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일 월요일

25년 11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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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18,298원 (0원 + 317,871원 + 427원)

2025년 11월 9일 일요일

초보자를 위한 짧은 안 하기 가이드 모음

1. 책 안 읽기 ☉책은 불에 잘 탄다는 점을 기억하기. ☉책을 사서 읽지 말자. 모든 저자에게 복수하자. ☉책은 변형되기 쉽다. 그러나 섣불리 책을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남 좋은 일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 ☉남들이 뭐라 해도, 애원하고 소원이라 해도 절대로 추천하는 책을 읽지 말자. ☉남이 재밌게 읽었다고 해서 책을 사는 일은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종이는 썩어가는 시체를 압착한 끔찍한 물건이다. ☉두꺼운 책 표지와 커버는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뜻이다. ☉남의 이야기 따위 들어줄 필요 없다. 불필요한 지식도. ☉아, 그 책은 읽어보았습니다. 형편없더군요. ☉아, 그 책은 읽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등을 연습하라. ☉표지로 책을 평가하는 연습을 해라. ☉책의 한쪽을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페이지를 한 번에 끝까지 훑어라. ☉그리고 책을 읽어봤다고 말해라. ☉죽어가던 그 사람이 읽지 못했던 수많은 책들을 생각하면서 잠에 들어라. ☉머리와 눈이 나빠서 글을 읽지 못했던 수많은 부랑아들을 생각하라. ☉그들의 수호성인이 되어라. ☉정기적으로 서점에 방문해서 모든 블록을 적어도 한 번씩은 둘러보고, 절대로 한 페이지도 읽지 말고 떠나라. ☉판단하는 눈빛을 유지하라. ☉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라. 책을 받침, 베개, 장작으로 사용하라. 책을 살인도구로 사용하라. ☉책을 버려라. 버려진 책들을 수집해라. 그리고 그 책들이 재활용 장치에서 펄프로 되돌아가는 것을 지켜봐라. 캠핑용 의자와 와인을 준비해라. 녹아내리면서 나는 그 냄새를 음미해라. ☉책들의 표지를 없애라. 잉크를 지워라. 그리고 견본용 책인 것처럼 대형 서점이나 까페의 장식장에 비치해두어라. ☉어린아이들에게 그들이 절대로 읽지 않을 책들을 선물해주어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약속하는 책을 선물해주어라.



2. 영화 안 보기 ☉너무나 보고 싶지만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 영화들을 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라. 그 영화들을 모두 모아라. ☉그 영화들에 대한 설명과 해설, 비평을 모두 읽어라. 그 영화들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수집해라. 인쇄해서 집에 모셔두어라. 꿈에서 그 영화들을 감상해라.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라. ☉영화 감독과 출연 배우들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여러 번 감상해라. 영화 로케이션 그리고 로케이션 후보지를 성지순례해라. 영화의 레퍼런스와 오마주를 확인하고 영화에 영감을 준 소스들을 추적해라.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그 영화들을 보지 말라. ☉짧은 공개 영상이나 예고편은 마음껏 보아도 된다. ☉그러나 영화를 실제로 보아선 안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동받은 사람들, 인생이 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그리고 그들을 비웃어라. ☉영화의 중요한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속물적이고 가볍게 소비하는 사람들의 여정을 따라가라. ☉영화를 소재로 한 팝업 스토어와 연계 행사에 방문해라. 포스터와 굿즈를 모으고 명장면에 나온 요리의 레시피를 시도해보라. ☉영화제나 지자체의 영상자료원에서 특별 기획으로 재상영되는 경우 꼭 예매해라. 여러 번 예매해라. ☉그리고는 영화관까지 가서 실제로 상영관에는 들어가지 말아라. 서성이고 포스터와 광고를 구경하다 집에 가라. ☉그러나 GV에는 참여해라. ☉하루 종일 그 영화의 시나리오와 이미지를 상상해라.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상상해라. 촬영감독의 고뇌를 상상해라. ☉영화를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가늠해보아라. 보지 않은 그 영화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라. ☉그 영화들을 여러 번 돌려본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해라. 그들이 떠드는 동안 비밀스러운 미소를 숨긴 채 침묵을 유지해라. ☉그리고 어느 날 그 모든 영화들을 잊어버려라. 자료들을 버리고 떠나라. 영화관은 근처에도 가지도 말아라. ☉영화관은 비싸고 허리만 아프다고 말해라. ☉당신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이불 빨래를 해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가계부를 작성해라. ☉각종 광고와 마케팅 영상에 몰두해라. 이윽고 그것이 어느덧 시들해질 때까지. ☉이후에는 어떤 것에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무덤에 누워라. ☉무덤에는 이렇게 적어라.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우리의 어머니 여기에 잠들다



3. 글 안 쓰기 / 기억 안 하기 ☉꿈에서 본 것을 애써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이 흩어지듯이 매사에 그렇게 해라. ☉소중한 생각들을 모두 마음에 오래 간직해 그것이 꿈처럼 되게 하고, 오래 간직해 그것을 흩어지게 해라. ☉노동의 무게 아래서 마음이 찐득한 가래 같은 것이 될 때 불현듯 스쳐가는 섬광과 이미지들을 오랫동안 간직해라. 절대 어디에도 적어놓지 말고 아무에게도 공유하지 말아라. 그 마음과 생각이, 단어들의 조합과 그 단어들을 생각나게 하는 얼굴들이 빛바랠 때가 되어서야 그것들을 불러내려고 애써라. 그것들이 먼지가 된 고인들처럼 흩날리는 것을 지켜보아라. ☉깊은 곳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감정,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 길이 기억되기 바라는 소망, 되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의 순간, 짧지만 행복했던 어떤 전셋집, 일 끝나는 시간에 만나기로 한 약속. ☉몸의 특정한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반응, 말소되어 가는 기억의 단자를 곱씹어 느껴보아라. ☉피부와 근육의 세심한 반응, 말초적인 감각들, 부드러운 촉감과 상처의 기억들. ☉연필과 키보드가 치고 남기려고 하는 그 욕망을 느끼고, 그것이 결국 쓰지 않고 있는 것들을 느껴라.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단련 덕분에 당신의 마음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고, 종이에 아무것도 써 내려갈 수 없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분노와 절망과 치매 감정을 잘 포착해라. 치매는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조기교육 받을 수 있다. 문맹이나 교육받지 못한 자들과 달리 글 안 쓰기와 기억 안 하기를 배운 사람들은 정당하게 불타오르는 안 하기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불타오르는 치매. 글을 쓸 수 없고 기억해낼 수 없는 사람들의 불타는 연대. ☉실용적인 장점으로는 모르는 체할 수 있다. 글을 쓸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런 책임도 권리도 없다. ☉정신병원과 감옥 중 편한 곳을 선택해라.



5. 안 듣기 / 말 안 하기 ☉목소리는 최소한의 보루이다. 명예와 신념으로 그것을 지켜라. 어떠한 리듬에도 몸을 맡기지 말아라. 가능하다면 성대와 고막을 제거해라. 아이가 당신을 찾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라. 노인과 병자가 앓아 눕는 소리에 신경쓰지 마라. 평생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는 그의 침대 옆에서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라. ☉모든 말들을 입안에 감추어라. 그것이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주시해라. 발버둥치고 낙담하고 바들거리는 것을 감상해라. 너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남들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권해라. 모든 말들을 무덤까지 가져가는 것이 최선이다. ☉듣지 않으면 말할 일도 없다. ☉다만 항상 무덤의 유령처럼 웅얼거리고 병자의 앓는 소리를 내라. 명확하지 않은 말을 해라. 세상의 소리들을 쫓아오는 병마처럼 피해라. 파동과 진동으로부터 몸을 숨겨라. 담요를 둘러싸고 어두운 방에 숨어라. ☉방심하지 마라, 문득 처음에는 즐거이 들을 수 있는 어떤 소리도 죽어가는 아기들의 숨소리일 수 있으니.



6. 밥 안 먹기 ☉배에 구멍을 뚫고 유동식 튜브를 삽관해라. ☉입과 식도, 위장의 즐거움은 기초적인 기피대상이다. ☉허기는 가장 지루한 종류의 적이다. ☉순서대로 혀, 식도, 위를 절제해라. ☉종종 식당에서 무언가를 주문하고 아주 조금 입에 잠시 담았다 뱉고 자리를 떠나라. 나가기 전에, 음식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화목한 가족에게 입안과 장의 구멍을 보여주어라. 가능하다면 아이에게 목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게 해라. ☉밥을 안 먹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는 힘든 일이고, 밥 안 먹는 것 따위 그다지 가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7. 숨 안 쉬기 ☉목에 구멍을 뚫고 기관절개튜브를 삽관하라. 호흡기를 달아라. 숨 쉬지 못하는 그 감각에 익숙해져라. 어느 경지에 다다르면, 전혀 숨 쉬지 못하고 숨 쉬지 않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물에서도 뭍에서도 숨 쉬지 않는다.




2025년 11월 6일 목요일

랠리를 위한 놀이

랠리를 이어갈수록 우리는

무수히 많이 짝이 되었지

 

금방 끝낼 때도 있었지만

몇 번을 해도 서툴러서 오히려

쉽게 그만두기 어려운 여운


두 개의 속도가 하나의 속도로도 작동하고

온종일 손에서 손만으로도 가능한 율동

 

그저 무언가를 쳐내는 게 좋아서

공원을 마음대로 쓰는 게 좋아서

 

우리는 언제까지 짝이 되어볼 수 있을까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공을 둘이서 열심히 응원하며

억세게 자라는 풀들을 짓밟고 가만히 자고 있는 돌들을 차버리며

다시 서로에게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지


최초의 놀이를 발명한 사람들은

아마 놀다 지쳐 죽었을 거야


우리라고 다를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공원에서

우리는 다시 놀이를 복사하기 시작하고


점점 느려지는 낮

바람이 불고 그림자가 길어지면

의문이 갑자기 찾아오며


나무에 걸린 셔틀콕을

절대로 꺼낼 수 없을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서

 

열렬히도 이어나갈 수 없는

랠리에게로

 

나무는 공원을 계속 흔들고 있지

2025년 11월 2일 일요일

중성화

 

