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7일 토요일

아기

부장급들이 업무 중 이상한 소리(끄윽, 후후, 습습 등)를 내는 건 어딜 가나 똑같은 것 같다. 실업급여를 다 타고도 두 달이 지나 겨우 일을 시작했다. 가증스런 11개월 계약직. 나까지 해서 사무실에 5명.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좋지 않으면 어쩌겠나? 그쪽에서도 나름 내 사정을 봐줬다. 나는 아기를 얻었다. 아기도 자나 깨나 부장님처럼 이상한 소리를 낸다. 크으엑, 흐륵, 헤엑... 아기 보기의 삼분지일은 유튜브로, 삼분지일은 조리원에서, 삼분지일은 몸통박치기로 배우자와 함께 배우고 있다. 아기는 뭘 먹으면 트림을 시켜줘야 하는데 쉽지 않다. 들었다가 놓았다가 난리도 아니다. 속싸개는 왜 또 그렇게 어려운지, 가장 미묘한 문장보다 세심하게 가장 아름다운 문장보다 팽팽하게... 한 획만 틀려도 와르르 펼쳐지며, 그 속에서는 완전 미완의 새로운 인간이 발버둥치고 있다. 오늘은 좀 다른 트림 방법을 시도해 볼 참이다. 뺨을 잡고 등을 받치고... 뭘 어떻게 해주지 않아도 쉽게 트림이 나오는 부장들이 부럽다. 배우자가 지난 10개월간 인하우스 인간 생산을 도맡아 개고생하는 동안 나는 이것저것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뭔 육아 콘텐츠를 써보고 싶은 유혹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경험을 내 것으로만 두고 싶은 맘도 크다. 쓰기와 인간이 콘텐츠라는 틀거리 속에 한없이 모욕받고 있는 이런 시대에, 아기에 대해 뭘 쓴다면 그것은 그래도 되는 일인가? 아기를 얻었다 하고 말기에는 아쉽고 전부 다 쓰자니 하염없다. 지난 열 달간 아는 사람들이 나더러 기분이 어떻냐고 물으면 두렵다고 답할 도리밖에 없었다. 스스로에게 ‘육아는 인생 최대의 콘텐츠’라고 되뇌며, 아파트 거주자들이 주도하는 육아 문화-쇼츠의 홍수에 떠밀려, 성채 같은 아파트들을 전전하며 이것저것 당근을 해왔다. 지금은? 지금 인간은 모두 개새끼로 보이고 그 어떤 시발것도 두렵지가 않다. 아기는 기사고 나는 말이다. 작고 온기 있고 꼬물거리는 자신의 인간 아기를 처음 품에 안아보는 그 순간 생각, 인간이 모두 아기였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하고 한스런 일인가? 부모가 되어보면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분명히 그렇고, 부모의 마음은 선의 심연 속 악의 등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기를 왜 ‘얻었다’고 하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고 아기를 왜 ‘본다’고 하는지를,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를, 어째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지는지를, 부활이 무엇의 비유인지를, 쏟아지는 빛살을 등져 아기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듯 알게 되고... 아직 안팎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기는 더하고 덜 것이 없고 고칠 곳이 전혀 없군... 책보다 낫고 시집보다 낫군, 내 것이되 내 것 아니군... 읽을 수 없군... 유리관의 부활일기 같은 건 어떨까?

2026년 2월 3일 화요일

허니콤

“베란다 바깥쪽에 붙어 있던 커다란 벌집, 아직도 있다. 꿀도 없고 벌도 살지 않는, 내 머리통만 한 벌집이다. 어쨌든 꽤 커서, 봄이 되면 떼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다. 벌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하면, 당연히 아무 일도 안 벌어지고 있다는 슬픔이다.”*

