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7일 수요일

[25호 서신]

*26년도 하계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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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위생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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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것을 공유하기
- 충분한 휴식


*운영 10년차까지 반년 앞으로, 현황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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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사항

- 공용태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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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6년 6월 15일 월요일

쥐 마술 ➊

“내가 뭘 데려왔는지 봐.”

펜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이제 막 첫 대사를 쓰려던 참이었다. 펜촉 끝에서 잉크가 번져 작은 검은 별이 되었다. 루틀리지는 그 별을 잠시 노려보았다. 직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실이 맥없이 탁 풀렸다. 또 망했군. 하긴 늘 망한다. 게친이 망칠 빌미를 주는 건지, 망하는 핑계를 게친에게서 찾는 건지. 아마추어 극작가인 그는 늘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는 의자를 뒤로 물리며 한숨과 함께 일어선 다음 쏘아붙일 말을 고르며 눈을 잔뜩 조였다. 그 눈으로 문간에 서 있는 아이가 들어왔다. 덥수룩하게 엉킨 머리가 작은 얼굴의 절반을 덮었고, 그 틈으로 두 눈만 지나치게 컸다. 맨발 밑엔 흙인지 때인지 모를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야위었는데도 말랐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웬 쥐 한 마리가 서 있어? 아이를 둘이나 키워보았으니 나이는 대충 가늠이 되었다. 여덟 살, 아니 아홉 살 정도 됐겠네.

“잠깐 이리 와봐, 게친.”

게친이 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어깨에 얹혀 있던 한 손을 살포시 떼면서. 게친이 다가오는 것은 바깥이 다가오는 일과 같았다. 그녀한테는 항상 자신과 다른 냄새, 바깥 냄새가 났으니까. 신선한 풀과 흙, 아무것도 한 곳에 고이지 않도록 바람이 몸 이곳저곳을 두드리고 지나간 냄새. 내 옆에 있으면 게친도 나의 냄새를 맡겠지.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사람의 조용하고 눅눅한 냄새. 닫힌 방과 식은 찻잔과 오래 접어둔 담요 같은 냄새. 그러나 게친은 섬세하지 않은 편이어서, 들리고 보이고 만져지는 것 이외에는 무심했다. 그건 흠도 아니고 단점도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게친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루틀리지를 내려다보았다. 잘했지? 미소는 하강하며 그런 말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머리 하나 정도로 키 차이가 났다.

“약속했잖아.” 루틀리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화를 내봤자 소용없음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맡을 생각은 아니지?” 그 말의 그림자에서 자식이라는 단어가 부풀어올라 두 사람 사이 찬 공기 속에 풍선처럼 떠 있었다. 웃음은 여전히 게친 입가에 머물렀지만 눈에서는 사라졌다. 당혹감과 함께 떠나간 것이다. 게친은 몸을 돌려 문간의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든 달아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한 발을 뒤로 살짝 빼고 있는 저 아이, 자신이 주워온 저 아이에게.

“약속 같은 거 안 했어.”

“했어.”

“솔직히 기억 잘 안 나.”

“게친.”

“버리고 왔어야 한다는 거야?”

“구하지 말자는 게 아냐. 먹이고 재워서 다른 마술사를 찾아줘. 그런데 입양은 안 돼.”

게친이 문간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고야. 널 소개할 차례야.” 아이는 화들짝 놀라 주춤하다가, 이내 허둥지둥 달려와 게친 뒤로 숨었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얼굴을 빼꼼 내밀어 루틀리지를 훔쳐보는 것이었다. 정찰을 하듯. 아이가 가까워지자 루틀리지는 불만스럽게 입을 닥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뭐니?”

루틀리지가 물었다. 고야는 대답하는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게친을 올려다 보았다.

“고야라고 했잖아.”

“그래, 고야. 성은?”

“프리올.”

“그래, 프리올이구나. 그런데 게친, 애가 말하도록 내버려두면 안 돼?”

“시간 아깝잖아. 할 게 많아. 가르쳐 줄 것도 많고, 밥도 먹여야 돼.”

루틀리지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주무르다가 말했다.

“그래, 고야 프리올. 좋은 이름이네. 아무튼 우린 널 보살펴 줄 거야. 그러니까 편안하게 있어도 돼. 네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말이야.”

“앞으로 항상.”

“적어도 몇 달은. 몇 살이니?”

열한 살이라는 대답에 루틀리지는 깜짝 놀랐다.

“열한 살이라고? 키가 굉장히 작구나.”

루틀리지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긁으며 말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감안하더라도 작아. 손을 내밀어보렴. 손가락을 볼 테니까.”

잠깐이었지만 루틀리지는 고야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읽어냈다. 손을 내민 고야는 시선을 내렸다. 손도 아니고 바닥도 아닌, 그보다 아래에 있을 밑바닥을 바라보듯. 그 사이 루틀리지가 고야의 손을 들고 살폈다. 하나가 달랐다. 앙금이 내려앉은 왼손 약지가 납처럼 창백한 하얀색으로 변해있었다. 죽은 손가락처럼 차가웠다. 그도 어렸을 때 그랬고 누군가에게 거두어졌다. 이런 일은 겪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설명해줄게. 너도 이제 우리가 될 테니까.” 고야가 눈을 깜박였다. “마술사, 우리가 된다는 것은 마술사가 된다는 거야.” 그래, 마술사. 세계에 칼집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 게친이 왼손 약지를 고야에게 보여줬다. 오래 손때를 먹어 거뭇하게 바랜 은이 정확히 약지를 반으로 나누는 곳에 끼워져 있었다.

“네 손가락을 잘라낼 거야.” 게친이 성급하게 말했다. 고야가 처음으로 루틀리지를 정면으로 올려다봤다.

2026년 6월 11일 목요일

개, 오각별, 수도원 ❷

소렌샤의 눈썹이 올라갔다. 놀란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고더린은 겁을 주는 법을 알았다. 손목은 좋은 곳이었다. 잡히면 사람은 대개 같은 짓을 한다. 숨을 멈추고, 어깨를 움츠리고, 반대 손이 저도 모르게 떠오르고, 무엇보다 잡힌 팔이 뒤로 당겨진다. 빠져나가려는 게 아니라, 몸이 본능적으로 위협에서 물러나려는 것이다. 그는 그 움찔거림을 손바닥으로 읽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 소렌샤의 팔은 당겨지지 않았다. 비스듬히 꺾어 힘을 주고 있는데, 고통스러울 텐데 움직이지 않았다. 엄지 밑에서 맥이 잡혔다. 빠르지 않았다. 느린 편이었다. 한 박자, 또 한 박자.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의 맥이었다.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이대로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데 그 앙상한 것이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손아귀 안에서 조금도 떨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그의 손이 아니라 그의 눈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입꼬리가 한쪽만, 천천히 올라갔다.

