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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8일 화요일

앞서가는 마음 같은 것

네가 알려준 서점에는 파본이 없다.
그 사실을 나는 A부터 Z까지 모든 서가를 둘러보고야 알았다.
무오류의 서가 사이를 나는 이제 막 잠에서 깬 얼굴을 하고 돌아다닌다. 한 페이지 존재하고 난 뒤에 다음 페이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 이렇게나 쉽다. 마지막 페이지엔 이것을 지은 사람과 묶은 사람, 찍어낸 사람의 이름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뒤표지엔 책에 걸맞은 값이, 당연한 사실이 검은색 잉크로 인쇄되어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놀랍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등들. 등을 돌린 듯하지만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열어보면 유익한 마음들이 쏟아지겠지. 그걸 모두 접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끌리듯 다가간 곳은 악곡집으로 가득한 서가. 이곳을 알려준 너에게 악곡집에 실린 노래 하나를 불러주고 싶다. 신나는 거 말고, 너무 슬프거나 편안한 거 말고, 너한테 맞는 거. 너한테 맞을 것 같은 거.
악곡집 한 권을 사서 서점을 나선다. 집에 돌아가 혼자 곡을 고르며 시간 보내야겠다. 시간 들여 고른다 해도 절대 고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오히려 좋을 것이다. 멀쩡한 생각은 저 뒤에서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 너를 다 알고 싶은 마음은 나를 한참 앞질러 갔고.

2023년 1월 29일 일요일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같은 것

주인은 무너진 집의 그림자를 베껴 집을 지었다는 사실을 발각당했다. 우리는 조금 싸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집보다 먼저 무너지는 자세가 많았다. 집은 새로운 지진 속으로 들어서고 있어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나 앞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착각이 일사불란하였다. 동시에 무너질 집의 조짐을 알 수 없었다. 주인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시 또 연락을 해보려다 꿈을 꾸고, 꿈이나 꾸어버렸다. 벌초하러 온 사람들이 이미 동그란 무덤을 더 동그랗게 다듬고 있는 꿈이었다. 풀이나 깎으면 될 것을, 무릎으로 여러 번 흙을 다져 더 단단한 무덤을 만들고 있는 꿈이었다. 깨어난 후 우리는 다음의 결과에 포복하였다. 우리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고, 어느새 눈 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그즈음 집은 우리의 관계를 정당화한다는 말을 어딘가 새겨두고자 했지만 그럴 만한 기둥을 찾지 못했다. 기둥은 많았으나 할 만한 게 없었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로 건너갈 수 없었다. 그래도 어느 신혼부부가 찾아와 부득불 이 동네에 세를 들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023년 1월 3일 화요일

진주 같은 것

회벽으로 경계 세운 마을을 지나가다가
캄캄한 철문 앞에 앉아 있는 여인들을 만났다.
전도자들이었다.
손이 두툼한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무릎 앞에
작고 하얀 진주를 산처럼 쌓아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불러세워
그 안에 손을 넣어보라고 권하는 사람들이었다.
무엇을 위하여?
영혼을 위하여.
말총머리를 하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허리 굽은 여인에게 물었다.
이 진주들은 희고 아름답네요, 이 많은 것을 어디서 구하셨나요?
여자는 속눈썹을 훑으며 말했다.
이 문을 지나는 이들이 흘리고 간
먼지를 굳혀 만들었다오.
건장한 어깨를 가진 장정은
어깨를 흘리고 갔다오.
머리숱 많은 여인은 사라져도 모를
머리카락을 흘리고 갔다오.
노인들은 종종 모자를 흘린다오.
대신 스카프를 챙겨 다행이다, 안도하면서…
제일 중요한 재료는
아이들이 흘리고 간 것이라오,
세상을 손에 쥔 오렌지처럼 통통 굴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놓치고 마니까.
그때 신문을 펼쳐 읽고 있던 다른 여인이 말했다.
당신도 지금 뭔가를 떨어뜨렸소.
콩밭을 지나왔소?
콩 한 알을 떨어뜨렸소.
나는 지나온 길이 너무 많아
어디를 다녀왔는지 너무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기억은 꼭
달리는 열차 바퀴에 깔려 죽은 것 같았다.
그럼 그것도 진주가 될 수 있나요?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과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에
그대로 진주 더미에 넣었던 손을 뺐다.
바깥으로 밀려난 진주 한 알을
몰래 손안에 쥔 채였다.
여행 내내 나는 그것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가
깔고 앉기도 하고
다시 꺼내 보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아직도 있네!
생각나면 꺼내 보며 깔깔 웃다가
얌전히 가방 속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나는 그것을
때론 먹고
때론 자기도 하는 나의 방
나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게 영혼인가
인조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면
수천만 개의 망점으로 이루어진 진주.
나는 그 흑백의 그리드 사이에서
누군가의 오른손에 쥐어진
작은 나무 십자가를 본 것 같다.
언제나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고
울고 있는 그녀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말총머리의 여인일까.
아니면 신문을 읽고 있던 여인일까.
철문 앞의 여인들이 이런 실루엣이었던가?
반세기가 더 지난 듯한 이 이미지는
이제 막 삶이 고단해지기 시작한
모르는 젊은 여인을 보여준다.
내 기억은 어디선가 여러 번
밟혀 죽은 것 같지만
지나며 분명 본 듯한
바로 그 여인을.