나는 이 슬픔을 신문지 구기듯이 뭉쳐두었다가 월요일마다 펼쳐보았다. 볼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당연히 아무 일도 안 벌어지고 있다는 슬픔이었다. 나는 그 슬픔을 포갠 접시처럼 쌓아 올렸다가 화요일마다 한 장씩 집어던져 깨뜨려 보았다. 그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는데도 당연히 아무 일도 안 벌어졌다는 강화유리 같은 슬픔이었다. 나는 수요일마다 그 슬픔으로 남의 집 창문을 해 넣으러 다녔다. 그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슬픔의 단열이 너무 잘되어, 슬픔은 각자의 취미가 되어버렸다는 슬픔이었다. 나는 목요일마다 그 슬픔을 내 것으로 착실히 챙겨서 출판사에 취직했다. 슬픔을 교양서로 편집해 천 부씩 출력해서 금요일 아침에 전국의 서점에 입고했다. 무려 월급이 나오는 슬픔이었는데, 그럼에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당연히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슬픔이었다.

나는 완전히 지쳐서, 이틀을 꼬박 자면서 쉬었다. 빈 벌집 생각은 멈추고. 그런데 내가 정말로 멈출 수 있었을까? 자는 동안에도 과각성된 슬픔은 잠들지 못하고 육각형 결집을 시작한다. 벌집 만들기 경연대회가 있다면 단번에 우승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커다랗게. 당연하게도, 나 같은 일반인, 가해자, 한계 많은 동시대인은 슬픔으로 경연을 걸어서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을 자꾸 이겨버린다.



*블로그 이웃 eaches님의 이야기다.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26년 1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모든 격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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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18,979원 (0원 + 318,638원 + 341원)

2026년 1월 19일 월요일

오직 네 독자를 위한 신대륙 이야기 후일담

― 24년 3월 9일부터 25년 12월 20일까지의 플레이로 완결된,
TRPG팀 『너드트레인 1호선』 언리미티드던전 캠페인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은 후일담


전쟁전령 젠싱
드래곤 가나슈와 언데드 군대가 맞붙은 레모링 전투 직전, 카롱은 젠싱에게 북대륙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혹시 뭔가 잘못된다면 뜻을 이으라고요. 네이린천 항구에서 젠싱은 카롱의 죽음을 전해듣습니다. 자신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져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토록 원했던 신의 이름도 이제는 기억나질 않습니다. 북대륙에 도착한 젠싱은 특유의 화술과 진실함을 통해 잃어버린 신의 교단을 세우고 지상성교의 흩어진 세력을 수습합니다. 그러다 도마와 만나게 되는데...

정지된 녹수정 속 아이들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들에게 돌아갑니다. 이들은 대체로 범상치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녹수정의 꿈속에서 만났던 깜빡이는 마법사에 대한 기억은 이들을 동기간처럼 이어줍니다. 이 세상에 부모도 친지도 남지 않은 몇 명의 아이들을 수호단에서 거둡니다. 그들은 훗날 녹수정 마법사로 불리며 활약합니다.

네피리단의 어부 욘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신은 언젠가 오실 겁니다. 여생을 어부로 살아가다가 백발의 노인이 된 어느 날, 잃어버린 신의 교단이 있다고 하는 구대륙을 향해 자신의 고깃배를 타고 떠납니다.

다실롬 폐허의 유령들
마술숲 지하도가 뚫린 뒤, 다실롬은 날개산맥 이쪽과 저쪽의 관문도시로서 부흥합니다. 깜빡이는 연금술사와 그 조수가 곰팡이 폐허를 정화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깜빡이는 연금술사의 노래는 다실롬을 중심으로 오래도록 이어집니다. 이곳에서는 깜빡이는 마법사로 개사되곤 하는데, 그것은 ‘유령판’으로 불립니다.

원정군 사령관 엘리데라
성공적인 원정을 마치고 북대륙으로 개선하지만 엘프 궁정의 음모 가운데 반역자로 몰려 유배당합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유배지에서 당대의 용사들에게 도움을 주고 복권됩니다.

가속의 신 톱니바퀴
연속과 다시 합쳐져 완전해진 위상을 손에 넣은 톱니바퀴는 이제 모든 뜻을 이루게 될 줄 알았건만... 자신의 사도 히스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드래곤을 찾는 히스의 모험에 엉망진창으로 얽혀들다 정신을 차려보니 히스를 등에 태우고 다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실리의 만테소리
레모링 전투 전 카롱은 만테소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돌아가던 와중 그는 자신에게 신앙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카롱의 죽음을 안 다음에는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외고조의 흔적을 찾아 남대륙으로 향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가의 사생아이자 용사였던 외고조가 사용했다던 속삭이는 검을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이 카롱을 사랑했었음을 깨닫습니다.

