑이겠죠.” 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 방정맞은 입 좀 닥칠 수 없느냐고 그가 물었다. 고더린은 대장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나와 내 가족은 황제보다 좋은 포도를 먹었다 이겁니다. 아셨어요?” 대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더린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고더린의 경우에는 쓰고 있는 투구 때문에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여튼 한계였다.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여간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지겠지. 죽을 수밖에 없을 테지. 죽음을 감지한 뇌가 넘쳐흐르도록 생각을 짜냈다. 돈으로 기사 작위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얘기에 홀렸고. 말도 안 되게 비싼 값이었음에도 기회라고 여겼다. 뼈저리게 후회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지. 그게 기회가 아니었다는 걸. 그건 단지 기사라는 계급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지. 그들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신화가 큰 바람을 맞은 구름처럼 흩어졌다는 것을 의미했어. 작위를 사는 데 필요한 액수가 점점 더 낮아졌고 이제는 돈을 주며 애원해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나는 제일 비쌀 때 샀고... 나를 기사로 임명한 왕국은 사라졌구나. 그때 하던 전쟁을 아직도 하고 있구나. 나는 그저 부유한 자가 되고 싶었어. 커다란 밭 수십 개를 가지고서 내 이름으로 된 포도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홧병을 앓던 부모는 전쟁통에 죽었고 기사란 모름지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의 이야기는 평민에 대한 높으신 분들의 통념을 강화할 뿐이겠군. 쓰레기 노래에 나올 법한 지극히 어리석은 평민의 이야기잖아.

“그러니까 내가 황제보다도 대단한 거죠.”

대장의 귀가 쫑긋했다. 씩씩거리며 코를 벌름거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분을 삭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반응을 고더린은 놓치지 않았다. 다음의 말, 가장 좋은 말을 찾아내야 했다. “이해 못했어요?” 그 말로 생각할 몇 초를 벌었다. 머릿속에서 피가 격렬하게 돌았다. “검을 버리고 이 대단한 강도 밑으로 기어라, 이 말입니다.” 막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진 듯 대장이 고함치며 달려들었다. 무섭게 전진하며 든 상태 그대로 검을 휘두르는 그는 쇠로 된 풍차 같았다. 고더린의 장검이 대장 것을 맞고 튕겨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우와, 지는 건가. 고더린은 납득한다는 식으로 품을 내주며 대장의 장검을 내려다봤다. 쇄골과 가슴이 무참히 갈려나갔다. 뿜어지는 피가 보기 좋았다.

‘졌다.’

그 순간을 비집어 고더린은 대장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대장이 내미는 검을 제 가슴 깊이 움푹 박아 넣었다. 검의 뿌리가 몸에 닿는 것을 느꼈다. 아팠다. 그러나 별로 아프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깨에 턱을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바싹 붙어 있었다. 혀로 과일을 굴리듯 고더린이 달콤하게 말했다.

“투구를 안 쓰고 계시네요.”

고더린이 대장의 귀에 괴성을 질렀다. 크고 또 악에 받친 괴성을. 대장이 비명을 내질렀다. 검을 놓은 그가 허겁지겁 귀를 막자, 고더린은 한껏 물려둔 단단한 투구를 대장의 턱에 내질렀다. 내던져진 그 벼락이 대장의 턱뼈를 박살내고 박살냈다. 박살나고 박살난 많은 것들이 대장의 입 안팎으로 무자비하게 뛰쳐나갔다. 이제 두 번 다시 무언가를 씹고 다질 일은 없다는 듯. 고꾸라지며 대장은 공주에게 씌워주었던 자신의 투구를 떠올렸고, 머리에 쓰고 있을 것을 괜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진 것이 아니라 당한 것뿐이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을 때에는 이미 쓰러져 정신을 잃은 뒤였으므로, 그 모든 것들은 했다고 생각됐을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고더린은 피범벅이 된 투구를 벗어던졌다. 깨진 머리통의 머리채를 움켜쥐고서 고더린은 잘린 손목을 불로 하듯 흰자뿐인 대장의 눈알에 지졌다. 그것은 정말이지 오줌이 새어나올 정도로 통쾌한 일이었다. 그는 온갖 천박한 욕설을 대장에게 내뱉었다. 그는 삶의 한 부분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았다. 다시 평민이 되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자신만의 이야기를 얻었음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해방했음을 알았다. 자신을 옭아매던 직업윤리가 보기 좋게 부서졌음을 알았다. 민중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벌떡 일어난 고더린은 자신을 둘러서 있는 기사들을 매서운 기세로 돌아봤다. 다들 입을 벌리고 얼치기처럼 서 있었다. 나서야 하는지 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장검을 주우러 그들 발께에 다가가자 놀란 그들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고더린이 말했다. “저 새끼도 나를 죽일 생각이었을 거야.” 힘이 다 빠져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주워 든 그에게, 대장은 뭉개진 포도알처럼 보였다. 마저 뭉개기 위해 악귀처럼 걷던 그에게 누가 외쳤다.

“받아!”

발치로 반들거리는 동그란 약병이 굴러왔다. 높은 수준의 장검보다 비싼, 사람들의 희생이 모이고 모여야 만들어지는 고급 물건. 멈칫한 고더린은 멍한 얼굴로 묵묵히 보다가, 문득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강도가 될 건 아니지?” 무스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고더린은 싱글벙글 웃었다. 저 앙큼한 자식. 귀여운 공범. “몰라, 이 개자식아.” 고더린은 빈 약병을 발로 터뜨린 다음 대장을 내버려두고 말에 올랐다. 죽지도 지지도 않았지만 또 한 번 누군가와 싸운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몸으로. 하지만 그조차 확신해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뭐가 다른지.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아니면 마술인지. 어째서 자신에게 그같이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 것인지. 누군가는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고더린은 마지막으로 한 번 기사들을 눈으로 훑었다. 맹렬한 적의와 맹렬한 존경이 섞인, 선망과 원망이 반쯤 섞인 눈빛이 투구 속에서 빛나고들 있었다. 그래, 너희가 알 턱이 없지. 고더린은 전우였던 개새끼들의 이름을 하나씩 전부 불렀다. 그리고 결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승자는 폭군처럼 강해지도록 하소서!”


*


멀어져 가는 강도를 기사들은 바라보았다. 따라가고 싶다는 욕망에 몇 명의 기사가 제풀에 놀라 두리번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망해도 왕은 하나 있어야지.” 그러나 무스트는 말했다. “찾아내자. 왕에 어울리는 사람을.” 기사들이 하나둘 말에 올랐다. 아직 죽지 않은 대장이 쓰러진 자리 그대로 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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