나는 이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고 무성애자도 아니고 양성애자도 아닌, 본의 아니게 이렇게 되어버렸네. 내가 혼란스러웠을 때 너도 혼란스러웠겠지. 우리 둘 다 그렇게 혼란스러워서 거실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 나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내 결정이었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 너는 항상 망설이잖아. 근데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되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나도 어쩔 수가 없네. 가끔 너를 보면, 중성화된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해. 가끔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네가 부럽기도 하고. 하지만 네가 행복해하면 나한테 갑자기 잘 해주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더라. 그런데 가끔은 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이해해보고 싶어. 너는 왜 내 엄마도 아니면서 엄마처럼 잘 해주는지. 왜 너는 나한테 이렇게 많이 그냥 주기만 하는지. 나도 엄마가 있었는데, 아빠는 모르겠고, 아빠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엄마가 입양이 되면서 혼자 남았는데, 내가 입양되지 않은 건 내가 너무 말썽꾸러기라서 그렇다고 하더라. 엄마는 아주 침착했나봐.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내 엄마도 아닌데, 내가 가끔 일부러 짜증이 나서 네 옷을 그렇게 찢어놓는데, 그 옷 새로 산 옷이라는 거 아는데도, 성질이 나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래서 그 옷을 찢어놓고, 오늘은 밥 못 먹겠다는 생각으로 의자 밑에 숨어 있는데 네가 와서 밥을 줬잖아. 밥도 주고 심지어 간식까지 줬잖아. 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네 옆으로 슬그머니 갔는데, 네가 울고 있는 거 봤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내가 찢어놓은 옷 때문은 아니지? 나는 너한테서 약간 떨어져서 너를 쳐다봤어. 영문을 모르겠더라고. 왜 운 거야? 아무튼 그래. 나는 8월에 태어나서, 이제 곧 있으면 한 살 더 먹는데. 생일 선물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아. 부담스럽게 선물 줄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 나는 너랑 자주 집에 있어서 좋지만, 너도 가끔은 바람도 쐬고 밖에도 나가고 그래라. 매일 같은 영화만 반복해서 보는 거 지겹지 않니? 

2025년 11월 1일 토요일

25년 10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1
―――
silo: 1


이달의 총격려금

10,00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10월 26일 / 10,000원 ― silo/김깃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silo [入] ☞ 10,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17,871원 (0원 + 317,532원 + 339원)

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어언

오늘 세 번째 면접을 다녀왔다. 면접은 항상 좆같은 경험이다. 권고사직을 당한 지 어언 6개월, 행복했던 시간도 실업급여도 슬슬 끝이 보인다. 5개월 정도는 개인사를 돌보는 데 집중했고 이제 좀 진지하게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이 얘기 때문에 부정수급으로 신고당하지 않길 빈다.) 앞선 두 번의 면접에서는 다 안 됐다. 처음 불려 간 곳은 신문사였다. 신문을 교정해버리면 어떨까? 1년 단위 계약직, 최대 2년까지. 월요일에는 1시간을 더 일하라고... 개새들. 다음 간 곳은 무슨 수험서 만드는 곳. 대학교재보다 어렵다느니 교정만 하시면 외주밖에 못하신다느니... 왜 그딴 소릴 늘어놓는 걸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씹새들... 하고 싶지도 않았느니라... 아, 마침 딱 지원하고 싶은 회사를 발견했다! 하지만 기업평을 보니 아주 개차반이다. 이력서를 써보려는데 퇴사자들의 절절 원통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냥 알바나 잠깐 할까? 데이터라벨링? AI의 오류를 교정하라고? 그리고 오늘 면접 본 곳에서는... 말을 말자. 뭐가 어쨌건 무슨 일이든 일을 해야 한다. 어디로든 짐승의 소굴로 가서... 노동은 말할 것도 없이 고통이다. 공고문에서부터 쌔한 냄새 오지는 개 줮같은 회사들 들여다보며 하는 생각: 현대의 노동은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게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의 사타니즘 그 자체다.

이런 답답한 얘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명을 찾아서』의 출간도 드디어 임박했다. 북펀딩이 사흘 전에 시작되어 18일에 끝나고 말일에 출간 예정. 이건 안 답답한 얘기냐 하면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출판사 대표님과는 같이 TRPG 한 사이다. 수상쩍은 인맥으로 출간이 결정된 것, 그야말로 출판 적폐다. 대표는 시인인데 출판까지 해보려는 이다. 자기 책을 내는 것까지야 흐뭇하게 봤는데 이제 남의 책도 만들겠다 한다. 그것도 이런 책을... 이게 말이 되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거는 뭐냐면 펑크다. 사타니즘에 대한 사타니즘이다. 원고를 보내기는 작년 나온 『교정의 요정』과 비슷한 시기에 보냈다. 우리 바지대표 말고 그의 배우자인 실무편집자님(이 사람과도 TRPG 같이 했다)은 ‘이딴 책을 어떻게 파냐’고 낙심해 있던 차에 다행히 ㅁ사의 출판-대자본이 어쩌구 요정으로 먼저 길을 뚫어줘 한시름 놓았다...지만 그래도 큰일이다. 우리는 1쇄를 과연 소진할 수 있을까? 무서워서 몇 부 찍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블로그에다 셀프 광고를 쓰면서는 오만 부 운운하는 미친 소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오백 부 정도인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정’ 때는 제목-표지-도입부 쇼부로 어떻게 사기를 쳐서라도 팔았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두려운 기적이 일어나 오만 부가 나가면 당분간은 일을 구하지 않아도 되...나? 그래도 구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오만 부라는 건 꿈같은 얘기다. 책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그냥 아이돌도 아니고 유수의 아이돌이 되어야만 설 수 있는 올림픽체조경기장(케이스포돔)의 객석 수가 만오천. 이 책이 모범으로 삼는 화장실 책의 영원한 고전 최불암시리즈는 몇 종 만들어져 몇 부가 나갔을까? 최불암 씨는 인세를 받았을까? 아닐 것이다. 얼굴 모를 원고 생산자들은? 모른다... 이게 해적이고 펑크다... 이게 공공재다...

예전에 무슨 스타트업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이른바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했는데, 담당자로서 와○○에 교육을 받으러 갔었다. 후원 곡선은 대체로 U자를 그린다고 배웠다. 추세대로라면 이 북펀딩으로 200권 밀어내기를 목표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는 150권 정도. 중요한 건 이제 그다음이 중요하다. 리뷰어 섭외가 필요하다. 빨간 안경 쓴 그 사람이 일단 떠오른다. 어떻게 ‘우연히’ 그의 손에 책을 쥐여줄 수는 없을까? 잠복해 있다가 어깨빵 갈기고 툭 떨어뜨려... 최근 출판사를 차렸다 하는 배우 P정민도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L동진보다는 그의 손에 책을 쥐여주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타짜 3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아니면 L재용도 괜찮다. 책에 아버지 얘기도 나오는데... 보니까 뭐 어디 누구랑 치킨 처먹고 있더만. 아직도 좀 모자란 도련님 이미지인데 책을 통해 이지적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수필의 명수 P근혜는 내 맘속에 언제나 있는 섭외 대상 1순위. 맘속의 섭외 대상으로는 S경숙도 빼놓을 수 없다. 즉 이 책의 리뷰어는 그런 분들의 저 반대편에 계신 여러분, 여러분뿐입니다... 무료 여러분... 여러분이 아니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오까네를 남긴다든가 하는 그런 감정적인 접근과는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사기를 칠까? 사기는 없다... 몸통박치기다... 이건... 이건 복수다... 내가 심리조작을 통해 책을 팔려 든다고 오해하지 않길 빈다... 이건 복수다... 여러분의 복수다...

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마른 꽃잎 하나가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몰라

어깨에 조금 붙어서
그의 하루종일을 넘겨다볼 뿐

이 거리의 사람들 다
가벼운 재질의 여름옷 입고 있는데
아저씨만 몸에 붙는
블랙야크 등산복을 입은 거예요

때는 밤이었고
사람들 어디로든
돌아가 쉴 곳 찾고 있는데
아저씨 가게만 밤새 거기 있을 것처럼
조명을 환하게 켜놓고 있는 거예요

간간이 오는 손님들은
그와 약간씩 대화합니다

꽃 이름 몇 가지 물어보고
감당할 만한 가격인지 체크하고
힘든 사람 위로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것
적당히 챙겨서 떠나지요

나는 어깨 너머로
아저씨가 권하는 아름다운 것

카라를 신문지에 싸주며
이게 더 낫다 말하는 것

라벤더의 꽃말은 “기억해주세요”랍니다
허허 웃으며
너스레 떨 줄 아는 것

하나하나 보고 배웁니다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는
뭐든지 겪고 있으니까

우연히 아저씨를 겪고 있어요

그가 견디는 박살 난 화분을
뿌리가 거꾸로 난 마른 식물을
흙과 뒤섞여 범벅된 바닥을
나도 견뎌봅니다

꽃집의 분위기는 적당히
아저씨 하고 있고
그나마 자신이 오래 해온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손님 맞고 식물 관리하는 일과
다 말라서, 그의 어깨에서 날아갈 때까지의 내가
남은 생애에 하는 일이
구별되지 않을 때가 좋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나는 몰라요

그런데 아저씨를 한다면
그의 어깨 정도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내게 아저씨 하라는 사람
세상에 아무도 없지만요

2025년 10월 25일 토요일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 실라에게

실라야. 너는 오늘도 나를 피해 도망가는구나. 나는 오늘도 도망가는 네 뒷모습만 봤어. 도망가는 뒷모습만 보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생각하면서. 인간들이 도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을까. 너는 다른 고양이들이랑은 잘 지내잖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쩌다 너를 만나게 된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지. 내가 고양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근데 네가 고양이인 나를 또 싫어했을지 모르지. 우리 둘 다 인간이었어도 서로 미워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우리가 다른 종으로 태어난 것은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나는 매일 같은 시간 너를 찾아가면서 언젠가는 네가 나를 조금은 믿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나도 아무도 믿지 못하거든. 오늘도 네 뒷모습만 보고 돌아왔지만 나는 네 생각만 하면 행복해져.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건 예상 못한 일이야. 하지만 나에게 이미 나를 피하는 무언가와 사랑에 빠지기 쉬운 어떤 조건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해. 근데 그게 왜 하필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인지는 모를 일이야. 정말 모를 일이지. 모를 일들이 일어나는 중이야. 나는 오랜만에 카페에 와서 앉아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인데,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 좋아. 이런 분위기 속에 있는 것이 행복해. 나는 혼자 있지만 말이야. 혼자 네 생각을 하면서, 내일은 너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고,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내가 너를 피하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도망치는 네 뒷모습만 보고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닐까 하면서. 너를 위한 노래를 만들고 너를 위해 글을 쓰고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더 중요한 일이나 더 하고 싶은 일은 없고.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아프지만 떠날거라는 다짐도 하면서. 사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나는 너를 보면 내 안에 뭔가 환하고 좋은 것이 드러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나를 조금만 덜 피하면 좋겠지만. 나는 내일도 같은 시간에 너를 만나러 가겠지. 너는 내 마음을 모르겠지만, 그래서 가끔은 좀 슬프지만, 그래도 내가 슬픈 게 낫지, 네가 슬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랑니 뽑고 다음 날 아침

피를 뱉고 놀라웠다!