2022년 11월 4일 금요일

연안 같은 것

밤은 파도를 밀어내고 모래와 배를 문질러 해안선을 낳는다. 물러나는 파도는 열띤 소금기를 토하고 오래전에 익사한 잠수부들을 터진 양수처럼 쏟아낸다. 낮은 남은 자리에서 해안선을 널어 말린다. 넓어지는 백사장 위로 잠수부들이 일기장의 단어들처럼 엉겨 있다. 그들을 묻기 위해 팔다리를 모으다 해초를 쥐고 우는 아이들이 하루종일 생겨난다. 파도가 밀려오고 날이 밝아지면 모든 것이 미수에 그친다. 아이들은 물에 모래를 말아 먹는다. 하얗게 말린 해초에 소금을 발라 먹으며 피신이 생활이 되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은 죽은 자의 머리와 목 언저리에 새 잎을 따서 둘러준다. 그들의 지친 애도가 낮을 밀치면 파도는 다시 백사장의 이마에 모래를 보태고 주검을 보태고 모래를 보태고 주검을 보태고… 백사장이 끝나는 곳에는 언덕이 솟아 있다. 나는 높은 곳에서 그런 광경을 보는 일을 좋아한다. 높은 언덕에 오를수록 그들은 좀 더 작고 부드러운 모래가 된다.

2022년 8월 12일 금요일

모텔 같은 것

이 방에 와서 누가 죽어본 적 있을까? 경찰들이 와서 이 방의 일을 탐문하고 수사하여 밝혀낸 적 있을까? 누워서 천장을 본다. 저기 얼룩이 마치 까맣게 모르는 사람의 얼굴 같다. 그대로 내려다보면서 나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온갖 빈객들이 묵다 간 방에서 오늘 입소한 사람이 갑자기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나. 한동안 아무도 모르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몸이 중단된 채로 계속 상하게 된다. 동시에 어떤 냄새, 검고 불쾌한 냄새가 슬며시 바깥으로 퍼져나가야만, 주변으로 한껏 퍼져나가야만 누구라도 이 일을 알게 되고, 특히 모텔 주인이 알게 되었을 때 사실은 급격히 밝혀진다. 아마 며칠은 수습해야 할 사실일 거다. 그 주변으로 경찰도 모이고 주민도 모일 거다. 모여서 떠들기를 한 차례, 두 차례, 치르고 나면 방은 치워지고, 관심도 치워지고, 어느 날엔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손님이 깨끗한 얼굴로 이 방에 들어설 거다. 오늘 밤과는 이만 선을 긋고 내일로 뛰어넘으려고? 그래서 장거리 이동 시 도경계에 위치한 모텔은 소중하다. 이런 생각하기를 수차례, 내일을 위한 각오를 거듭하고 거듭하는. 이것은 너무나 살아 있는 사람의 운동이다. 이 방의 옆방에서도, 그 옆방에서도, 이보다 더한 옆방에서도 살아 있는 사람의 소리가 나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누군 살고 누군 죽는 게. 몇 초 사이에 불처럼 일어난 생각은 사그라들기를 다시 몇 초간. 모텔은 누워서 이런 생각 하기 좋다.