과분한 츠
이 쥐 인간은 으릉에서 자신이 부리던 코볼트들에게 죽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성물 ‘드래곤의 혀’도 코볼트들의 것이 되어 섬겨집니다.

시종장 잔카테
충직한 망령 시종은 레모링 전투에서 카롱을 지키기 위해 가나슈의 화염숨결 앞에 산화했습니다.

퍼플윙
젯톤산에 도달합니다. 자신이 악마였다는 사실을 버리고 젯톤의 수호령으로서 그곳에 머물다가 히스와 재회하기도 합니다. 히스와의 재회는 싱거웠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 세계의 여덟 번째 위기 때 소멸당합니다.

대악마 천조의 제왕
얼음터에서의 실패는 제왕이 겪기에는 너무나 쓰디쓴 것이었습니다. 틈새 차원에서 지옥으로 다시 복귀하는 과정에서 대악마의 지위도 군대도 모두 잃었습니다. 늙고 힘없는 작은 악마로서 지옥을 떠돕니다. 자신의 검은 광배를 조금씩 뜯어먹으면서.

흑요석 봉우리의 드라우그들
이들은 레모링 전투 때 카롱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그들에게 평안을 주었습니다.

레모링 신령수의 요정들
봄이 온 뒤부터는 가나슈 일행이 주었던 열석이 더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열석으로 물을 덥혀 온천을 즐기다가 레모링으로 탐사 온 오즈루드에게 선물로 넘겨줍니다.

레모링의 뒤틀린 엘프들
몇몇은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고 몇몇은 수호단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곳곳에 숨겨진 금화 상자는 수호단의 든든한 자금이 됩니다.

소금호수의 세이렌과 게 신령들
세이렌은 염호 아래 자신의 투명한 몸을 누입니다. 게들은 루샤 협곡으로부터 밀려온 바닷물 속으로 녹아들어 먼바다로 나갑니다.

볼가마의 오크들
족장 코른들이 실종된 후로 서른날이 더 지나, 수호단으로부터 유품들을 전달받습니다. 히스에게 족장이 되어주기를 청하나 거절당합니다. 족장의 해골망치를 되찾겠다며 코른들의 자식을 포함한 적지 않은 수의 혈기 왕성한 오크들이 모험을 떠납니다. 나머지는 칼깃산맥 동쪽의 다른 남방오크 부족으로 흡수됩니다. 축제를 사랑하는 오크들의 왁자지껄한 도시 볼가마는 쇠퇴합니다. 금강석 해골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유령마들
유령들 사이엔 차별이 없습니다. 눈사태 악몽마들과 잘 어울리던 유령마들은 봄이 오면서 북쪽의 젯톤 너머로 향합니다.

오즌의 겹쳐진 왕들
겹쳐진 왕들은 카롱에 맞서기 위해 유령 원군을 이끌고 레모링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루샤 협곡 근처에서 벌어진 전초전에서 이들은 카롱의 군대에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시간을 끌고, 전멸했습니다. 오즌의 폐허는 끝까지 복구되지 않습니다. 곰팡이 핀 회색 절벽 아래로 소금호수의 짠물이 찰박댑니다.

날개산맥 데로 장로 링 밧
날개산맥을 넘어온 세모총연-수호단 연합원정대에게 길을 안내해 레모링 전투에 제때 도착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얼어붙었던 키엘팽이 다시 흐르고 얼음들이 풀빛으로 물들 즈음 장로 링 밧은 반 굴과의 마법진을 다시 엽니다. 암람 광산에 남아 있던 반 족의 데로들을 통할합니다.