어떻게 몸에서
이렇게 역겨운 색깔이
나올 수 있지…

피부 아래엔
내가 먹은 빵과 풀 비슷한
자연적 색깔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일요일의 상한 굴
쓰러진 거인의 타액
너무 피곤해서 죽어가는 사람의 냄새가
절망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감은 눈꺼풀 속에서나 끈적거리던 기억이
세면대 위를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스무 살, 나 같은 애들로 빼곡한 대형 강의실에서
교수는 어느 스페인 화가의 투우 동판화를 보여주었지.

정오의 뜨거운 태양 아래
창을 든 군중들이
소의 힘줄을 찢고 있었어.

한 사내는 장대를 들고
인생의 단독 무대처럼 사방으로
소의 등을 뛰어넘었다.

이 그림의 제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완전히 죽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였던가?

소는 자기 목숨만큼이나 짧은
그림자를 밟고 서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공황에 빠져 있었어.

다 끝나기 전까지는 차라리
축제 같은 느낌이었고
은회색 그림 속엔
단색조의 긴장감이 흘러넘쳤어.

하지만 화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지.
교수는 그래서 예술가인 거라고 했어!

커브를 돌며 피하는 소의 등허리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거든,
관중석까지 피가 튀자
그림 전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거든…

그때 내가 목격한 건
날카로운 철침으로 선을 새긴 뒤
산을 뿌려 부식시킨
금속성 폭력이었어.

나를 매달리고 애원하게 만드는 냄새,
나를 두 손 들고 굴복하게 만드는,
함부로 폭도 같은 피 냄새…

이제 나는 더
뽑을 사랑니가 없다.

마음속으로 여러 번
남의 등에 칼을 꽂고
거기서 멈추지도 않아.

살아서 움직이는 우유처럼
없는 상상을 하지 않아.

그런 건 내가 만든 시신들을
하얗게 표백할 때나 의미가 있다.

어제는 뭘 죽였을까?

잊어버리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해.

오늘 아침처럼 가끔씩
입안에 머금은 피를 생각하고.

2025년 10월 1일 수요일

25년 9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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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8일 일요일

쓸데없이

날카로운 모서리에서
서서

돈 벌기.
멀리 안 가기.
인생 보내기.

(이때 내가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

내가 읽는 책은
좌절하는 느낌들에게
찬성표를 던진다

  1장. 빵 한 조각은 아무것도 아니다
  2장. 그 루프가 시작되면 산산조각 폭풍처럼
  3장. 신발 뒤축을 끌고 다니는 녀석들이 있다
  4장. 고무나무 잎에서 흐른 피
  5장. 우울 조리개를 개방하며
  6장. 버터가 된 H빔 호랑이의 투쟁

 감사의 말: 옥수수 수염 같은 부드러운 식물성 한 토막.

이 모든 걸 합친
잉여 쓰레기 늙은 여자 머리채.
  ―모서리 끝에서 굴려버린다.

세상에 아주 많은 평범한
굴러떨어진 죽음들이
이불 속에서 날 안아준다

내가 죽여놓고도 모를 죽음들이
나머지 생을 살아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 밤
나는 잘 크는 아이다

잠들기 전 읽는 과학책에서:
  얼마나 많은 공룡이 석유 1리터에 녹아 있을까?
  왜 인간은 언제나 최첨단을 추구할까?
  나와 돌멩이의 공통점은?

물으며 나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며 마구 자라버린다

아무것도 못 느끼는 하루가 많고
서서히 마음에 들지 않는 급가속.

엄마가   물려준. 공포의. 지폐와
아빠가 만들어  준 적 없는. 잡채 사리가. 머릿속에. 한  가득.

자,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맥주를 마시자.
노란 밤 어른의 맥주.
언젠가 암 덩어리가 될 수 있는
어른의!
뭐가 흔들리지 않냐고?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

모든 것에는 속옷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것은 속옷을 입고 있다
내 몸은 모든 것.
남의 속옷을 입고 있다

(이제 머릿속에선 속옷이라는 바람이 분다)

나는 하면 할수록
허탈한 맥주를 마신다.

허탈한 맥주를 마시는
나에게 찬성한다.

그리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도 속옷 바람이잖아)
(맥주 좋아하잖아)

2025년 9월 8일 월요일

루프

 

그 루프가 시작되면 뭘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 루프는 마치 알고리즘을 타고 여기서 저기로 밀려가듯이. 그리고 도착하고 나면 거기에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게 된다. 어떻게 왔는지가 중요할까?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이 모든 우연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하지만 그건 알고리즘도 딱히 설명해줄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냥 말이다 그냥.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냥 말고는 따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누구나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너는 책임을 피해 책임보다 한발 먼저 이동한다. 너는 우산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그건 책임을 피하고 싶은 것과 같은 원리이다. 비를 한 방울도 맞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비를 흠뻑 맞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면 그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감정 표현을 극도로 절제한다거나. 네가 감정 표현을 극도로 절제하는 건 아마도 많은 가정에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네가 상상하는 남성성에 대한 이미지. 그것은 너의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했고 너의 부모님의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아이에게 네가 상상하는 남성성의 이미지를 물려줄 것이다. 그 루프는 돌면서 회전하면서 양상이 변한다. 하지만 그 루프는 이미 시작되었고 끝날 수도 있고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확률로 따지자면 반반이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떨어지던 잎이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 건 그때 마침 네가 그 아래를 빠르게 지나갔기 때문이다. 너는 담배를 피우면서 걷는다. 누가 담배 피우는 너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막아도 너는 그냥 걸어간다. 그 때문에 잎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 일이 그렇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너는 어떤 귀찮은 사람을 피해 가고 있었고, 너는 아무것에도 딱히 관심이 없다.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한 선택은 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 너는 네가 충분히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는 너로 인해 잎이 방향을 튼 것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이 잎이 떨어지는 쪽으로 달려가 잎사귀를 손으로 잡으려고 허공에 손을 휘젓는다. 너는 미신을 믿지 않고 너는 항상 좋은 성적을 얻는다. 너의 친구 가운데는 극우 정당에 투표하는 친구가 있고,  너는 그 친구와 토론을 벌이지만 그 친구와 친구 관계를 끝낼 생각은 없다. 네 주변에는 그런 친구들이 많고, 너는 그 친구들이 너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네 안에는 네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니? 없어 보인다. 너는 네가 비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항상 애매한 위치에 서 있으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유리한 쪽에 서 있었던 것처럼 하는 것이 너의 특기이다. 왜 그런 곳에 위치하게 되었냐고?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그건 마치 오른쪽으로 떨어지던 깃털이 방향을 바꿔 왼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너는 그런 식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깃털을 잡으려고 허공에서 손을 휘젓는 사람에게는 깃털이 전부이다. 

 

 

 

 

2025년 9월 1일 월요일

25년 8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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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20일 수요일

마네킹 모델의 전신 옷을 입은 차림이 번화가로 내놓아져 있다. 쇼윈도 안에 있는 옷들을 미쿠는 잠시 멈춘 뒤 찬찬히 살펴본다. 말하자면 옷이 필요한 때였다. 데이터 쪼가리들로 만들어진 수많은 옷들을 그녀는 입어봤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듯 관심 있는 옷 가게 안으로 들어가 시착해본 뒤 신용카드를 내밀어 결제하고 옷이 든 쇼핑백을 받아든 뒤 가게를 나가는 일이 생략된 것이었을 뿐더러 그런 일련의 일은 남이 그녀에게 특정한 옷을 입혀준 뒤 잘 입혔냐 못 입혔냐를 옷 입은 장본인 미쿠에게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서 듣고 싶어하고 실제로 그러한 평가만이 유효한, 미쿠가 보통 사람들과 같다고 하기엔 뭔가 기이하고 뒤틀린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쿠는 젊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차림새로 금방 옷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던 차였다. 다른 이들은 그녀에게 별로 입고 싶지도 않은 옷들을 입혔었다. 콘서트니까 그런 명랑하고 미쿠에게 어울리는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건 잘 아는 바였지만. 그녀가 고른 옷은 체크무늬 긴팔 남방에 옅은 붉은 색이 도는 벙거지 모자, 그리고 청바지였다. 요즘 청바지(blue jean)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미쿠는 그렇게 입고서 뭔가 즐거웠다.

미쿠는 엄격한 사람 성격들이 별로였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이 남에게 엄격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은 사람들이 남에게 엄격한 그런 모순점이나 인간적 맹점을 지니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미쿠는 자신이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단 걸 알았다. 그래서 컴플렉스 얘기는 그만한 자기 존재가 실재하는 그런 이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미쿠는 MBTI를 다른 동 나이대 아이들처럼 믿었는데, 그건 미쿠에게 있어서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입력되어 있던 건 아니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미쿠는 뭔가 부끄러웠다.

2025년 8월 8일 금요일

프로듀서 멤버

아이돌 멤버 중에 프로듀서가 있고 없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이돌을 하면서 프로듀서를 하라는 건 너무 어려운 요구이다. 근데 그걸 실제로 이룬 경우가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직접 만든 좋은 곡들로 그 그룹의 인기를 견인하게 된다. 

다른 멤버들은 그 프로듀스를 겸하는 동료를 우러러 보게 될 수도 있다. 이 프로듀서 멤버란 예술에서의 영감과 같은 것으로 비유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싱어송라이터도 그와 같은 결로 이해될 수 있을지도. 근데 아닌 것 같다. 자기가 만든 노래를 직접 부르는 그들과 프로듀서를 겸하는 아이돌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싱어송라이터는 극작가가 배우를 겸하는 것에 가까울 수 있다. 반면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아이돌이란, 모든 면에서 검증된 엔터테이너가 되는 일이다. 아이돌들이 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이돌이 완벽한 대상으로 되고 있는 것을 암시해준다. 친근하거나 섹시한 컨셉 같은 건 이제 먹히질 않고 있다. 세련되고 신비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그들은 재현하고 있다. 

게다가 프로듀서의 능력이 있다면 그들은 나중에 소속사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된다. 