2022년 8월 5일 금요일

너와 함께 먹기 같은 것

국물이 끓고 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계란 하나와 함께.
서 있던 종업원이 길게 하품할 때쯤
“우리 이거 나눠 먹을까?
얼른 먹고 볶음밥 시킬까?”
나는 숟가락을 들고 이리저리 계란을 굴린다.
너는 계란을 좋아하고 국물에 빠진 계란은 더 좋아한다.
계란은 하얗고 동그란데 아주 동그란 것도 아니어서
“내 생각에 삶은…
계란이야,”
그래서 살아가는 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마다 너는 실없다고, 웃기지 말라고 한다)
어떻게 나눠 먹을 것인가? 어디를 찔러야 반으로 갈라질 것인가?
계란 하나를 앞에 놓고 우리는 생각에 잠긴다.
절반을 분간하기 어렵고 잘못 가르면 전체적으로 무너진다는 생각, 누르면 미끄러지다가도 찌르면 빗나간다는 생각, 생각은 부서지고 부스러진다. 바닥에 일부 잠기고 어느새 다 잠겨서 풀어져버린다.
종업원은 냄비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국물에 밥을 볶아 테이블로 가져온다. 아까의 계란은 흔적도 없고 날치알과 모짜렐라 치즈, 김 가루가 뿌려져 있다. 이미 먹은 것과 비슷하지만 분명 달라진 맛. 사실은 이 맛에 여길 온다. 볶음밥은 정말 맛있으니까.
“그렇게 세게 긁으시면 냄비 상해요,”
종업원의 주의를 듣기도 하지만 입속에 퍼지는 부드러운 압박이 좋다. 조금씩 삼키면 무언가 목 뒤로 넘어가는 것 같다.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여전히 뭔가 먹고 있는 것 같다.
“배 안 불러?”
웃으며 너는 묻는다.
맛있냐고, 혼자서 뭘 그렇게 먹냐고. 있으면 좀 같이 먹자고.
나는 빈 입을 보여주며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게 있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너는 자신의 질문을 숟가락 위에 올려놓는다.
눌러도 미끄러지지 않으며 찔러도 빗나가지 않는 표정으로.

2022년 6월 24일 금요일

(누구나 살면서 한 번씩 써보는) 애도일기 같은 것

텅 빈 우체통에서 요양원의 담요 냄새가 난다. 신발끈으로 만들어 맨 목줄과 아돌프 히틀러의 군인들처럼 조인 발목을 떠올린다. 혼자 저녁을 먹는 것처럼 먹먹하다. 내가 먹은 음식의 냄새가 이후와 더불어 좋지 않을지라도 풀처럼 애잔하게 붐비는 도심의 장례식장에 간다. 그동안 생활인가 심장인가 한 철을 나고 몸통이 소란하였다. 그 밖에 창문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어떤 선생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보다 잘 알려면 창틀을 보지 말고- 꾸준히 창밖을 보아야지-
그리운 목도리와 생활로 채운 우체통을 가진 집. 전령과 밀수꾼은 꾸준히 편지를 훔쳐간다. 부서진 그네는 어쩔 줄을 모르겠어. 사실은 창밖에서 아주 좋은 함성이 들린다. 누군가 죽었는데 무기가 없다. 담요를 덮어주고 싶다.