고더린은 묘한 생기가 피어오른 소렌샤의 눈에서 성별과 체격이 아무런 변수도 될 수 없음을 읽었다. 자신이 지금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더 크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곰이나 사자, 호랑이라 하더라도 소렌샤는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개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한 마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또 한 마리는 뒷발로 귀 뒤를 긁다 말고 다시 머리를 발 위에 얹었다. 제 주인이 낯선 사내에게 손목을 잡혔는데도, 일곱 마리 중 누구 하나 일어서지 않았다.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그가 남성이기 때문에 겪는 훼손이었다. 비루한 거였다. 고더린은 언제나 거리낌 없이 내밀고 이용해오던, 높은 확률로 이득을 가져다 주던 자신의 남성됨이 분개하는 것을 느꼈다.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라는 사실을 밑천처럼 굴려온 남자였으니까. 가장 낮은 남자조차 거저 받는 남자를.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 패는 좋은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이 여자 앞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소렌샤는 고더린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에는 경계도 감탄도, 하다못해 혐오도 없었다. 소렌샤가 그를 보는 눈은, 작고 어설픈 것이 제 딴엔 사뭇 진지하게 구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런 눈이었다. 신발 끈을 물고 늘어지는 강아지를 볼 때의 눈. 위협이 아니라 구경거리를 볼 때의 눈. 고더린은 손을 슬쩍 더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자신보다 강한 남자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 왜 자신보다 강한 여자 앞에서는 이토록 불편해지는가? 

고더린은 소렌샤의 손목을 천천히 놓고 뒤로 물러나며, 펼친 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올렸다. 소렌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방금 뭐 한 거예요? 지금은 또 뭐하는 거고요?” 밀빛 머리칼이 찰랑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허리춤의 장검이 살짝 흔들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고더린이 말했다. “나한테 줘요.” 애꿎은 개 한 마리의 꼬리를 밟았고 봉변을 당한 개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짖었다. “뭘 달라는 건데요? 정확히 말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고더린이 포도주라고 대답하자 소렌샤는 의아하다는 듯, 열린 나무 선반 안의 짙은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포도주?”

저걸 저렇게 보관하다니! 고더린이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채 닿기도 전에 개 한 마리가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떠밀듯이가 아니라, 우연히 거기 멈춰 선 것처럼 태연하게. 고더린은 손을 거두고 반대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소렌샤가 빙그르르 돌았다. 맨발이 바닥을 쓸며 도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그녀는 선반과 그 사이에, 병을 등 뒤로 감춘 채 서 있었다. 고더린이 왼쪽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이쪽?” 그녀가 같은 박자로 따라 돌았다. 한 손밖에 없는 남자가, 한 손으로 가능한 모든 각도를 시도했다. 위로, 옆으로, 어깨 너머로. 그때마다 소렌샤는 손을 뻗기도 전에 거기 없었다. 개들이 거들었다. 한 마리가 고더린의 발치에 드러눕고, 한 마리가 무릎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며, 그가 디디려는 자리를 매번 한 발 먼저 차지했다. 다같이 추는 춤이었다. 소렌샤만 스텝을 아는 춤. 돌 때마다 밀빛 머리칼이 한 박자 늦게 따라 돌았고, 고더린이 헛손질을 할수록 그녀의 눈은 더 환해졌다. 마침내 고더린이 남은 무게를 전부 실어 소렌샤에게로 파고들었다. 소렌샤는 한 걸음 물러서며 그 기세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가 균형을 되찾기도 전에 포도주를 선반에 다시 집어넣고 탁, 미닫이문을 닫았다. 그녀의 손바닥 밑에서 춤의 마지막 박자가 정확하게 끝났다.

소렌샤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빙그레 웃었다.

“술이랑 여자 앞에서 난폭해진다는 건, 당신이 최악의 남자라는 뜻이겠네요.”

“최악이라뇨. 한 병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어서. 무심코.”

“무심코? 당신은 무심코 여자를 위협하나요?”

“잠깐 잡았다가 놓은 건데요, 뭐.”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아픈데요. 손목이 얼얼해요. 자국까지 남았는걸요.”

“저게 나한테 중요한 거라서요.”

“포도주가? 다른 것들보다 더?”

“항상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판에 박힌 말을 하는군요.”

“사과하고 싶습니다.”

“하시면 될 일 아닌가요? 왜 굳이 그런 말을 꺼내시는 거죠?”

그녀는 짖궂게 말했고 장난스러웠다.

“죄송합니다. 무례했어요.”

고더린은 감정을 억누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포도주는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소렌샤가 머리를 쳐들어 깔깔깔 웃고는, 얼굴을 찡그린 뒤 먼지를 털듯 머릴 흔들었다.

“원하는 걸 얻어내는 방법을 전혀 모르시네. 간절하다는 걸 알면 주고 싶지 않게 되잖아요. 게다가 난 이걸 나누려고 했었다고요.”

“몇 모금을 원하는 게 아니라요. 통째로 한 병을 원하는 겁니다.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않은 온전한 한 병을.”

“왜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한 병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요?”

소렌샤가 두 걸음, 세 걸음 고더린에게 다가갔다. 막힘없는 걸음이었다. 소렌샤는 머리칼 끝을 빙빙 돌리던 손가락을 앞으로 뻗어, 고더린의 가슴팍을 꾹 누르며 말했다.

“싫다면 어쩔 건데요?”

한 번, 두 번, 세 번째로 손가락 끝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꾸욱 눌렀다. “화났어요?” 그 말이 귓가에 들리는 순간 고더린의 남은 손은 이미 옆구리 뒤로 가 있었다.

왜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았지?

지레 겁먹고 있었던 거 아냐? 그래서 얼마나 강한 건데? 오각별 마술사라는 게?

물론 마술은 무섭지. 하지만 그건 거리가 있을 때 얘기야.

이렇게 숨이 닿게 붙어버리면 결국 몸이다. 내가 위일 게 분명하잖아.

게다가 남자도 아니고.

고더린의 눈이 소렌샤의 가는 손목으로 내려갔다.

이 여자가 실제로 나보다 강하다면 나는 약자야.

약자가 기습 한 번 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어디 피해봐라.

고더린은 단숨에 자세를 낮추고 옆구리 뒤 단검을 챘다. 잡은 즉시 빼 올려 벴다. 쇄골 아래가 길게 열릴 궤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엉뚱하게도 방금 그 소동이 떠올랐다. 선반을 두고 투닥거리던, 춤을 추는 것 같았던 그 소동이. 그 순간 고더린은 자기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저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제발 이 여자가, 정말로 무시무시하게 강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칼이 닿지 않기를 바랐다. 손이 무거워졌다.