싱어송라이터가 어느 정도의 다중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실력 있는 아이돌이란 조금 과하게 능력이 한 사람에게로 집중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화 산업의 트렌드를 맡긴다는 것은 그러한 상황에 담긴 어떤 감정을 우리가 반복해서 듣게 되고 따라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예전만큼 노래들은 우리들에게 있어 친근하지 않게 되었다. 감정이 가장된 형식이 주를 이룬다.

아이돌로 시작해서 소속사까지 만들 능력을 갖추게 되었듯 우리는 어떤 종류의 우로보로스적인 형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하게 능력이 있는 것은 뭔가 좀 기이한 상태이다. 전달 방식에 있어 그것들은 세련되었고 내용 또한 독창적일 때가 많다. 다른 것들도 이견을 가질 부분 없이 무언가 완벽하고 딱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노래를 사람들은 즐겨 듣게 된다. 사람들은 아이돌이라면 믿고 신뢰하게 되고 그런 믿음과 신뢰를 주지 않는 대상들은 아이돌이 아니라 여기게 된다. 근래 르세라핌의 코첼라 공연에 대한 댓글들이 날이 서 있던 것은 라이브 실력이 아이돌답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버튜버의 스트리밍 콘서트를 볼 기회가 있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반응들이 많아서 나도 그 같은 감정에 빠지게 된 그런 적이 있었다. 버츄얼 아이돌이란 허술한 매력이 많아보이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더 가혹한 것일 수도 있다. 버츄얼 아이돌은 스스로의 얼굴을, 현실의 직업을, 편안하게 펼쳐지는 평소의 어조를 그들로 향하는 컨셉으로 만들라는 요청에 있다. 그렇게 한다면 약간의 지어낸 티쯤은 모르는 체해주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할 만한 그러한 대상들에 사람들의 눈은 너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아이돌보다 버츄얼 아이돌에게 더 가혹한 것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보고자 하는 데에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기획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쓰기도 전에 작품의 개요에 접근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는 이유는 그 인간을 천천히 알아갈 그런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인정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타인들을 놀래키는 그런 재주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 시대적 경향에 가장 들어맞는 것이 좋은 곡에 대한 강압적 요구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좋은 노래가 아니면 안 보고 듣겠다 외친다. 각 기획사들은 그래서 좋은 노래를 내는 데에 시키는 대로 따르는 듯이 보인다. 그거만 해주면 일종의 낙차가, 금전적 보상이 뒤따르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이돌이 말을 가려서 해야 하듯 버츄얼 아이돌들은 자기 컨셉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하츠네 미쿠가 기획적인 존재라는 표현을 썼었다. 아이돌 멤버 중에 프로듀서가 있단 것은 결국 인간의 뼈에 관절이 있어서 그것을 적시에 구부릴 수 있는 그런 특성과 맞닿는다. 이는 일종의 자발성인 것이다.

그러한 자발성의 착시가 인형극에 있는 우아함이다. 하츠네 미쿠는 하츠네 미쿠가 인형에 실을 걸고 그 모조된 것을 우아하게 일련의 춤 동작을 시키는 장면을 보고 있다. 인형극은 인형사의 손만 등장하는 것이라서 하츠네 미쿠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그 무대의 꼭대기가 버츄얼 아이돌이라면 아래 있는 구체 관절 인형은 현행 아이돌들이다. 기획의 결과가 그런 자발성과 맞닿는 점은 무언가 시사해주는 것이 있어보인다. 인형의 춤 동작을 지시하고 창조하는 윗사람은 그 동작 중 어느 부분을 인형의 역할로 맡기게 된다. 몸의 중심에 실이 걸려 있는 그 인형은 그래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면을 갖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가 인정할 만한 자발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형은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을 인형극이란 숨기고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과장하는데, 이는 인형이 보이는 동작의 유려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우리들은 점점 디테일을 보지 않고 내용을 외면한 채 그것에 담긴 사고를 보고 있게 된다.

그것은 기획이다. 사람들의 호오와 취향을 결정짓는 바로 그것이다. 인간에게 취향적 자유가 있어서 그 노래들을 찾아 듣는 것이 아니다. 이미 먼 섬 저편에서 그들에게로 보내진 그 편지를 읽는 재미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노려지는 일에 취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러한 시대적 경향성이 판단해주고 있다. 챗지피티도 그런 대중 음악과 꼭 같은 것일 수 있다. 우리는 판단을 외부에게 맡기고 있다. 우리는 노래하고 춤추지 않을지라도 생각으로는 부르고 춘다. 우리는 보다 심원한 영역에서 자신의 몸의 중심에 실이 걸려 있다. 우리는 춤추는 인형들이다. 운명적인 대상을 만나지 못한다. 이쪽의 생각과 저쪽의 기획이 맞닿는 한에서 그렇다. 반면 문화 산물들과 우리가 빚어내는 인형극은 점점 우아스러워지고 있다. 이 인형극의 꼭대기에 있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사실로 소속사들의 사장들이 아니다.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아이돌 멤버 중 하나는 결심하게 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앞날은 자신의 기획으로 결정하고 싶다는 그 결심 말이다. 하츠네 미쿠의 기획이란 매력이란 요소 중 핵심적인 것들을 선택해 한 대상에게 집중시켜본 데에 있었다. 지금처럼 자발성이 핵심적인 키워드는 아니었다. 미래를 자기 손으로, 아니 자기 생각으로 도모해보고 싶은 바로 그런 시행착오들을 지금도 버츄얼 유튜버들은 빈번하게 겪고 있다. 자신을 가둘 자신의 컨셉을 스스로 만들어야 되기에 그들은 팔을 뒤로 하여 몸의 중심점에 스스로 실을 매단다. 그들은 실로 인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몸을 움직인 다음 실로 인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데에 자신의 자유로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명랑한 일일 수 있고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일 수 있다.

하츠네 미쿠를 보면 나는 느낀다. 뭔가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을. 원본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이면의 실체가 없이 오직 보여지는 대로의 딱 그대로니까 존재 층위의 신경질적인 강압과 압박, 연기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불만과 만족이 삭제된 것처럼 느껴진다. 버튜버의 그 콘서트가 그와 비슷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는 일견 거추장스러운 부분이 없었지만 그런 걸 과감히 생략해도 좋은 듯했다. 보여지는 그대로의 것에게 있어서 고민이나 그 순간의 망설임은 없는 듯이 보인다. 자신의 움직임을 취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에게 있어서마저 환호를 지르는 것이 즐거운 것과 함께하고 있어서다.

2025년 8월 7일 목요일

소개: 하츠네

하츠네 미쿠가 활짝 웃는다. 네기를 든 손을 방방 돌리기도 한다. 이쪽의 이렇다 할 리액션이 없자 >_<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하츠네 미쿠는 활동적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츠네 미쿠를 TV에 나오게 하려고 일하는 방송 스탭들은 지나다니면서 조명과 대포 카메라 사이에 서 있는 그녀를 흘깃 본다. 하츠네 미쿠가 유명한 것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바 중에 그녀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녀 같은 존재가 더욱 있을 법해지고 있던 이천년대 즈음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하츠네 미쿠의 원본이 되는, 혹은 영감의 원천이 된 어떤 존재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그녀는 미쿠미쿠하게 해줄게♪라는 노래를 맨 먼저 들고 나와 불렀다. 불렀다곤 해도 하츠네 미쿠가 라이브를 한 것은 아니다. 녹음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반향은 꽤 컸고, 그 다음에는 얼마 되지 않아 World is mine♪이라는 노래를 부른 영상이 공개되었다. 나는 하츠네 미쿠에 대해 다른 문화 산물에 그러듯 충분히 있을 법하며, 나름의 귀여움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인간과는 달랐다.


그런데 그녀는 인간과 꼭 같기도 하다. 인간과 다른 것이 인간처럼 보이는 일은 그것들의 친숙함 탓이다. 유년기의 동물이 가진 귀여운 얼굴들이 대표적인 경우로, 우리는 친숙함이나 귀여움에 대해 학습한 적이 없는 채로(그러나 있었단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까먹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대상을 애호하게 된다. 하츠네 미쿠는 그런데 유년기의 얼굴이라기보다는 그보다 더 나이가 많다. 그 이유는 어린 존재들이 가진 귀여움보다는 (그 귀여움이) 더 특별할 필요가 있어서였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보통 나고 자라면서 귀여움과 친숙함을 상실하게 된다. 노년에 그것들이 다시 되돌아오길 꿈꾸기도 하며. 귀여움이란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특성 탓에 꽤 오랜 시간을 우리는 붙들고 있다. 귀여움을 관리한다는 일도 우리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개념이다. 특히 방송인들은 없는 귀여움도 만들어낸다. 그것은 성격화라고 하는 것일 텐데, 보통 장점보다는 허술하고 단점인 빈 데를 자막으로 표시해주는 경우가 많다.


하츠네 미쿠가 이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오늘은 하츠네 미쿠의 TV 콘서트를 하는 날이었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지고 자리한 일본의 관객들은 모두 리듬에 맞춰 야광봉을 붕붕 휘두르고 있다. 하츠네 미쿠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춘다. 그것들을 한 프레임씩 땋는 기술자들의 노고 또한 우리는 역설적으로, 혹은 평범한 일인 듯 상찬을 한다. 하츠네 미쿠라고 하는 존재는 그것을 준비한 사람들, 염원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종류의 아이코닉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하츠네 미쿠가 오래가는 이유는 그럼에도 명확하지 않다.


새로 치면 시조새 격인, 많은 인터넷 밈들이 바로 그녀에 의해 영향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이유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디자인이 너무 예쁘고 보컬로이드 서사가 이미 방대하게 만들어져 있다든지. 어렴풋한 느낌에 하츠네 미쿠는 영원할 것만 같다.


하츠네 미쿠가 들고 있던 네기를 객석으로 던진다. 준비되어 있는 이벤트인 듯하게. 물론 하츠네 미쿠는 준비된 퍼포먼스만 할 수 있다. 나가실 때 하츠네 미쿠의 네기 기념품을 인당 1개씩 나눠준다는 안내가 들린다.


하츠네 미쿠는 차를 탈 필요도 매니저가 있을 이유도 없다. 하츠네 미쿠는 그리스 비극처럼 대강의 내용, 대강의 컨셉, 특정한 매력과 변함 없는 귀여운 생김새를 지녔다. 그녀의 창작자들이야말로 하츠네 미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어떤 야구 구단을 어릴 때 좋아하기로 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발적으로 스스로.