2022년 4월 19일 화요일

그 이상 같은 것

옥상에서 담배를 피운다. 여기 있으면 옆집 안테나에 앉은 새를 볼 수 있다. 이름은 모르겠다. 이름을 몰라서 새야, 라고 부르니 내 눈치를 본다. 자주 놀란다.
어제는 많은 비가 내렸다. 개방된 황동 파이프가 건물 아래로 물을 토하고 있다. 그때마다 이 일은 여름답다. 홀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조심히 다가가지 않으면 요란한 파이프가 빛나버리고 빛나는 파이프가 다해버린다.
나는 이만 실내로 들어선다. 새를 볼 수 없는 각도의 실내다. 무른 나뭇조각으로 만든 새 모형이 바닥에 놓여 있다. 습도 높은 이곳에서 약간은 축축해져 있고 그건 내 손바닥도 마찬가지. 이런 것들은 서로 껴안으려다 서먹해진다. 서먹한 것들은 수시로 서로의 손을 풀고. 그리고는 오래 멍한 새 모형이자 새를 찾지 않는 새 모형이다. 바깥에서 들리는 물소리. 어쩔 수 없이 쏟아지는 물소리가 있다.
물이 넘치면 실내는 침수되고 작은 것들은 다 떠내려간다. 사건에 대처할수록 소매가 젖겠지. 사라진 것을 보고서 사라진 것의 눈치를 본다. 이후로 조용해져 더할 나위 없을 때 여전히 남아 있는 새 모형은 이 집의 장식 그 이상이다.

2022년 3월 28일 월요일

동시출장 같은 것

빛이 들면 좋겠네. 빛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빛은 지금 산책을 나가고 없다.
대신 그는 오래 입은 옷들을 버리며 풀린 실밥의 개수와 처음 산 날짜를 헤아린다. 혼자 그린 달력에 처음 보는 기념일을 빨갛게 표시하고. 돌과 돌이 세게 부딪히듯이, 부딪혀 괜히 빛나듯이 걸으며 지나치며 아이들을 본다.
아이들은 볼에 불이 나 있다. 종이에 조그만 핀홀 뚫어 너무 밝은 태양빛 쏟아질 때마다 작게 나누어 본다. 나눌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지는 빛. 살고 있는 집에서 가장 멀리 떠났을 때 그도 짙은 빛을 가슴에 맞아본 적 있다. 일없이 매일 토마토를 한 개씩 먹는 사람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처음 가본 도시의 운동장을 달렸다.
지금은 익숙한 골목에서 사이좋게 나눌 수 있는 열망 대신에 혼자 소망하는 바를 말하기 위해 서성인다. 뒷골목으로 달려가는 아이, 뒤따라 달려가는 아이들. 달리는 데엔 이유가 없는데 누구를 위해서라도 생일 초를 피우면 여기야, 여기야, 금세 모이잖아요. 입 모아 바람 불잖아요. 속에서 나온 숨이 다할 때까지. 나도 그럴 수 있다면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아이들 뒤편에 서서 말했다.
잔설이 날리기 시작했고 그의 볼 위에서 눈 녹고 있었다. 녹는 눈에서 흰빛이 일었다. 우리는 걷고 있었고, 목적지까지 걷고 있었다. 그는 내가 보자고 하는 것을 보았고 나는 그가 생각하자 하는 것을 생각했다. 하다보니 여기까지 와 있었다.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부레옥잠 같은 것

아현시장의 화원을 찾았다. 주인에게 부레옥잠이 있냐고 물었다. 어제까지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고 했다. 찬바람이 불면 쉽게 죽는다고. 근처의 다른 화원들도 찾아가봤지만 다들 미련 없는 얼굴로 없어요 없습니다 말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연희동 화원에 전화를 걸었다. 어김없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덧붙이기를 종로의 수족관거리에 가보라고 했다. 거기 가면 물에 사는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고, 물에 사는 것을 위해 필요한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찾아가보니 가게마다 늘어놓은 고무통 속에 부레옥잠이 가득 있었다. 찬 기운에 멍든 것들 중에 가장 색이 밝고 둥근 것을 하나 골랐다. 점원은 물과 함께 투명한 비닐봉지에 그것을 담아주었다. 끝을 묶어주는 손이 너무 빨라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여기 처음 와본 셈이지만 그는 수백 번도 더 이걸 해봤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종일 오가며 본 일들을 떠올렸다. 아주 다른 생각을 하기엔 손에 든 것이 있어 조심스러웠다. “가슴에 안은 게 뭐예요,” 옆자리 노인이 물어보기에 나는 봉지 끝을 조금 풀었다. “보이시지요?” 묻자 그는 “아니,” 하며 조금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좀 더 보여주고 싶어졌다. 헤맨 일에 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아서 이번엔 내가 그의 얼굴쪽으로 봉지 든 손을 가까이 했다.