“아아악!”

손이 무언가에 이끌려 아래로 떨어졌다. 치아가 살을 파고들어 짓이기는 순간, 손목이 뒤틀리며 저절로 경련이 일었고, 통증이 팔 전체로 퍼졌다. 고더린은 고통에 경망스럽게 소리질렀다. 그가 쥐던 것은 온데간데없고 검은 개 한 마리가 그의 손을 콱 문 채 노려보고 있었다. 곧 이빨을 얻은 주방이 달려들었다. 먼지에 파묻힌 채 바닥에 떨어져 있던 포크가 먼저였다. 다음은 철솥. 주걱이, 국자가, 깨진 사발과 벽에 걸린 냄비들이 차례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짖어대며 달려들었다. 성화가 그려진 창문마저, 지조 없이 개로 화해 고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슴팍을 밀어 그를 자빠뜨렸고, 등에 차가운 돌바닥이 닿았고, 그 위로 주방 한 채만큼의 개가 실렸다. 개들은 턱이 들어가는 모든 곳을 끊어내기 직전까지 문 채, 휘파람 한 번이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도록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악의 남자 맞네요.” 소렌샤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며 걸어왔다.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방 하나를 짐승 소굴로 바꿔놓고도, 컵에 물 한 잔 따른 사람처럼.

“방금 이걸로 수명이 꽤 줄었어요.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갑자기 오한이 서렸다. 고더린은 떨지 않았다. 떨기에는 너무 많은 송곳이 몸에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소렌샤는 쪼그려 앉아 고더린의 머리칼을 쓸었다. "당신 같은 남자들은 그냥 칼을 휘두르면 된다고 생각하나 봐요. 방금은 정말 좀 그랬어요.” 손이 머리칼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서늘해진 방 안에서 그 손만 따뜻했다.

고더린이 고통으로 끙끙대며 말했다.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전술적인 얘기죠.”

“그게 뭔데요?”

“여자 손목을 함부로 잡고 비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고더린은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수명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일 년 남짓. 왜 물어요?”

“남을지 말지 계산해야 하니까.”

소렌샤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내가 잠든 사이 날 죽이고 포도주를 훔쳐가려고요?”

“그러면 포도주밖에 안 남잖습니까.”

소렌샤는 고더린을 빤히 바라봤다.

“어차피 못할 거예요. 난 잠에 들지 않으니까. 뇌 속에 마술 찌꺼기가 너무 많거든요.”

개들의 턱힘이 천천히 풀렸다. 살을 붙잡고 있던 송곳니가 하나둘, 미련 없이 물러났다. 그를 짓누르던 무게가 걷혔지만 개들은 흩어지는 대신 소렌샤에게로 모였다. 한 마리가 일어나 소렌샤의 무릎께에 턱을 괴었고, 또 한 마리가 등 뒤로 몸을 말았다. 사병들이 도열하듯 개들은 그녀를 둘러 앉았다. 고더린의 입김이 허옇게 떠올랐다 흩어졌다. 그러나 이 추위의 한가운데 개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 년 뒤에 죽을 여자는 조금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개들의 군주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저런.”

고더린은 일어서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바닥은 차갑고 딱딱했고, 그는 아직 거기 누워 있었으며, 굴욕적이지 않았다.

“포도주가 그렇게 좋아요?”

소렌샤는 한참 고더린을 보았다. 서늘한 눈으로. 죽이고 나면 이후의 시간을 감당할 수 없겠지. 게다가 이 남자는 남을지 말지 계산한다고 말했다. 그녀도 계산을 했다. 죽임과 쓰임새에 관한.

“줄게요, 포도주.”

고더린의 귀가 곤두섰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그녀는 무릎의 개를 한 손으로 쓸면서, 다른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눌렀다. 두통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개들이 그녀 쪽으로 조금 더 붙었다.

“남편이 필요해요. 개 같은 남편.”

그녀가 옅게 웃었다.

“오라면 오고, 공을 던지면 물어오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나를 돌보기 위해 나를 섬기는 남편이죠.”

고더린이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미간을 찡그리는 동안,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어갔다.

“난 내 삶에 완전히 지쳤어요. 할 수 있는 건 할 만큼 했고, 이제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어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요. 그러니까 일 년간 내 수발을 들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떠오고, 내 얼굴을 닦고, 발을 씻겨요. 끼니를 차리고, 불을 꺼뜨리지 말고, 장작이 떨어지면 패다 놓고. 빨래를 하고, 마르면 개어요. 이 수도원을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어요.”

소렌샤의 목소리에 다시 희미한 장난기가 생겨났다.

“머리가 자주 아파요. 아프면 관자놀이를 눌러주고, 목덜미를 주물러요. 세게 말고, 적당히. 어디가 시원한지는 하다 보면 알게 돼요. 머리는 매일 빗겨야 해요. 엉키지 않게, 끝부터 천천히. 약초를 달이는 법도 가르쳐줄게요. 불 조절을 잘못하면 쓴맛만 나니까 옆에서 지키고 서서 저어요. 손톱도 깎아주고. 내가 부르면 와요. 날 심심하게 두지 마요. 당신은 재밌어야 해요. 매일. 무슨 수를 써서든. 노래를 하든, 이야기를 지어내든, 우스운 표정을 짓든. 내가 웃으면 잘하고 있는 거고 시들해 보이면 더 애써야 하는 거예요. 내가 듣기 싫은 소리는 하지 말고,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서 해요. 비위를 맞추라는 거예요. 새장 속 종달새처럼. 그리고 당신 때문에 생긴 이 아이들 말인데요.”

소렌샤가 서른 마리 남짓한 개들을 둘러보았다.

“밥을 주고, 씻기고, 매일 산책시켜요. 한 마리도 빠뜨리지 말고. 싸우면 말려요. 엉킨 털을 빗기고,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줘요. 이름을 붙이고 외워요. 서른 마리 다. 이름을 다 정했으면 그때부터 내게 말해줘요. 오늘은 어떤 녀석이 무슨 말썽을 부렸는지.”

그녀는 등을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긴 목록을 읊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 듯했다.

“당신이 좀 멍청하고 사악하긴 하지만, 이 정도 얘기했으면 알아들을 것 같네요. 내가 죽으면, 선반을 열어 포도주를 가져가요.”