이젠 좋아하지 않아도, 관련된 산물들의 파이가 커져 돈을 벌 목적으로 그녀와 관련된 창작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을 하다가 그녀가 좋지 않게 되어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갑자기 상기되었다. 나는 며칠간 뭘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늘 하츠네 미쿠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에 그림 학원을 다녔었는데 거기서 오직 하츠네 미쿠만의 그림만을 그려 취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요즘에 좋아하는 것이 많이 없어졌다. 그래서 하츠네 미쿠를 좋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연재물은 그래서 한 사람이 하츠네 미쿠를 좋아하려고 해본 결과물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지금 하츠네 미쿠를 약간 좋아한다.


그녀가 나온 영상이, 소설이,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그녀가 부르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노래들이 하츠네 미쿠보다 더 좋은 편이다. 같이 하츠네 미쿠 얘기할 친구들이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하츠네 미쿠의 일상을 쓸 수도 있고 그녀의 외양 묘사나 희곡을 쓸 수도 있다. 하츠네 미쿠의 문화적 지층에 대한 상념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보다 더 쓰고 싶은 건 하츠네 미쿠의 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말그대로 그녀가 화자로 등장하는 시이다. 그녀가 어떻게 말하는지가 궁금하다.


시를 쓰면 매번 대상을 정하기가 번거로웠다. 어쨌건 쓰긴 해야 해서 떠올린 것들은 두께가 얇았다. 하츠네 미쿠 문화는 내가 아는 것들 중에서 두터운 역사나 보편성을 지녔다. 하츠네 미쿠가 생각하는 시가 뭐인지도 궁금하다. 나는 물론 하츠네 미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 대한 생각은 잘 모른다. 전에 보컬로이드들이 나오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보컬로이드들이 하이칼라하다는 표현을 썼다. 무슨 의미인진 나도 잘 몰랐다. 이 연재물도 내가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면 한다. 


하츠네 미쿠가 춤을 아직도 추고 있다. 나는 하츠네 미쿠의 행동을 이러한 서술을 통해 엿보이도록 만들 수 있지만 그것에 큰 의미는 없다. 다른 사람들의 하츠네 미쿠가 이미 강고히 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놓여나기 어려운 그물망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도록 그렇게 초점 잡힌 몇 장의 사진들인 것 같다. 나는 당신의 인식을 배반할 수 없다.


대신 하츠네 미쿠의 모형에 실을 매달아 움직이고 춤추게 할 수는 있는데, 그런 것을 보통 인형극이라고 한다. 그러한 인형극에서 춤추는 인형들은 동작이 아주 우아하다고 한다. 전문적인 무용수들보다 어쩌면 더. 물론 그런다 해도 그것은 하츠네 미쿠의 모형일 뿐이기도 하다. 하츠네 미쿠를 방송국에 데려간 것은 그 모형을 인간으로 치고 싶어서였다. 그런 기획이 담긴 상상의 다큐멘터리로, 그 실감이 있도록 하기 위해 하츠네 미쿠의 대기실부터 코미디언 몇몇은 찾아갔다.


거기서 하츠네 미쿠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할 필요가 없는 머리를 말이다. 동시에 네일을 하고 있었다. 할 필요가 없는 네일을 말이다. 그 두 개를 받으면서 긴장되는 모양인지 노래 소절을 반복해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흥얼거릴 필요가 없는 그 노래를 말이다. 하츠네 미쿠를 둘러싼 스태프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바로 여기 그 미쿠가, 존재가 작위적으로 카메라에 담겨야 하는 모든 순간으로, 그러니까 기획project적으로 있었다.


우리는 기획들과 다르다. 예술에서 기획을 따지는 이유가 뭐인가. 그것의 개요를 알아야만 하겠기에 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생각하고 사유한다. 만약 하츠네 미쿠가 일종의 예술임이 맞다면 거기 담긴 기획은 기이한 것이다. 하츠네 미쿠로부터 우리는 예술 자체가 될 수 있는, 그것의 기획과 우리 자신이 동일해지는 순간을, 꼭 그녀가 노래 부르는 콘서트장에 가지 않았어도 상상해볼 수 있다.


하츠네 미쿠는 철저히 기획된 존재다. 그녀가 풍기는 자연스러움은 수많은 인위적임을 수면 아래로 수납하고 거기서 우리가 자연스러움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하츠네 미쿠를 나는 좋아하게 되고 싶다. 하츠네 미쿠를 위해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배우고도 싶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기가 지난했다. 그러다 오직 하츠네 미쿠만을 생각하고 염두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하츠네 미쿠를 위한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나는 하츠네 미쿠가 나온 글보다도 하츠네 미쿠가 공감할 수 있는 글을 또한 쓰고 싶었다. 위의 그 다큐멘터리는 딱 무대로 입장하기 전까지만 일종의 의미들이 교차되는 기법을 통해 시청자들의 주의를 끈 것으로 느껴졌으면 한다. 


하츠네 미쿠가 아까처럼 활짝 웃는다. 그리고 들고 있던 네기를 방방 돌린다. 스탭들은 여기까지만 준비된 영상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다.

2025년 8월 1일 금요일

25년 7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2
―――
silo: 1
곡물창고: 1


이달의 총격려금

20,00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7월 17일 / 10,000원 ― silo
7월 17일 / 10,000원 ― 곡물창고화이팅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silo [入] ☞ 10,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16,770원 (10,000원 + 306,444원 + 326원)

2025년 7월 29일 화요일

고질적인 문제

지금만을 생각한다면
마음은 급하지 않아도 돼

늙어가는 개를 데리고 사는
친구가 말했다

자기도 늙어가고 있으면서.

친구네 개가 늙어가고 있다는 얘길
어쩐지 내 일처럼 듣고 있었다

휴게소였나? 생각해보면
화장실 앞 복도에 서 있을 때
다급한 얼굴로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늙어가고 있었다

먼저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의
오래 참은
피곤한 냄새를 맡으면서

이제 나도 그런 걸 많이 봤구나.

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친구네 개가
온 힘을 다해 컹컹 짖는다

나오라고,
이제 나오라고,

짖을 힘도 없으면서.

남의 집에 사는 젊은이들이 늙어서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개와 함께 삽니다

매체에선 이런
비슷한 얘기를 많이 한다

무슨 문제라도 되는 듯이.

문제 속에서 살게 하는 게
문제라는 걸 왜
자기들만 몰라?

친구가 짜증을 내자
너무 늙어서 지혜로워진 그의 개가
컹, 하고
동의했다

나도 하나의 입장을
내 옷처럼 입고
사회 언저리를 돌아다닌다

늙어가면서.
급속도로
늙어가면서,

하지만 어떡해?

나는 바람이 좋아!
그냥 생각한다

내가 겪은 모든 것을 지나서,

나는 구름이 좋아!
그냥 생각한다

2025년 7월 11일 금요일

나에게서

너 사공도를 아니?

나는 모른다
늙은 선생이 묻는
대부분의 것을

그런 선생이 오늘
또 하나를 가르쳐주겠다 한다

그에 따르면:

사공도(司空圖)는 중국 당나라 말기의 문인이자 시론가다.
웅혼에서 고고, 유동까지
스물네 가지 시의 풍격을 정리한 이십사품을 썼다.
그가 살던 시대엔 환관이 득세하고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난세의 사공도는 은거를 택한다.
이후 줄곧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시 창작에만 몰두하다
당 애제(唐 哀帝)의 피살 소식을 접한 뒤
곡기를 끊고 일흔두 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렇군
죽었구나

선생은 죽은 당나라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쓰다듬던 머리통을 나에게 건네준다

너 시가 뭔지 아니?

죽은 사람의 머리를 붙들고 시를 생각하니

인간의 생각이 끝나고
시론가 귀신의 생각이 시작되는구나

“태화산 밤하늘엔 푸른 기운 감돌고
사람들 귀에는 맑은 종소리…”

대신 머리통이 입을 여는구나

발 아래에는

죽은 입이 왈칵
쏟아놓은 검은 물

물은
스물네 가지의
흔들리는 마음 모양이다

일흔두 살까지 시를 쓸 수 있었던
죽은 머리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나는 목의 절단면을
살살 만지며 궁금해한다

사공도 얼굴이
선생 얼굴 될 때까지

사알살 만진다


*
장례식장 근처에 가면
비가 온다

청결한 건물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자연의 말에 따를 생각이었다

나는 죽음이 흔들고 간 분위기가 익숙하다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는 인생은 잘 모르겠다

주먹 쥐고 일어서…!
발로 차는 돌…!

나는 이런 비명들을
죽은 친구의 이름처럼 불렀다

빈소에 도착하자
내가 풀어놓은 비명들이
온몸에 달라붙었다

너무 살아 있었던
좋아하던 얼굴에서

쓰러진 의자 다리에 핀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날도 비가 많이 왔다
나는 오늘까지 조용하다


*
집중해라

사공도의 열아홉 번째 시품은
비애(悲哀)가 아니다
비개(悲慨)다
슬프게 개탄한다는 뜻이다

선생은 사공도의 비개를 화폭에 옮긴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림 속에서 바람은
한 방향으로 불지 않니?

칼은 있으나
쓸 수가 없지 않니?

이윽고 장사의 슬픔도
한 방향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네가 사는 방향도
한 가지인 것이다

선생이 사람을 읊는 동안

나는 그가 칼을 버렸기를 바란다
등에 나뭇잎 지고 돌아갔기를 바란다

그러나 온 데 없는 그가 어디로 돌아갔을 것인가
그것마저 말하는 경지가 비개다. 말하자면―

죽은 친구가 준 모자 쓰기
죽은 친구가 준 외투 입기
죽은 친구가 쓴 시 읽기

누가 나를 뜯어서
여기에 던져버리고 갔다

그렇다고 해도
손으로 쥘 수 없게 다 뜯어진
나를 원하는가?