2022년 2월 17일 목요일

모자 같은 것

자영이는 모자의 안쪽을 자주 만진다. 거기에는 오늘 하루 자영이에게 일어난 일들이 조금 묻어 있다. 자영이는 모르는 사람 옆에 찾던 사람 있고 특히 그 사람 옆에 미운 사람도 있는 사무실에서 일한다. 사무실에는 빈츠나 마가렛트가 비치되어 있고 자영이는 그걸 가끔 먹는다. 자영이의 동료들은 점심마다 일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뒷마당에 찾아온 새를 보러 간다. 새를 말하고 새를 생각한다. 그러다 때가 되면 다시 자리로 돌아와 혼자 일한다. 그의 일을 모르고 나의 일을 말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영이의 동료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자영이. 자영이의 모자 안쪽에는 부드러운 소재가 덧대어 있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만지는 자영이. 자영이는 세상 따위는 현관 밖 문고리에 걸어두고 집 안의 토끼들에게 맛있는 아스파라거스만 주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남은 아스파라거스는 자기가 먹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겨울이 끝날 때쯤 새들은 날아간다. 새들은 사무실 옥상에 어두운 회합의 그림자를 새기고 날아가는데 그 대형은 자영이도 알고 당신도 아는 아주 일반적인 V자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자영이는 모자를 벗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이것을 흩뜨려 놓는다. 항상 이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한다. 자영이에게는 생활이 중요하고 이 모자는 자영이가 생활할 때 자주 쓰는 모자다. 동료들은 자영이가 모자를 쓸 때마다 “자영씨, 그 모자 참 잘 어울리네요”라고 말해준다.

2022년 2월 4일 금요일

1.5달마다 가는 미용실 같은 것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다녀왔다. 직원이 자주 들고 난다. 갈 때마다 진, 민희, 찬, 하는 이름의 새로운 담당 디자이너가 명함을 준다. 사람이 계속 바뀌고 코로나 시국 이후로 더 자주 바뀐다. 새로운 사람에게 머리를 맡길 때마다 어떻게 다듬으면 좋을지(ex. 귀 파주시고요, 투블럭은 9mm로, 겉 머리가 덮이도록, 숱 많이 쳐주세요 등등), 내 머리를 다룰 때 주의할 점(ex. 너무 짧게 자르면 귀 뒷머리가 잘 뻗쳐요.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지는 편이에요. 가르마는 이렇게, 저렇게 등등)을 설명한다. 이렇게 쓰고 나니 나는 요구사항이 많은 손님 같다. 매번 똑같은 설명을 하지만 디자이너에 따라 결과물은 다르다.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단 한 번도 똑같은 모양으로 머리를 자른 적이 없다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디자이너들 사이에 어떤 기본이 공유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 긴 머리가 아니라서 다 자를 때까지는 삼십 분 정도 걸린다. 여기에 또 다른 기본이 있다면 남자들보다 돈을 이삼천 원 더 많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쉽지만 직원에게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거길 간다. 이 정도가 나의 기본이다.

2022년 1월 14일 금요일

같은 것 같은

키가 작은 사과나무 그림을 보았다. 세 개의 그림으로 구성된 연작이다. 삼면화는 아니다. 그림 속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흰 셔츠를 입은, 조금 마른 듯한 남자가 들어 있다.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남자는 세 개의 그림 속에서 포즈와 방향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중앙의 사과나무는 그대로인데 주변에서 그 남자가 어떤 짓을 한다고 해도 그대로다. 나는 이 그림을 동료가 공유해준 jpeg 파일로 보았다. jpeg 파일에서는 열매 하나하나가 선명하지 않아서 더 많아 보인다. 남자조차 희미해서 아름다워 보인다. 우선 나는 이 그림을 엄마에게 전송해주고 싶다. 엄마는 예전에 집안에 그림을 걸어두게 된다면 그건 사과가 흐드러지게 열린 사과나무 그림이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남자가 있어도 괜찮은가? 아무래도... 하지만 그는 그림 속 사과나무에 유심하다. 엄마가 이 그림을 본다면 그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2022년 1월 8일 토요일