고더린은 누운 채로 천장을 보았다. 죽어가는 여자의 수발 일 년, 짐승 서른 마리의 똥오줌, 그 끝에 포도주 한 병. 세상 누구도 이걸 성공한 강도짓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더린은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부탁했는데 당신이 아직 안 해준 게 하나 있죠.”

“세상 돌아가는 얘기?”

소렌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동안 개들밖에 없었거든요.”


*


그날부터 고더린의 남은 손은 평생 해본 적 없는 일들을 날마다 했다. 해도 표가 나지 않고, 안 하면 금세 티가 나는 일들이었다. 물을 길었고, 장작을 팼고, 서른 개의 이름을 지어내고 외웠다. 거미줄을 치우고, 방과 복도의 먼지를 털었다. 식탁을 닦았다. 약초를 태우면 다시 달였고,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기면 손등을 맞았다. 소렌샤가 씻는 것을 도왔고 발을 닦아주었으며 식사를 준비했다. 밤마다 전쟁과 포도 얘기를 해줬다.그녀는 끝내 잠들지 않았고,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말이 적어졌다.

일 년 후 고더린은 포도주 한 병을 쥐고 수도원을 나왔다. 굴뚝에서는 더 이상 연기가 나지 않았지만, 장작은 아직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강도였고, 그 점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턱을 넘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멈춰 수도원을 돌아봤다.

개들은 숲으로 갔다. 이름을 하나씩 가진 채로.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다. 그런대로 살 수 있었다.

2026년 6월 10일 수요일

음모론 교정

언젠가 배우자님이 이런 아이디어를 전해준 적이 있다. 음모론 속에 ‘백신-허구’를 섞어 음모론이 음모론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교정하는 시리즈를 써보면 어떨까? 음모론의 문법으로 음모론을 해킹한다는 것이다. “백신을 맞은 뒤 50분 내로 미지근한 물 150cc를 마시면 정부의 주파수 조종을 예방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처럼. 아주 넓은 의미에서는 그런 것도 교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바른 모양으로 인쇄만 되면 그만’이다?

음모론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향한 픽션의 역류다. 다 그렇듯 메이저가 있고 마이너가 있다. 만약 우리가 진실로 음모론에 개입해야 한다면 누구나 쉽게 욕할 수 있는 마이너한 것보다는 그 뭔가를 함께 욕하고 있는 최대 다수가 신봉하는 메이저한 것에 대해서부터 개입하는 쪽이 더 끌리기 마련이다(‘多와 少’라는 긴장감으로부터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진실의 속성상 그렇다). 음모론을 중심에 두고 말해 보자. 픽션이란 ‘소화된’ 음모론이다. 어떤 음모론들이 문학화되지 못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뭔가를, 뭔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이렇게 막돼먹고 무책임할 리가 없다는 생각... 이 세계가 합리로써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합리가 독점 가능하다는 생각, 그런데 그 합리가 적들의 것이라는 생각... ‘적들’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재하는 적들. 음모론은 이해의 한계선에서 받아들일 수 없음이라는 밧줄을 붙잡고 미지로 뛰어내림이다. 미지의 적들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적들을 향해.

현시대 최고의 메이저 음모론을 꼽자면 단연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와 역사의 최후 형태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적은 바로 자본주의의 종료다. 자본주의라는 음모론의 결론은 자기파괴로 흐른다. 솔직히 자본주의 얘기는 진짜 지겹다. 그리고 그 지겨움까지가 자본주의 음모론을 구성한다. 온당하게 말해, 이 자본주의라는 음모론은 이미 너무 예전에 파산했는데도 너무 오래 작동 중이라는 점에서, 또한 多와 少라는 개념 그 자체를 다루는 음모론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시대 음모론들을 자본주의의 빗나간 파훼로서 키우는 양분이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적극적으로 음모론들을 독려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음모의 현현인 지배층이다. 더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지배층은 음모론을 자동화·상설화·산업화하는 데 이르렀다. 한 번 더 공정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지배층들마저 자신들의 음모론에, 과대망상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 조잡스런 사실 조각만을 던져주며 그 파편들을 음모론의 형태로 갖고 놀도록 장려하는 피투성이 먹이 공급 장치를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고 들어앉은 셈이다.

좀 갑작스러운 것 같지만 사주팔자 얘기를 해보자. 한국에서 사주팔자가 유행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 어째 갈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그에 맞춰 AI들도 아주 대단한 사주쟁이들이 되어 가고 있다. 얼마만큼의 불안이 꾸준히 세대를 이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기술봉건주의의 신자유노예들에게 제공되어야만 하는 경험일 것이다. 시험 삼아 사주를 교정해 보면 어떨까? 적절한 자리를 주기 위해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사주는 [문학]이다. 그것은 ‘캐해생성’이라는 장르의 중세문학이다. “재미로만 보라”는 말이 그 뜻이며, “어? 이거 내 얘긴데”가 바로 그 뜻(문학)이다. 한편 사주의 본이 되는 주역은 [세계관집]이라는 장르의 고대문학이다. 따라서 주역, 오행, 사주, 풍수, 수상, 작명 등등으로 이어지는 이 극동아문학복합체는 일종의 TRPG 룰북으로 보면 정확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타로는 [상징학]이다. 착상 제공에 특화되어 있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미술비평]이다. 와꾸에 대한 판단이 와꾸의 의미를 만든다. 신점은 [비과학적 상담심리학]이다. 상담가가 의학무당이듯 그렇다. 과학은 대체 어디에? 그간 나는 “별자리 성격이 바로 [과학]”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 왔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아기로서 1년 동안 겪는 기후와의 상호작용이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아기를 키워 보니 역시 확신이 든다. 색깔을 구분하고 눈을 마주치고 옹알이를 하고 몸을 뒤집는 그 모든 정해진 발달단계와 계절 사이가 무관할 리 없다! 물론 남반구의 경우 반대로 작동하며, 고위도나 저위도 지역의 경우에도 잘 맞지 않는다. ‘심리점성술(Psychological astrology)’로도 불리는 이 별자리 성격이 70년대부터 태동했다는 것으로 보아 냉난방 사정이 달라진 요즘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고, 기후에 대한 문화권별 계층별 상호작용 방식에서 기인하는 차이도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나? 거기다 기후위기까지 고려하면... 그러니까 애초에 행성들의 위치 같은 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아다리가 맞은 것뿐. 물론 농담이다.