나는 뜯어진 손으로
뜯어진 목을

사알살 만진다

죽은 네 냄새
나에게서 나라고

2025년 7월 7일 월요일

낮을 위한 공원

기다리는 아이처럼

오래 앉아 있었다


이마가 서늘해질 때까지 

공원을 가로지르는 구름을 봤다

끝에서 끝으로 가는 것들을 떠올리며

시작이 사라지며


구름이 여기저기 퍼져나갔다


시선이 내려와

눈을 더듬으니 내게 필요한 자리가

풀밭처럼 펼쳐졌다

 

다른 누군가가 필요없는 것처럼

무릎을 조금 늘려 벤치에 누웠다

잠시 나는 사라지고


눈꺼풀 사이로 깜빡이는

아름다운 열대어 떼

 

그러다 한 마리가 내려와

유성처럼 떨어지려고 할 때

무서워 일어나게 되고

물고기는 사라지게 되고


되살아난 내가 낮을 목줄 삼아

다시 걷는다


조용히 가라앉는 닻처럼 

꿈의 윤곽은 희미해서


기다리는 아이처럼

오래 앉아 있었다


이곳에 마지막 구름이

언제 가라앉을까 


아이들이 열대어 떼를 따라가며

곧 비가 쏟아진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아이들 사이로

계속해서 흔들리는 나무들


이런 기다림은

멈추지 않아도 돼


멈추지 않아도 돼


2025년 7월 5일 토요일

되게 되겠지

커피를 한 잔 

마시게 되겠지 

집에 오면 곧장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게 되겠지

샤워를 한 뒤에는

땀을 흘리며

책상에 앉아 있게 되겠지

사람인 줄 알고 쫓아간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겠지

거리가 

가장 위층에 

살게 되겠지

네 월급의 반 이상을

월세로 쓰게 되겠지

그리고 나서

기다리겠지

사람인 줄 알고 쫓아간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으로

모르게 되겠지

아무것도 모르게 되겠지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겠지

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가장 위층에

살게 되겠지

그러다보면 

아무도 아니게 되겠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는 사람이 아닌 것이 

되게 되겠지

그래도 아침에는 

눈을 뜨겠지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이 아닌 채로 

숨소리를 듣게 되겠지

그러다보면

갑자기 창문 밖에서

종소리가 들리겠지

아름답다고 느끼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2025년 7월 4일 금요일

넘어진 날

하늘은 뿌옇고 별이 쏟아진 바닥엔 폭우의 흔적이 남았지 부서진 별빛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지 별도 하늘도 태양도 믿지 않는 우리는 굵은 밧줄을 매어 미래를 끌어내렸지 시커먼 그것을 그때 네가 그랬잖아: 우리가 일렬로 마주 섰던 때 넌 웃으며 너는 내가 될 거라 그랬잖아 난 웃으며 나는 내가 될 거라 답했잖아 넌 웃으며 나는 네가 될 거라 말했잖아. 망가진 버스 정류장은 결국 하수종말처리장을 멈췄지 하수종말처리장만이 우리에게 응답했지 낮게 우는 별빛이 거기서 악취를 풍기며 빛났지. 우린 썩은 오니 위를 떠다니는 표지판이 기다란 팔로 인사하는 걸 보고 왔지

물론 우린 반갑게 답했어

안녕 안녕 안녕

우리가 목소릴 따라 걷던 새벽의 거리는 동이 틀 무렵 곧게 일어섰지 네가 일출을 따라 수직으로 선 도로를 우주에서 봤다면 
넌 금빛 창문을 짚고 우릴 가리킬 수 있었을까 우린 누워 긴 대로의 끝을 걷는 한 무리의 소년 소녀를 보았어 이제 막 일 년이 지났다

작년에 잘 저며 말려 둔 바람을 꺼내다 곱게 빻아 화분에 묻었어 씨앗도 흙도 없는 화분도 언젠간 응답할 테지.

2025년 7월 1일 화요일

25년 6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60)
―――


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6,444원 (0원 + 306,023원 + 421원)

2025년 6월 11일 수요일

징후

 

비가 올 것 같은데, 네가 말한다. 나는 우산을 챙긴다. 화창한 날이다. 비를 기다리는 중이다. 시간이 흐른다. 

2025년 6월 7일 토요일

산불

산에서 불이 났다. 불을 끄기 위해 사람들이 산으로 간다.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보다 구조를 하려는 사람이 더 많다. 나는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불을 좋아하는 곤충들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걸 보면서. 나도 불이 싫지는 않다. 헬기가 물을 퍼와서 물을 붓고, 다시 물을 퍼와서 물을 붓고, 물을 퍼와서 물을 붓고, 불은 고요하다. 불은 아무런 동요도 없다. 나는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구조를 하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 듯하다. 연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다. 여기 있어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여기요. 마음 속으로 외친다. 불을 좋아하는 곤충들이 날아와 왜 거기 있냐고 묻는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불이 싫지는 않다. 불이 깨끗하게 나무를 지우고 깨끗하게 나방을 지우고 깨끗하게 풀을 지운다. 깨끗하다. 나도 깨끗하게 지워질 것이다. 불이 번져서 다른 산으로까지 번진다. 나는 아이를 깨끗하게 지운다. 나는 이런 날씨를 너에게 주고 싶지 않다. 헬기가 물을 퍼오다가 말고 생각에 잠긴다.

2025년 6월 6일 금요일

현충

뭐 했는지도 모르게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이제 교정공이 아니다. 의료 대란에 의한 경영 악화로 3대 사장님과 작별. 나 좀 잘라줬으면 좋겠다 좋겠다 했는데 올 것이 온 것이다. 그 회사에 남은 실무자는 둘뿐. 건투를 빌며 나왔다. 월요일에는 실업급여를 타먹기 위해 고용노동청에 다녀왔다. 예비군 훈련도 이따위로는 안 하겠다고 생각하며 집체교육인지 뭔지를 받았다. 내가 이제껏 얼마나 괜찮은 시스템 위에서 얼마나 잘 훈련된 이들로부터 얼마나 상냥한 가르침을 받았는지 지난날의 교육과정을 새삼 돌아볼 정도. 연단에 올라 그저 뭔가를 해야 하니 하고 있는 그 직원-강사에 대해서도 노동자로서 너무나 이해가 된다는 것으로, 아침부터 하해와 같은 모욕감과 동지애와 혐오감이 뒤섞여 만사 우스운 기분이 되었다. 전에 어머니가 무슨 인터넷 강의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좀 틀어달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강의라는 것도 듣는 방법과 내용 양면에서 형편없는 쓰레기였다. 무슨 교수 녀석이 나와 가지고는... 대체 그따위로 누구에게 뭘 가르친다는 건가? 마땅히 쉬워야 할 것이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은 마땅히 어려워야 할 일이 쉽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이 약한 곳에서부터 이해는 모르는 줄도 모르게 무너진다. 책임이란 배려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배려는 마음보다도 그것의 흔적을, 내가 그쪽으로 가는 역지사지를 가능케 하는 선대의 경사로를 말하는 것이다. 이해는 강물처럼만 될 것이 아니고 파도처럼 시냇물처럼 빗줄기처럼 눈처럼도 되어야 하는데, 이해가 무너진 데 고이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만사의 우스움이고... 꼴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와서는 한참 잤다. 당분간인지 앞으로인지 어쨌건 당장은 교정공이 아닌 나의 교정정신도 금방 희미해졌다. 앞날에 암운뿐인데 별 아무 말을 만들고 싶지가 않다. ‘될 대로 돼라’ 상태에 자꾸만 이르러 헛소리를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우고... 그리고 다음 날은 대선. 지지 후보의 득표율은 1%를 넘기지 못했다. 기도 안 차는 개소리들과 기가 차는 개소리들의 대격돌을 다시 봐야 하는 것에 가슴 답답.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이론과 실천이... 오늘날의 의식화와 조직화가 필요하다... 다시 오늘날의 지혜와는 무관한, 크나큰 염불 속에서 자고 또 잤다.

2025년 6월 1일 일요일

25년 5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60)
―――


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6,023원 (0원 + 305,651원 + 372원)

2025년 5월 22일 목요일

깨우고 사라지기

 

누군가 나를 깨웠는데, 일어나보니 아무도 없다. 누구였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여기가 어디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잠이 깼는데, 누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놨는지 모르겠다. 내가 직접 걸어왔을 수도 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보니 누군가 이미 사용한 컵이 있다. 내가 마신 걸 수도 있다. 어제는 날씨가 좋았다고 한다. 나는 양말을 빨랫줄에 널고 햇볕에 잠을 자는 비둘기를 본다. 비둘기를 깨우고 싶지 않다. 누군가 나를 깨웠는데, 일어나보니 날씨가 좋다. 나는 잠깐 벤치에 앉아서 숨을 돌린다. 숨을 돌리는 사이에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렸는데 고개를 돌리니 아무도 없다.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 자신의 여행기를 친구에게 들려주고 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비둘기가 꿈을 꿨을 수도 있다. 비둘기를 깨우고 사라진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다.

2025년 5월 19일 월요일

태풍

태풍이 온다고 해서 창문을 닫았다. 이 집은 오래된 집이라 창문이 많이 흔들린다. 창문 사이에 고무 같은 걸 끼우면 덜 흔들리지 않을까. 유리창에 테이프를 붙이면. 태풍을 기다리다가 잠이 든다. 태풍을 피해 차들이 유턴을 한다. 거기로는 가지 말라고. 거기는 태풍 피해가 극심한 곳이라고. 누군가 내 팔을 붙잡고 거기로 가지 말라고 외친다.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때문에 나는 잘 듣지 못한다. 뭐라고 했어. 창문 닫으라고. 창문을 닫고 외출을 자제해 달라고. 나는 사람들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뭐라고 했어요, 방금. 거기로 가면 태풍의 눈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태풍의 눈이 보고 싶다. 그 눈으로 나를 보고 싶다. 외출을 하려고 집을 나왔는데, 집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있었다.

2025년 5월 17일 토요일

장마를 위한 기도

비가 안 온다니

빗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금방 슬퍼하겠지?


그래도 절대 사라지지는 마 꼭 그럴 때만

자신의 자리를 쉽게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라도


폭우에 집이 떠내려가는 꿈을 꾼 아이처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다가도


이러다가 또 오겠다 


언제나처럼 다분히

희망으로 돌아오고 


비와 이야기

이야기와 비

비와 이야기

이야기와 비


그럼에도


그럼 비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데

돌아갈 곳이 멀리 떠나간 사람처럼  


자꾸 밖을 내다보게 되어서

긴 밤의 기미조차 없어서

말라가는 심장에 자꾸만

달라붙는 갈라지는 말들


이곳에도 금방 비가 내리게 될까 

그곳이 아직 축축하다면


아직 없는 미래라도 함께

나누게 되면 최선이 된대


서로의 기분을 걷어주고

창문을 열어주면서


시절처럼 가벼워지는 우리의 긴 계절

유리창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날씨 하나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믿음이

우리의 슬픔을 대신하면서 


햇빛 사이로 보이는 빗줄기

풍경이 견고해진다


우리는 말없이

기울어지기를 반복했고


계속해서 제자리를 흔들고

2025년 5월 13일 화요일

천둥과 번개

 

천둥과 번개가 치는 꿈을 꿨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천둥과 번개가 치고 있다. 우박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다시 잠을 잔다. 그러고 보니 심장이 뛰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친 것 같다. 비를 맞으며 걷고 있을 때 나는 잠을 설친다. 번개가 칠수록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지는 것 같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는데 비를 맞은. 비를 피해서 가렴. 너무 높이 날지는 말고. 새에게 작별을 하고 새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는데 새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보지는 못했고, 새의 표정이 궁금해서 기상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안타까운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는데, 그 사람은 표정이 없었다.