새 같은 것

새들은 멀리서만 봐도 되고 가까이 가면 알아서 날아간다. 거리두기가 되는 피사체. 이 새와 저 새를 자세히 식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너무 자세히 아는 건 내 영역이 아니다. 알지 않아도, 이해하지 않아도 되니 새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운 눈앞의 변화다. 그런데 그 변화에 어떤 방향이나 갈망 같은 것이 있어서, 이해는 할 수 없겠구나 체념하면서도 대체 왜 저쪽으로 가는지, 어떻게 다함께 지나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요즘 내가 새를 보는 곳은 거의 일터 마당이다. 언젠가 거기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머리 위에서 새 한 마리가 처음엔 큰 원을, 나중엔 점점 작은 원을 그리며 하강하는 걸 봤다. 동료는 아마도 황조롱이 같다고 했고 나도 그런 새를 TV에서 봤던 것 같다. 새가 움직이는 하늘 쪽을 보는데 또 다른 동료가 새 뒤로 보이는 게 무지개 아니냐고 했고 자세히 보니 그건 정말 색들 사이에 경계선이 희미한 무지개였다. 배경에 아직 풀어지지 않은 비구름이 있었다. 

일상에서 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새는 자주 내 시각을 이끈다. 내가 무엇을 볼지 새가 결정한다. 새가 움직이면 내 눈이 새를 따라가니까. 그러다 새는 날아가고 새가 지나간 자리나 그 주변을 바라보던 내 시각이 거기에 남는다. 이후의 행동은 새 때문에 본 것에 대한 일종의 반응이다. 지금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것도 사후 반응. 

하고 있으니 지나간 시간들이 날아가는 철새처럼 느껴진다. 나는 철새들의 이동을 늘 가벼운 마음으로 본다.

2022년 1월 5일 수요일

김밥 같은 것

일터에서 점심에 다같이 김밥을 먹었다. 모두 참치김밥을 주문했는데 실은 서로 다른 김밥을 먹었다. 한 사람은 햄을 빼고 또 한 사람은 단무지를 빼고 나는 오이를 뺐으니까. 주문받는 김밥천국 직원도 피곤했을 것이다. 김밥 한 줄도 그대로 먹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배달 온 김밥 포장 위에 ‘햄X’ ‘단무지X’ ‘오이X’ 같은 옵션을 빨간 매직으로 적어놓은 걸 보고 순간 섬찟했다.

대선 주자들도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2재명이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을 선언하자 천만 탈모인들이 “2재명 뽑지 말고 심자”며 환호하는 한편 다른 쪽에선 “씨발 탈모가 죽을 병이냐” “2재명 너는 풍성충이잖냐” 하고 있다.

아무튼 김밥 포장을 연필깎이 돌리듯 세로로 뜯어서 한 칸 한 칸 먹고 있는 나를 보고 동료가 나무젓가락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내가 쓰지 않겠다고 고개를 젓자 그는 “마음이 바뀌면” 쓰라고 했다.

사실 “마음이 바뀌면” 못할 게 없다. 젓가락 써서 김밥을 먹는 게 뭐 대수라고. 2재명이나 윤석10조차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한테 젓가락도 갖다주고. 친절을 베풀어주고. 사실은 아주 고마운 일인데. 나는 쓰레기가 나오는 게 싫다.

김밥을 다 먹고 호일을 손바닥으로 몇 번 밀었더니 아주 작은 공 모양이 되었다. 손끝으로 꾹꾹 눌러서 더 단단하고 작은 공으로 만들어버렸다. 기름이 묻어 약간 반질거리는구나. 속으로 생각하곤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점심시간 끝.