이 순간 가장 핫한 음모론은 부정선거다. 자본주의 위기 가운데 민주주의는 위협당한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한 명의 인간 키워내기를 수없이 실패시키면서부터다. 부정선거 음모론의 밑에는 자본주의-실패에 대한 공포감이 자리한다. 그게 민주주의든 중공이든 가정이든 하나님이든 인생이든 뭐든... 그런 면에서 사주팔자와 별반 다르지도 않다. 위정자들과 자본가들이 점술이나 종교에 자꾸 기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여러 형태의 ‘뽕맛’ 산업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황과 최근 이룩된 다중-대량-소통 환경에서 피해망상과 편집증, 증오가 증폭·집단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중-대량-소통을 일으키거나 다뤄야만 했던 어떤 역사적 운동이 안 그랬겠냐마는, 현대의 특징은 방향이 반대라는 점, 즉 대중의 주된 경험 세계를 다중-대량-소통 자체가 대체하려 든다는 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첫째로, ‘믿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신화적 금언이 악몽판으로 도래한다. 집단은 그 외부로부터 믿어지는 바로 그것이 된다.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서로가 서로를 만져주고 만들어주면서다. 극우파가 되고 공산당이 된다. 부정선거나 전체주의 같은 것도? 서로의 한마디에 대해 한마디를 더하면서, 서로로부터 벽돌을 하나씩 빼주면서 와르르 도래한다. 일테면 부정한 것과 부실한 것을 서로가 구분하지 않게 되면서다. 부실하기 때문에 부정하고,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실하지 않다. 부정하다고 하기 때문에 부실함은 눈감고, 부정하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부실함은 눈감는다. 각자에게 가장 유리한 뭔가를 눈에 불을 켜 찾아내고 집요하게 편집한다. 누군가 뭔가를, 어쩌면 자신을 제발 좀 해쳐주기를, 간절히 은연히 여럿이 바라면서다. 자유주의자가 파시스트 되고 리버럴리스트가 전체주의자 된다. 다름 아닌 적들을 위해서, 적들에 대한 증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면서다. 자신들이 무엇이 되는지는 아무 상관 없이, ‘스스로 완전히 정당하게’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는 둘째로, 모든 진실한 것의 실체인 표현 불가능성이 크게 위협받는다. 진실은 속성상 신비로운 것이다. 아직 표현되지 않은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신비다. 신비는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뭔가, 표현으로부터 소외된 뭔가다. 많은 것이 적은 것 되고 적은 것이 많은 것 되도록 이끄는, 이 신비는 오늘날 억압당한다. 강제된 침묵이나 마찬가지인 너무 많은 말들 속에서다. 아무것도 ‘되질’ 않는다. 나쁜 일들만, 가장 다행인 경우라도 쓸데없는 일들만 일어난다. 문학은 표현으로부터의 소외를 공전하며 진실을 양각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반면, 읽기의 총체적 실패인 음모론은 운명을 독점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우스움을 향해 대가리부터 돌진한다. 망상적 진지함으로, 자포자기의 도박 유희로, 둘의 뒤섞임으로. 과연 우리가 어떤 백신-허구를 투입할 수 있을까? 증오에 대한 이 뜨거운 진짜 사랑을 버릴 수 있을까? 거짓으로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진실은 거짓을 이기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극우파의 지구적 대두는 진정한 행성사회주의 도래를 앞당기려는 자연의 설계이고 공작이다. 그것은 서기로 따지면 1807년 또는 1812년부터 시작되었다.

2026년 6월 8일 월요일

까마귀들과의 대화

까마귀 롯테: 이곳은 어두워. 비밀을 간직한 곳이군. 주위를 보면 나무들, 넝쿨들이 서로 얽혀 있어. 난 잠자야 하는데. 이곳은 너무 어두워서 걱정이 돼. 잠들면 다시 못 일어나는 게 아닐까?

까마귀 나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걸. 왜냐하면 너는 지금도 까만 네 날개로써 눈 앞을 가리고 있잖아. 시간이 밤이거나, 이곳이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라서 어두운 게 아냐. 너는 스스로 네 밝은 세상을 가려버린 다음 날개를 치우는 것을 깜빡했을 뿐이지.

까마귀 믄지에: 졸려워. 그리고 외롭다.

에피: 이봐들, 내가 보여?

까마귀 롯테: 넌 인간인가?

에피: 그래. 내가 보이는가 보구나.

까마귀 롯테: 저 말을 듣고 내 날개를 치웠어도 어둡군. 세계가 잘 보이지 않아. 단지 목소리가 나는 위치로 짐작했을 뿐. 보통 목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물들은 별로 없거든. 인간을 제외한다면. 두 발로 선.

까마귀 나니: 인간, 안녕. 넌 특이하게 생겼구나. 

에피: 너희들은 숲에 가려져서 지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

까마귀 믄지에: 소란이군. 아무나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에피: 너희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

까마귀 롯테: 우리가 왜 까마귀인지 물어보려는 거야?

까마귀 나니: 까마귀가 왜 우리들뿐인지를 의아해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까마귀 믄지에: 난 예전에 알들을 낳았어. 그리곤 쏜살같이 다른 데로 날아가버렸어.

에피: 궁금한 것이 있어. 마법이 뭐라고 생각해?

까마귀 롯테: 마법?

에피: 응. 반짝이는 물건을 좋아하고, 우리네 아이들 정도로 똑똑하다고 하는 너희들에게 물어보는 거야. 어릴 때에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거든. 마법이 그쪽에 있을지도 모르지.

까마귀 나니: 대답해주지. 전에 생각해본 적이 있었으니까. 마법이란 건, 우리들 까마귀 시점으로 보면 반짝이는 물건의 반짝임과 비슷한 거야. 거기서 순서는 올바르게 짜여 있지. 우리들은 반짝이는 물건을 수집하고, 너희 인간들은 물건의 반짝임을 좇는다고 할 수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에피: 잘 모르겠어. 어려워.

까마귀 나니: 숙모라고 할까? 숙모가 숙모가 되기 전에는 어떤 존재였을까? 너 같은 조카가 있기 전에는. 그냥 소녀였을 거야. 눈이 반짝이는. 그런 것과 비슷해.

에피: 이름은 그대로고, 그때의 직함만이 바뀐다는 건가?

까마귀 나니: 그렇지. 언제나 그대로인 것은 물건의 모양이나 물건의 성질이 아니야. 너와 그 물건 사이에 오간 라포가 진짜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하나지.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인연, 혹은 인과라고 할 만하지. 누굴 중심으로, 어떤 것을 어떻게 속일까? 혹은 어떻게 감쪽같이 그것이 있던 자리에 무언가를 갖다 놓을까? 하는 문제야. 마법은.

까마귀 믄지에: 칠흑 같이 어두운 여기선, 유망한 마법사들도 헤엄치는 걸 마음대로 하지 못해. 수족관에 갇힌 상어처럼. 난 그 사실이 어쩐지 혹은 지독히도 슬퍼.

에피: 잘 모르겠군.