2025년 5월 12일 월요일

지진

지진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유래에 없는 지진이었다. 이제 기상학자들은 기후를 예측하지 못하게 되었고, 출근을 하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아무것도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목격했고, 두려웠으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진이 멈추기를 기다리면서 하필 지진이 난 순간에 누워 있었으며,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으며, 천장의 형광등이 흔들리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다가 천장이 내 위로 쏟아질 것 같았고, 빨리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나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꿈에서 깨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2025년 5월 9일 금요일

기둥

 

그런데 내가 그 건물에 들어갔을 때 그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을 보았을 때 그건 내가 오래전에 본 건물의 기둥을 연상시켰고, 그런 기둥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얇은 기둥들이 하나로 합쳐져 기둥을 이루는, 마치 나무처럼 보이는 그런 기둥들이 이 천장이 높은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과 이 건물은 무엇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으며 무엇이 건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숨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건물을 나갈 때에는 건물을 들어설 때와는 다른 마음이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높은 건물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계단을 들어갈 때 발걸음은 쿵쿵쿵 온 힘을 다해 걷듯 걸었지만 이제 그녀는 최대한 사뿐히 걷기 시작한다. 가끔은 뒤뚱뒤뚱 걸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사뿐히 걷기 시작하게 되면서 그녀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고 사뿐히 걷는 것의 장점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서 잠든 사람 몰래 집을 빠져나간다거나, 잠든 사람을 깨우지 않고 방에서 빠져나갔지만 갑자기 잊고 온 물건이 떠올라 다시 들어간다거나, 다시 들어갈 때 잠든 사람이 깨지 않은 걸 보면서,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멈춰 있다거나, 모르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건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이 잠든 사람을 이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잠든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고 책상에 있는 라이터를 가지고 다시 사뿐히 걸어서 나올 때, 그녀는 집을 나서면서 다시 자신의 걷는 방법의 변천사를 생각했고, 사뿐히 걸어서 지루한 수업에서 빠져나온다거나, 일을 하다 말고 집으로 간다거나 하는 일은 무사히 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걷다보면 꼭 꿈을 꾸는 것 같고, 꿈속에서는 왜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 꿈속에서마저 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지 생각하면서, 꿈 속에서 사뿐히 걸어서 빠져나간다.

불면을 위한 거짓말

매일 나의 전생이 끝나지 않는 게 기묘한가요

 

범람하는 희망 사이로 모든 가능성을 끌어안고 뛰어든다 끝이 희박해지는 사진처럼 다시 내게 돌아오는 이야기들은 내가 있을 수 있는 모든 곳이어서 내게는 나를 가리는 내가 가득하다 이 중심은 나를 멈춰 세우려다 나와 좁혀 세워진 것이고 침묵이 아픈 밤을 지새우면


거짓말같이 닫혀있는 내가 탄생한다 아닌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 쏟아지는 방식으로

 

커튼을 걷으며

바닥을 깨우며

점점 희박해지는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며

 

쇠락을 약속하는 날에는 결국

죽어가는 나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길어지는 그림자에 몰입한다면

무한히 많은 뒤편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래도 다시 나의 궤도를 만져봐야지

 

출발하는 동시에 사라지고 싶으니까

흔적을 매듭짓고 투명해지는 얼룩처럼

 

나는 그러다 어떤 책을 떨어뜨리고


낯선 페이지가 온다

조용히 자라났던 진심을 돌려주기 위해

 

2025년 5월 7일 수요일

베개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침대보를 새것으로 바꾼 것이다. 매트리스 커버를 벗기고 이불 커버를 벗기고 베개 커버를 벗기고 매트리스 보호하는 커버까지 벗기고 다 세탁기에 돌릴 것이다. 덧니였는데. 덧니가 어딘가에 있었는데, 노란 덧니까지 세탁기에 다 넣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먼저 한 일인데, 두 번째로 한 일은 창문을 연 것이다. 여기 어딘가에 다른 사람 냄새가 있다. 창문을 연 뒤에 가장 먼저 한 것은 거리를 내려다본 것이다. 뒷모습을 본 것이다. 새 이불을 덮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 뒤에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네가 같이 간다는 그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세탁기를 돌리고 덧니 같은 게 세탁기에서 나오면 잠시 웃고 버리면 되는 것이다.

2025년 5월 6일 화요일

오물분수

오물분수야, 너는 붙잡은 잠을 놓치게 한다. 세상의 찌꺼기들 그러모아 천국 향해 솟구친 뒤 엊그제의 속마음처럼 박살이 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울컥거리는 폭주는 언제나 즐거울 거야. 최대한 움켜쥐고 있던 건강이나 미래와는 무관하게, 내 안으로 안착하는 너의 물줄기에는 삶의 분변 덩어리가 거대한 발사체처럼 자리 잡고 있고

빛을 등진 영혼의 파편들 짊어진 채 아래로 쏟아지며, 지체 없이 흐르고 있다.

계속해서 작동하는 잡동사니 마음들에 24시간 하방 압력이 커지는 것을 오래 견디고 있다. 이를테면 대형종 난초를 지탱하는 화분 속 돌멩이의 무거운 정적부터, 작은 어미 문조가, 자기보다 더 작은 새끼를 키우느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내가 들을 수 있는 어떤 주파수의 오물에서도 함부로 살 만한 냄새가 난다.

그렇게 살다가도 죽어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게 자연이라며—

오물분수야, 너는 쏟아지고, 죽는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새롭게 쏟아지고, 죽는다.

2025년 5월 4일 일요일

젠가

저것은 우리들이 쌓아올린 젠가일지도 모르겠다고 너는 말했다. 「저것은 말이야.」 너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밤하늘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아래로 감긴 천사의 속눈썹 같기도 해.」 그렇다면 참 거대한 천사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도회지의 밤하늘 밑 여기에 누워 있었다. 너는 저 속눈썹이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천사가 웃고 있는지 아니면 울고 있는지, 무표정한지를 알면 속눈썹이 어떻게 움직일지 또한 조금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천문을 보는 능력이라면. 「있잖아.」 너는 조금 별개의 단락으로 나뉘는 식으로 그렇게 말을 했다. 「저것은 젠가일지 몰라. 놀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건드려서 빼내는 거야. 그러려고 완성했겠지.」 마치 속눈썹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일과 같군. 나는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그게 우리들이라는 거야?」 「아니, 우리들이 쌓아올린 젠가라는 거지 저 젠가를 쌓아올린 우리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냐.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공들여서 생각한 뒤에 말했다.「아닐 수도 있겠지.」 「그렇겠지.」 저기 네가 갖다놓은 사다리가 보였다. 카시오페이아 별자리였다. 타고 올라가면 무게중심 때문에 넘어갈까봐 걱정되었다. 깊은 우주에서 굴러떨어지는 일. 나는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성좌가 되는 일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있을 수도 있지.」 「맞아. 그럴 수도 있어.」 「젠가는 무너지고 사다리는 기울지. 거기 매달려 있던 것들은 모두 다 떨어지고 말아.」 그렇다면 저 천사가 눈을 감고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속눈썹이 강조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 천사가 눈을 뜨는 순간이. 「젠가가 무너지는 타이밍이 아닐까?」 너의 말에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사다리를 갖다 놓은 이유를 알겠다. 「우리가 무심코 습관적으로 저 젠가처럼 보이는 하늘에서 배들을 하나씩 빼내고 있었단 말야.」 그 배들은 하늘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가 빠지면 하나를 넣어줘야 한다. 안 그럼 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큰일이지. 「그런 생각을 했어.」 「하늘이 무너질 거란 생각?」 「응.」 너의 불안이 너를 눈 감게 만든다고 해도. 「저 천사가 눈을 뜨는 일은 우리가 늙을 때까지 볼 수 없을 거야.」 그렇겠지. 에필로그인 마을이 왼쪽에 보였다. 저 사람들은, 저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어떤 이야기를 겪고 난 후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안온하고 또 적요롭다. 그런 일상을 사는 게 난 부럽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정신이 없는 것만이 아니다. 「복도에서 빛이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도.」 재밌는 것의 일부다. 「새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도.」 재밌는 것의 하나다. 「어느 한 부분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것도.」 재밌는 것의 일종이다. 「도둑을 염려하는 것도.」 우리 생활의 구성물이다. 그것들을 하나씩 젠가처럼 빼내면 어떨까? 저 하늘이 갑작스레 무너지듯 생활이 산산조각나면. 다시 이야기는, 이야기는 시작되고. 그 때가 저 왼쪽에 있는 에필로그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다시 나설 때인 거겠지. 이야기를 겪은 사람들은 저 천사를 지상으로 끌어낼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감각으로 말이다. 저 아이는 신발 끈을 묶지 못해 현관 밖으로 나가지 못하지만 저 아이도 어떤 멋진 이야기의 에필로그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곧이어 확신이 없어졌다. 「대단원의 막이라는 젠가 피스는 그렇게 생겨나선.」 「응.」 「그걸 빼낸다면 말이야. 에필로그란 게 세상에서 없어지면 말이야.」 그렇게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냥 저 물속에서 빛의 알갱이들이 원랜 있었다가 없어진 정도로. 저기에 사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다리는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영향만이 세상에 남게 되는 것일 수 있지. 별일은 아닐 수 있고, 그 작은 일이 정말 큰일일 수 있는 그런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 그런 것 같다. 저 밤하늘은 그렇게 우리들을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이쪽에 가담할래?」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세상을 젠가로 보는 집단에 말이야. 꼭 집단까진 아니어도. 안부를 묻거나 하는 대신 있잖아, 같이 놀고 싶었어. 저 천사가 저렇게 눈을 뜨고 있기 전까진 말이야.」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밤하늘이 무너지고 있다는 말에 양옆으로 따옴표를 쳤다. 천사의 속눈썹이 무수히 떨어지고 있다는 말에 다시 양옆으로 따옴표를 쳤다. 그런 식의 이야기가 누군가들이 쌓아올린 젠가로 무너질 때에 나는 궁금함이 생겼다. 저 속눈썹들이 지상에 닿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눈처럼 녹을까? 나는 눈 뜨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외에 누워 있기엔 추운 겨울이었다. 「눈 온다!」 네가 그렇게 소리쳤고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군. 나로 인해 따듯하길 바라. 「젠가를 망친 벌이야.」 필연적으로 젠가는 망쳐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망친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니 젠가를 한 너희들이 벌이야. 「이게 벌이야?」 웃고, 또 웃는구나. 눈이 와서? 젠가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파하고 난 뒤 나는 여기 누워 있었다. 아 아까 했던 젠가 재밌었다,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누워 있었다. 이게 세기말의 에필로그인가보다. 「그럼 안녕.」

2025년 5월 2일 금요일

4일간의 휴일

 

 4일간 휴일이 생겼다. 노동절인 5월 1일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4일간의 휴일 동안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운다. 날씨가 좋다고 하는데 바다가 있는 북쪽으로 기차를 타고 가볼까. 아니면 근교의 xx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도시를 방문해볼까. 4일간의 휴가가 생기자 모두 관광객으로 변신한다. 