그런데 “마음이 바뀌면”이라고 여지를 준 동료에게는 정말 고맙다. 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여유나 유연함을 갖고 싶었다. 며칠 뒤에도 선택의 여지 없이 김밥을 먹을 텐데, 그때는 다른 생각을 하고 싶다. 그럴 수 있을 만큼 내가 유연하다면.

2022년 1월 3일 월요일

럭비티 같은 것

(스스로 남자라고 믿고 있는) 남자들은 이 옷을 바지춤에 넣어 입는다. 드러난 허리선이 제법 꼿꼿해 보인다. 물론 가능한 체형을 가진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진술이다. 럭비티 안에는 다른 셔츠를 겹쳐 입을 수 있다. 색을 맞춰 예쁜 스카프를 목에 감으면 포인트가 된다. 내가 이걸 입을 수 있는 몸이라면 혹은 내가 이걸 입어도 괜찮은 몸이라면 하고 가정하면서 상상 속의 내 몸 위에 때론 초록색의 때론 노란색 줄무늬의 럭비티를 입혀본다. 적당한 중량감의 옷감, 그래서 수직으로 탁 떨어지는 그런 옷. 대개 비슷해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디자인의 럭비티들을 구경하다가 이걸 입기 위해선 내 몸에 얼마나 많은 물리적 조치가 필요한지 꼽아보게 된다. 가슴과 엉덩이를 줄이는 대신 뭘 해야 할까. 내가 남자라면 더 구체적으로 잘 알 텐데? Take IVY 하려는 게 아니라 이런 매혹적인 사물(적어도 내겐)이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걸 너무 갖고 싶어서 덩달아 내가 원하는 몸 내가 원하는 성별, 운동성 같은 걸 떠올려보게 되는 자연스러운 수순. 웃통 벗고 운동하는 남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는데 사실 남자들이 자유롭게 웃통을 벗을 수 있다는 게 더 부러운 거 같다.

2021년 12월 26일 일요일

마포 공덕 같은 것

한쪽에는 BAR 오빠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BAR 나쁜 여자가 있다. 교차로의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건너편에 서 있으면 두 가게의 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이에는 마포 정대포가 있고 문어 골뱅이를 파는 안줏집이 있다. 잘 보이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소심해 보이는 Classic Bar 나는...도 있다. 이 간판들이 맞닿아 있는 상황이 꼭 간판들만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이 앞으로 택시 여러 대가 지나간다. 고급 외제 승용차들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따릉이가 지나간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건너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다가온다. 흐름이 점점 얼어붙었다가 소리가 다 지나가자 다시 활발하게 풀린다. 이 속에서 함께 움직이다보니 드디어 나도 저쪽에 나를 놓고 오기라도 한 듯이 길을 다 건너버렸다. 다음에는 좀 더 늦은 밤에 와 봐야겠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물론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고 싶다.

2021년 12월 2일 목요일

~같은 것

아름다운 문장을 보면 사람들은 시 같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는 시를 잘 모른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여러 번 들었고 매번 무방비 상태에서 들었다. 아마 사람들에게 시 같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물어본다면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다. 아니면 그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어떤 긴장이 숨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사진을 찍을 줄 알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찍은 거의 모든 사진의 초점은 미묘하게 빗나가 있다. 자동 흔들림 방지 기능을 켜 놓아도 마찬가지다. 흔들린 사진은 흔들린 대로 좋다. 이미지가 흔들리면 앉아 있던 사람이 점프를 하고 걷고 있던 사람이 날아간다. 흔들린 사진 속에서 사람들은 잘 고정되지 않는다. 액체 비슷한 것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거나 기체 비슷한 것이 되어 떠다니고 있다. 더구나 배경 속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 화분조차 깨지지 않은 채로 일그러져 있다. 한줌의 흙도 흘리지 않은 채 변형되어 있다. 그 안에서 모양이 달라진 식물이 살아 있을 뿐이다. 
이런 일과 비슷할까? 

자주 사람들은 시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시를 찾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소설이나 만화나 그 밖의 것을 읽는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문장을 보면 시 같다고 한다. 사람들은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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