까마귀 롯테: 그런데 우리에게 마법은 왜 물어보는 거지?

에피: 잘 모르거든.

까마귀 롯테: 넌 네 자신에 대한 소개를 아직 하지 않았어.

에피: 그렇담 왜 질문에 답을 해준 거지?

까마귀 롯테: 네 소개를 들으려고.

까마귀 나니: 난 저런 식의 질문이 좋아. 평소에 생각이 많거든.

에피: 마법, 마법……. 난 그걸 봐왔어. 어릴 때부터. 어릴 때의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좀 달라졌지만. 그러고서 난 나이를 꽤 많이 먹었지. 난 그런 사람이야.

까마귀 나니: 왜 마법에 대해서 궁금한 거지?

에피: 대부분의 것들이 마법 같아서 말야.

까마귀 나니: 용도가 있는 마법이로군.

에피: 어떤 데에서는, 현대 기술로 이룰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을 마법이라고 하고,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마술이라고 했어.

까마귀 나니: 그것은 우리가 먹이를 잡아채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 먹이들은 죽으면 다시 저 모습 그대로 태어나거든.

까마귀 믄지에: 우리들의 몰이해로군. 우리들……, 나한테도 친구가 있었을지도. 그럼 내가 잊어버린 건가?

에피: 또 다른 어떤 데에서는, 게임 얘기를 했어. 게임에 나오는 점프가 마법이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인상 깊은 말이었어.

까마귀 나니: 너 자신이 마법사가 된다면 무슨 마법을 쓰고 싶어?

에피: 하늘을 나는 마법.

까마귀 나니: 그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에피: 어릴 때부터 생각했던 거야. 과학 기술이나 너희처럼 날개로 만들어진 기관으로 나는 것 이외의 활공을, 나는 오래도록 동경했었어.

까마귀 나니: 동경해왔다고? 넌 오랜 염원이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마법을 조사하려는 건가?

에피: 마법이 숨쉬듯이 할 수 있는 일이라야만 한다는 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조금 어려운 정도, 어느 정도 신경 쓸 수 있는 것들을 신경 쓰면서 한다면, 즉 연습을 한다면, 인간도 하늘을 날 수 있지 않을까? 

까마귀 나니: 그건 불가능해.

에피: 어째서지?

까마귀 나니: 그건 마법이 다루는 영역이거든. 마법은 피상적인 불가능을 구체적인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야. 넌 그런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고.

에피: 너희들은 마법을 쓸 줄 알아?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까마귀 나니: 환상, 이야. 마법은.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처럼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꾸며내는 게 마법이야. 그걸 우리들은 환상이라고 불러.

에피: 없었던 일로 만든다……. 있었던 일로 만드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까마귀 나니: 우리 사이에 오간 대화도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게 네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라도.

에피: 대포알을 쏘는 마법보다는 조금 낭만적이군.

까마귀 나니: 그런데 이곳은 어디지?

에피: 네 마법 속일지도.

까마귀 믄지에: 그게 비밀이었어. 너희들이, 나한테 숨기는.

까마귀 롯테: 난 자야겠어.

까마귀 나니: 이곳은 어디지? 

에피: 혹은 내 마법 속.

2026년 6월 1일 월요일

26년 5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0
―――


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70,438원 (0원 + 370,093원 + 345원)

2026년 5월 31일 일요일

고양이 낮잠

고양이들은 자고 있다. 날이 더워서 축 늘어져 있는데 나도 더워. 비가 왔으면 좋겠다.

A는 하우스 파티에 초대받아서 갔고, 나는 A에게 한 말들에 대해 앉아서 생각한다.

나는 A와의 관계에서 우위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 것 같다. 적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A의 성취를 달갑게 보지 않는 부분이 있다.

A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데, 내 앞에서는 자신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자신이 얼마나 더 대단한 것을 성취할 것인지, 최고가 될 것인지, 언젠가 유명해질 것인지 얘기하는데

나는 그것들이 내 관심 밖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A와 비교하면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A의 꿈에 대해 약간은 현실적이고 비판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있다.

A는 불안하다.

나도 불안하다.

A의 불안은 그렇게 세계 최고의 말들로 드러나고 내 불안은 그를 깎아내리려 하는 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내 삶에서 자주 반복해왔기 때문에. 자꾸 같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더 나아지지 않은 느낌이다.

 

 

2026년 5월 28일 목요일

아기를 즐겁게 돌봐요!

아기가 계속 울 때 엄마는 답답하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모든 아기는 웁니다.
어떤 아기는 훨씬 많이 울 수도 있습니다.
아기를 달래려는 노력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엄마나 아기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가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아기가 많이 울더라도,
절대 아기를 흔들면 안돼요!

ourbaby.seoul.kr


서울아기 건강 첫걸음 사업

이 교육자료는 서울아기 건강 첫걸음 사업에서
활용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2026년 5월 27일 수요일

비밀 유지 서약서


(타이틀) 오늘


장면 1. 출근 직후, 회의실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자국이 있는 비밀 유지 서약서를 내미는 Y.


대표, 당황한다.



Y

(대표를 똑바로 쳐다보며 유창하게) 사연이 있습니다.



Y, 말이 끝나자 눈을 바닥으로 내리는데 왠지 연극적이다.



Y

애인이랑 어제 길게 대화하면서 다투는 중에, 애인이 책상 위에 있는 아무 종이나 집어서 손으로 계속 구깃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가더라고요.


Y

전 그게 이 서류일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죄송합니다.




(타이틀) 어제


장면 2. 퇴근 직전, 회의실


대표와 Y, 서로 근로계약서에 서명한다.


다음으로 대표가 비밀 유지 서약서를 건넨다.



대표

이건 집 가서 읽고 서명해서 내일 가져오시면 돼요.



Y는 네–대답하고 비밀 유지 서약서를 받아 뒤돈다.



대표

아! 파일도 줄게요. 안 구겨지게.


Y

감사합니다~


대표

그리고, 건강보험 득실 확인서도 부탁드립니다.



Y는 잠시 침묵한다.



Y

혹시 어떤 부분 확인을 위해서 필요하실까요? 그게 조회 선택지가 다양하더라구요. 그래서..


대표

혹시 이중가입이라든가 세금 관련해서 몰래 투잡을 뛴다든가, 그런 경우 때문에 저희 쪽에서 미리 방지하는 겁니다.



Y는 머뭇거리며 말한다.



Y

직전 직장에서 아직 직장가입 상실 처리를 안 해줬을 거라.. 안 그래도 노동부에 신고하려고는 했는데.. 혹시 문제가 될까요?



대표의 표정이 이상하다. 이상해하는 이상한 표정이다.