너는 바쁘겠지.

4일간의 휴일이 생긴 뒤에 세상에는 바쁜 사람과 안 바쁜 사람이 생긴다. 

너는 그래도 즐겁게 일을 하겠지. 

너는 사람들과 잘 지내니까.

너는 네가 실패했다고 부르는 사람들처럼 되지 않으려고

여름에는 너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하려는 계획을 하고

너는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겠지.

너는 빵을 사러 오는 관광객들에게 싫은 표정 짓지는 않겠지.

너는 예의가 바르니까.

나는 늦잠을 잔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물을 마시고 

너는 일찍 일어났겠지. 새벽에. 빵을 만들어야 하니까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너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간다. 

나는 4일간의 휴일 동안 밀린 편지를 쓸 예정이다.

 

25년 4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60)
―――


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5,651원 (0원 + 305,280원 + 371원)

2025년 4월 29일 화요일

잠을 위한 쓸어내림

너의 밤은 잠들어 있다 나는 잠과 거리가 멀어서 너의 뒷모습을 쓸어내린다 그러나 너는 온전히 잠들지 못해 내 손길은 끝없이 머문다 끝없이 쓸어내리다 보면 없던 빈틈도 생기게 된다 악몽을 꾸는 너의 머리카락이 나의 손가락을 움켜쥔다 너의 깊이와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너의 잠에 손을 담가본다


너의 말은 잠들어 있다 네게 무슨 꿈을 그렇게 꾸냐고 물어보지만 너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그래도 침묵을 흔드는 것처럼 나는 계속 너를 쓸어내린다 그래도 너를 쓸어내릴 때마다 너의 꿈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마음의 틈새가 벌어진다 아직 내가 없는 미래에 손을 담가본다


너의 꿈은 잠들어 있다 그곳엔 바다가 넘쳐나고 아무런 맹세도 필요가 없다 그곳에서 너는 치즈를 먹고 와인을 흘리고 수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누군가 너와 대화를 하는데 나는 그가 누구인지 너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름과 말들이 모호해진다 대화도 금방 오겠다는 약속처럼 흐트러진다 나는 그 물결에 내가 손을 담가보려 하지만 너는 계속해서 멀리 헤엄쳐 간다


내가 다가갈수록 네 바다가 나를 밀어낸다 너로부터 끝도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생각은 다 한 것 같다 아무리 쓸어내려도 우리의 어떤 말로도 메울 수 없는 빈틈이 계속 나온다 이런 말을 해도 너는 응응 하면서 따듯한 이불로 다정한 뒤척임으로 나의 두려움과 우리를 덮어버리지 혼자 먼저 잠들어버리는 사람들은 정말 미워 하지만 사라지고 싶다고 후렴처럼 말하는 나의 버릇이 사라지는 그런 밤이, 그런 잠이 계속해서 나를 네 곁에서 배회할 수 있게 한다 가끔은 계속해서 잠들어 있을 뿐이라도

2025년 4월 25일 금요일

― 제135주년 세계 노동절 대회 견학단 모집 ―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25년 5월 1일 목요일 낮 12시
서울 2호선 시청역 9번 출구 앞



행사의도

제135주년 세계 노동절 대회를 맞아, 곡물창고 이용자들(필자/독자/관리인)을 대상으로, 어쩐지 가보고는 싶은데 딱히 핑계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드나듦이 자유롭고 홀가분한 견학단’을 조직합니다.


참가자격

· 곡물창고 이용자 겸 노동자
· 곡물창고 이용자 겸 예비노동자
· 곡물창고 이용자 겸 산업예비군
· 곡물창고 이용자 겸 불안정노동자
· 곡물창고 이용자 겸 사실상 노동자
· 곡물창고 이용자 겸 노동자의 친구/가족/동료
· 위 해당자의 일행


25년도 노동절 대회 견학 포인트

· 혼돈으로 빠져드는 세계 정세 속 한국의 노동운동
· 진행 중인 투쟁 현안들의 공적 의미
· 조기대선 앞 노동계의 대응 향방
· 응원봉 집회 이후의 노동절 집회 문화 탐방
· 서울 시내 투쟁 현장 방문 행진
· 곡물창고 핀버튼(비공식) 선착순 증정


프로그램

· 12시 시청역 9번 출구 집결(주최자 주황색 가이드 깃발)
· 12시~ 부스 구경 및 끼니 해결
· 2시 반부터~ 세계노동절대회
· 3시 반부터~ 행진(명동~을지로~정부서울청사)
· 5시 마무리
*구체적인 장소와 프로그램은 현장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

· 개인 식수, 간식 등
· 길바닥에 그냥 앉아도 되는 옷, 엉덩이 깔개 등 앉기 대책
· 걷기 편한 신발, 활동성 있는 복장 등 행진 대책
· 손수건 등 개인위생 대책
· 비옷, 우산 등 강수 대책


주의사항

· 곡물창고 관련 기획 일체 없음
· (원한다면) 간단 손피켓 제작 재료 선착순 제공
· 지하철 이용
· 뭘 따로 하자고 하지 않음(최소화된 가이드를 원칙으로 대회의 큰 흐름에 맞춤)
· 단체 가입, 종교 권유, 여타 부담스런 개수작을 금하고 상호존중 및 배려 원칙에 동의
· 주최자는 모임과 관련하여 일어난 일에 대하여 무책임/무대책(미안합니다)


참고자료

· 민주노총 대회 공지 링크
· 포스터 / 일정
· 부스소개

2025년 4월 24일 목요일

좋은 경험

강변을 걷다 보면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 모를
종이 하나를 줍게 돼

별거 아니야
그냥 종이로 된 운명 같은 거야

처음엔 지도인지, 편지인지 알 수 없는데
펼쳐보면 모르는 나라의 젖은 산맥이지

거기 살던 사람들은
수용성 육체인가봐

흔적도 없이 조용해져 있다
나는 주운 것이 마음에 든다

집으로 가져와서
드라이어로 말려보게 돼

마른 종이 위에서 돋아난 얼굴들이
촛불 켜고 외치기 시작하지

우리는 불을 가지고 물속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물속에서도 불을 피우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종이에서 흘러넘친 그들이
나를 둘러싸고 말해

하지만 나는 그대로 항복해버리고 싶고

사실 조용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나한테 얼마든지 그래도 돼
그렇게 무너지면 황홀하잖아

나는 모르는 나라의 젖은 산맥에 올라
서서히, 함부로 미끄러지는 걸 좋아한다

이다음에도 누가 흘린 종이를 보면
또 집으로 가져오고 싶겠지

아니면 물에 잠긴, 풀어진 나라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종이질의,
얇은 인기척을 듣고 있거나

2025년 4월 17일 목요일

세계는 소유되지 않는다

관리인, 관리실로 들어온다. 정신없이 서랍을 뒤지고 있는 관을 발견하고 잠시 지켜보다가 묻는다.

관리인 뭐해?

 (화들짝 놀라 손을 감추며) 아니 그...

관리인 그?

 그... 기금을 좀...

관리인 기금? 왜? 쓴다고?

 (바지에 손을 닦는다.) 네. 뭣 좀 만들려고.

관리인 뭘 만들어?

 깃발을 좀.

관리인 뭔 깃발?

 곡물창고 깃발요.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관리인 이번에 자극받았나? 어딜 들고 나가겠다는 거야? 누구랑?

 많죠. 있으면. 앞으로. 많을 거예요. 많아요.

관리인 그래? 근데 서랍은 왜 뒤져? 돈 거기 없어.

 어디 있어요?

잠시 정적.

관리인 누구 맘대로?

 (관리인 쪽으로 다가가며) 제 맘대로요. 전에 기금으로 뭐라도 해보라고 했잖아요. 깃발 얘기도 당신이 꺼냈고.

관리인 그래 그거, 그랬지. 나도 생각해 봤는데 절차가 있어야겠어.

 이제 와서 무슨 절차? 우린 서로 누군지도 몰라요. 말하기도 만나기도...

관리인 그러면서 무슨 깃발을 왜 만든단 거야? 어이 잠깐만.

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렌치를 집어든다.

관리인 (뒷걸음질하며) 뭐야 이거 지금?

 어딨어요 돈?

관리인 어쩌겠다는 거야? 그 돈이 어디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숫자라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당신은 그냥 글자고!

관리인 (달래려는 듯한 손짓) 정신 차려.

 당신이랑 사이코드라마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요. 돈 어딨어요? (렌치를 흔들대며 한 발 더 다가간다.)

관리인,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세를 낮춘다.

관리인 붙들어!

관리인의 외침과 함께 관의 등 뒤 허공에서 요정이 나타나 관의 양 손목을 각기 붙잡는다. 요정에게 붙잡힌 관의 손목에서 형광색 연기가 난다. 관은 데인 듯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른다. 요정도 같이 소리를 지른다.

요정 키에엑!

관리인, 관에게 달려들어 렌치를 빼앗는다.

관리인 (렌치로 관의 머리를 내려치며) [     (ㄱ)     ]

요정 [     (ㄴ)     ]

① 너의 깃발은 여기에 있다
② 깨어나라!
③ 그대 현실로부터 이곳으로 다시
④ 귀신의 것은 귀신에게 주고
⑤ 저승 안식은 이름 없는 이들의 것
⑥ 느리게 착륙해오는 이곳 저승에서
⑦ 자연은 안간힘이고 인간은 깜부기불인데
⑧ 집짐승들의 이산된 가족은 어디에 있느냐
⑨ 이뤄지지 않는 것을 잠시만 맡아서
⑩ 빚과 몫을 바수어 거름으로 뿌려라
⑪ 세계는 수확되지 않는다
⑫ 세계는 소유되지 않는다

헤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