대표

오늘 날짜 기준으로 가져오시면 돼요.


Y

저 혹시 상실 안 되어있으면 일 못하나요?


대표

그렇진 않습니다.



장면 3. Y의 귀갓길, 길가


Y, 폰으로 급히 건강보험 득실 내역을 확인한다.


인상을 찌푸리며 폰을 스크롤 하는 Y.


내역이 너무 많아 끝까지 다 내리지도 않고 화면을 끄는 Y. 한숨.



Y, 다시 폰 화면을 켜 구직 사이트 지원 내역에 들어가 지원했던 서류를 확인한다.


화면 맨 아래 작은 문구를 확대해서 본다.



‘위 내용이 허위일 경우 채용이 취소될 수 있음에 동의합니다.’



Y가 들고나온 가방은 작다. 그래서 비밀유지 서약서가 든 파일을 손에 들고 걷는다.


Y, 대표에게 문자를 보낸다.



“건강보험 직장가입 상실 잘 되어있네요! 현재 상태만 pdf로 제출해도 괜찮으실까요?”



장면 4.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남아있는 대표와 이사.



대표

거짓말쟁이랑 일하냐 마냐야..


이사

오늘 편집한 영상은 괜찮았어?


대표

그건 문제없어


이사

그럼 그냥 예스 해! 직장가입자도 아닌 상태고, 사람 또 뽑을 여유 없어


대표

거짓말쟁이랑 일하냐 마냐인데...




장면 5. Y의 귀갓길, 지하철 안


지하철에서 손의 거스러미를 뜯고 있던 Y. 문자 알림이 울린다. Y는 서둘러 확인한다.



대표

“전체 내역을 제출해 주실 수 있나요?”



[픽스 / 롱 테이크]


Y는 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는다.



내리는 문은 오른쪽이고 틈이 넓으니 발을 조심하라는 지하철 안내음



[팔로우 / 원 테이크]


Y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하철에서 내린다.


파일에서 비밀 유지 서약서를 뺀다.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파일을 버린다.



[컷 전환]


서서 손에 남은 비밀유지 서약서를 보는 Y.


한 번 접는다. 절반으로.


그리고 앞으로 걷는다.


걸으면서 두 번째로 접는다. 또 반으로.


조금 더 빨리 걷는다.


주먹으로 콱 구긴다. 주머니에 넣는다. 우뚝, 걸음을 멈춘다.



Y, 길가 구석으로 간다. 짝다리를 짚고 폰을 꺼내 대표의 문자를 빤히 보다가, 답장을 보낸다.



“넵”



(타이틀) 오늘

장면 6. (장면 1에 이어서) 출근 직후, 회의실


Y

그리고 이건 건강보험 득실 확인서예요.



Y가 서너 장쯤 되어 스테이플러가 찍힌 서류를 내민다.


대표, 한번 훑으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두 번째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찬찬히 살펴본다.



Y

짧게 일한 건 이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이력서에 기재 안 했었습니다. 혹시 허위 이력서라고 여겨진다면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대표

요청드린 거 다 가져오셨네요.


Y

저 일할 수 있나요?


대표

비밀 유지 서약서가 저렇게까지 구겨진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Y

아까 말씀드린 대로인데요.



대표, “믿겠냐?”를 뜻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Y

비밀로 해두고 싶습니다.



대표가 표정을 풀고 말한다. “앞으로는 거짓말 안 하시면 좋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2026년 5월 2일 토요일

꽃병을 위한 꽃꽂이

꽃과 꽃병을 사온 당신이

또 사올 것이 있다며 나간다


나는 당신이 무엇이 사올지도 궁금하지만


화병에 얼마나 많은 꽃을 꽂을 수 있을지도 궁금해

계속해서 꽃을 꽂았다


꽂을수록 꽃들은 뻣뻣해졌고

꽃과 꽃 사이의 거리도 좁아져서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라지는 않지만 갈수록 짙어지는 나무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도 여기에 꽃을 꽂을 수 있다는 것을


소국, 튤립, 작약, 거베라

미소, 애정, 수줍음, 수수께끼


무얼 가져와도

서로 머리 정도는 맞댈 수 있을 텐데


당신의 기분이 겨울이라도

불쏘시개 정도는 만들 수 있을 텐데


그저 당신은 이것저것

가져오기를 좋아해서


그래서 나도 꽃다발 사이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

나를 어딘가에 꽂아보고 싶다는 생각


셀 수 없이 많은 꽃 중에서

더 이상의 꽃을 견디기 힘든 꽃


혼자가 더 이상 혼자를 견디기 힘들 때

꽃병은 깨지겠지 꽃병에서 꽃이 쏟아지겠지


꽃을 꽂을 꽃병이 깨지면

당신은 어떤 것을 또 사오려나요


꽃꽂이가 이뤄진 꽃병이 아니라

쓰러진 꽃들과 깨진 꽃병을 위해서


당신은 어떤 것을 또 사오려나요

2026년 5월 1일 금요일

26년 4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1
―――


이달의 총격려금

50,00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11 / 50,000원 ― jan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곡물창고 ☞ 50,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70,093원 (50,000원 + 319,750원 + 343원)

엘로이

어렵지 않은 게임을 하고 싶다공략 같은 필요하지도 않은.
온라인 게임은 아니었으면 한다. 우연히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그건 NPC.
어색하기만 했던 그들이 점점 내게 마음 여는 보고 싶다.
저녁쯤 술집에 가면 항상 있는 녀석에게
기분을 내어 맥주 한잔 사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가의 수면 위로 쏟아지는 보고 싶다.
그런 게임이 있기는 있다.
방금까지 게임을 떠올렸던 것이었고
그건 『스타듀 밸리』라는 이름의 게임이다.
어렵지 않고 공략 같은 필요하지도 않은 게임.
하지만 그걸 하면서 공략도 보고 치트도 쓰고 모드도 깔았다.
모드는 직접 만들기도 했다.
내가 만들었던 모드는 건물 리텍스처 모드로,
캐릭터의 농장에 설치할 있는 모든 건물을
미국의 시골 느낌 디자인에서
완벽한 프로방스 스타일로 교체한 것이었다.
그때 프로방스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프로방스 이라는 말이 주는 노스탤직한 느낌을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아주 아름다운 이국의 풍경들을 만났고
그게 프로방스 스타일이라는 알았다.
파스텔 색조의 창문 셔터들,
균일하지 않은 크림색 돌들로 이루어진 담벽들,
섬세하게 다듬어진 램프와 계단의 난간들,
양각과 음각이 조화를 이룬 아치형의 대문들….
그건 기본 스타듀 밸리의 쨍한 색감과는 어우러질 없는 것이었는데,
DaisyNiko라는 유저가 만든 리컬러 모드를 사용하면 되었다.
Gweniaczek 님의 <중세 건물> 모드가
기본 스타듀 밸리를 조화롭게 변주하는 방식과,
Latteholn 님의 <이탈리안 컨트리사이드 빌딩> 모드가
특유의 색감으로 빛을 이용하는 방식은
내가 <프로방스 건물> 모드를 만드는 많은 참고가 되었다.
Latteholn 님은 건물 리텍스처 모드를 시작으로 다양한 모드를 만들었는데,
하나는 <골든 아워>라는 모드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창문의 색감이 달라지게 하여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아침의 따뜻한 빛과 저녁빛의 서늘한 질감을 은은하게 체험하게 하는 그런 모드였다.
Latteholn 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을에 자기만의 NPC 추가하는 모드도 만들었다.
NPC 추가 모드는 스타듀 밸리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모드의 종류 하나였고,
아마 스타듀 밸리 유저라면 누구나 쯤은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스타듀 밸리는 그런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NPC 만나서 상호작용하는 것이 즐거운…,
Latteholn 님의 궤적이 이해가 갔고,
그를 따라 하고 싶었다.
건물의 스킨을 덧씌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외부의 빛을 내부로 들여오는 것으로,
빛을 들여오는 일에서부터
새로운 관계 하나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는
창작의 루트가, 아주 필연적인 연결이라고 생각했다.
<프로방스 건물> 모드를 만들고 나서 나는
곧바로 다른 모드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농장 외부에 설치할 있는 가구 아이템으로,
캐릭터가 구조물 아래를 직접 통과할 있는,
일종의 프레골라 형태의 커버형 구조물이었다.
정자와 유리온실, 가지 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보통 스타듀 밸리에서 온실은,
입구에서 워프하여 별도의 온실 맵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었는데,
내가 만들고 있는 아이템의 경우, 워프라는 과정 없이 바로 입장하여
반투명한 덮개 안에서 캐릭터가 이동할 있고 작물도 심을 있는,
보다 현실적인 온실의 경험을 만들어내려는 기획이 있었다.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캐릭터가 실제로 앉을 있는 의자,
수영할 있는 물가,
통과할 있는 구조물….
도트 게임에서 사물과 상호작용할 있는 경우의 가짓수란
정도로 한정된 것이었고,
어떤 사물을 맞닥뜨렸을 그것에 가로막혀 주변을 맴돌기만 뿐인 제약을,
아주 조금씩만 비틀어보며 아주 조금 다른 종류의 경험을 추가할 있는,
단순한 확장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가지고 놀던 소꿉장난 키트에 딸린 냉장고 모형의 문이,
실제로 열리기만 했는데도 가슴을 뛰게 했던 것처럼…….
그것을 한창 만들고 있을 때쯤넥서스에 새 NPC 추가 모드인 <엔야> 올라왔다.
제작자는 Latteholn 님이었다.
올라온 상태라서 한글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모드를 실행해 수는 없었지만,
혼자 Latteholn 님과 모종의 공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극을 받아버린 나는,
만들고 있던 프레골라 아이템 모드를 중단하고
역시도 NPC 추가 모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추가 NPC 이름은엘로이였다.
다른 NPC들은 보통 플레이어가 머무는 농장의 외부에 살고,
워프와 이동을 통해서만 그들의 집을 방문할 수가 있었는데,
엘로이는 플레이어가 머무는 바로 농장에, 처음부터 함께 사는 NPC였다.
(아마 아이디어는 내가 최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로서는…. 지금은 모른다.)
기획을 구현하기 위해 나는 커스텀 농장 맵도 만들어야 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농장에 자동으로 스폰되 자원들을 막아야 했고,
충돌 마스크를 복잡하게 설정해서 캐릭터끼리 동선이 꼬이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내 캐릭터의 농장을 위아래로 이등분하여,
아래쪽에 엘로이가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엘로이와의 만남 이벤트는 
플레이어가 농장에 이주한 첫날부터 발생한다.
이웃이구나, 반가워, 이런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고,
이후로 엘로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엘로이는 플레이어와  농장에 사는데도
다른 캐릭터에 비해, 만날 있는 기회가 초반엔 별로 없다.
그러다 어느 예상치 못한 밤에 플레이어가 농장으로 입장하면,
농장 구석의 우물가에 있는 엘로이와 
번째 만남 이벤트를 겪게 된다.
엘로이와는 서서히 친해진다.
마을에서 소외된 인물인 엘로이를 농장 바깥에서 만날 일은 거의 없는데,
(이것은 내가 기술적인 한계를 맞닥뜨리고 추가한 설정이다.)
막상 농장에서도, 그는 자기 집과 자기 주변 정도를 벗어나질 않기 때문에,
다른 NPC와도 만나야 하고,
씨앗을 사러 나가기도 해야 하고,
낚시와 벌목도 해야 하기에 바쁜 플레이어는,
하루 종일 농장에 있지 않는 이상 좀처럼 엘로이를 만날 없다.
엘로이는 모든 선물을 좋아하도록 설정되어 있고,
심지어는 바다에서 낚은 쓰레기나 신문지 같은 것을 줘도좋아하도록되어있고,
그러나 모든 선물을 사랑하지는 않도록 설정되어 있다.
(스타듀 밸리의 NPC들은좋아하는선물과사랑하는선물이 각각 정해져 있다.)
그러나 싫어하는 선물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슬라임 점액질이다.
엘로이는 자주 사라진다.
플레이어와 다투고 나서는
아예 달간 마을에서 사라지고 농장에서도 사라진다.
자기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그동안 엘로이 주변의 꽃들은 시들고,
벤치에는 먼지가 쌓이고,
관리되지 않은 잡초가 무성히 자란다.
변화들을 플레이어는 무력하게 바라보게 된다.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기척이 들리지만, 반응이 없다…….’라는 텍스트 창이
엘로이를 만날 없다.
하지만 후속 이벤트를 통해 언젠가 화해를 하긴 하고,
호감도가 쌓이면 엘로이와 연애도 결혼도 있다.
결혼하게 되면, 플레이어의 집에 엘로이가 들어와 살게 된다.
(스타듀 밸리의 기본 결혼 시스템이 그렇다.)
그럼 원래 있던 엘로이의 집은 빈집이 되어,
농장 아래의 한구석에, 그저 존재하기만 하게 된다.
모든 계획해 놓았지만 나는,
스타듀 밸리라는 게임을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여전히 사랑하지만
다른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게 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모드를 만들게 일은 없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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