공기의 정령들
루샤의 지도를 따라 깜빡이는 연금술사의 노래를 다른 구대륙들로 퍼뜨립니다. 대다수가 시간과 관련하여 혼란을 겪습니다. 중력신 호제아가 미래의 신인지 과거의 신인지 헷갈린 이들에 의해 호제아가 다시 태어납니다.

네이코룸의 기구장이 랭잔
오즈루드의 후원으로 툴 나소에서 계속 기구를 만듭니다. 이 기구들은 렌틸에 의해 평화적인 용도로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죽기 전에는 카마이 일행이 탔던 기구가 가라앉은 키엘팽 강을 찾아가 봅니다.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핌의 이버
아기를 키운다는 건 반란군 우두머리 노릇보다 재밌지 않았습니다. 이버는 수비대장이 되었다가, 사절이 되었다가, 산적이 되었다가, 소영주가 됩니다. 그녀가 편력하는 동안 거의 오우거들에 의해 키워진 이버의 딸은 신대륙 수호단의 주요 인물이 되어 동분서주합니다. 이버는 장성한 딸을 흐뭇하게 봅니다만 딸은 엄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팜피네아의 귀족 시스트라날르
루샤에게 가속의 씨앗을 전하고 북대륙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대와 달리 연속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습니다. 루샤를 다시 찾아볼까 싶기도 하지만 그만둡니다. 신대륙에서의 이변이 잦아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연속의 뜻이었을지도요. 그대로 고고학 취미에 몰두합니다. 신대륙으로의 신비한 모험은 귀족으로서 값진 한때의 추억입니다. 언젠가 오즈루드의 책을 읽게 되지만 그뿐입니다.

해방된 꼬리산맥 고블린들
꼬리산맥 부락으로 돌아와 봤지만 남은 것이 없습니다. 번개를 맞아 반으로 갈라져 죽은 나가와 부족민들의 시체뿐. 이들은 소문을 좇아 반란군에 참여했으며, 네이코룸 전투 때 화관의 무녀를 보자마자 (우리 편임에도 불구하고) 부족을 제압한 존재임을 직감하고 발톱산맥 방향으로 도망칩니다. 발톱산맥 근방에 전해지는 화관의 무녀의 노래에 나가가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폭포산장의 거인사제 아엘파르
아엘파르는 연합원정대의 일원으로 날개산맥을 넘어 레모링 전투 막바지에 참전했습니다. 장렬히 싸우다 최후를 맞이한 드래곤의 모습은 아엘파르의 가슴속에 남았습니다. 산 것들에 대한 헌신을 맹세하고 황금용의 성기사가 되어 이름을 떨칩니다.

꼬리산맥의 유령곰과 신령한 쌍둥이 고양이
유령곰은 아엘파르에 의해 정화되고 쌍둥이 고양이는 황금용의 성기사와 함께 모험합니다.

송츠 촌장 즈젬모
루샤 일행이 얼음터를 닫은 날 어린 시절의 꿈을 꾸며 영면에 듭니다.

산지기 토블론
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후, 산장에서 있었던 ‘최후의 회합’을 중요한 기적으로 보고 루샤 교파를 세웁니다. 진정한 구원자 루샤의 역정을 직접 조사하고 순례길을 확정합니다. 지나치게 과격한 해석 때문에 그 자신은 끝내 축출되지만 교파는 신대륙에서 세를 불리다가 잃어버린 신의 교단과 대립합니다. 말년엔 그럭저럭 고분구릉의 약초꾼이 되어 남방오크들과 거래합니다.

네이린천 총독 누야
일행을 제대로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좌천되고 젊은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다시 던전 모험가의 삶을 삽니다. 기묘한 운명의 씨실과 날실을 따라 카롱의 유해를 수습하여 둘 모두의 고향인 프리예로 돌아갑니다.

칼미야 드워프 평의원 모움잠
칼미야 함락 때 북대륙 군대와 내통했습니다. 당장은 괜찮았으나 결국 화근이 되어 신대륙을 떠납니다. 드워프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해 사특한 길로 빠집니다.

거인 우어
우어는 연합원정대의 일원으로 레모링 전투 막바지에 참전했습니다. 함께 싸운 아엘파르에게 반해 따라다닙니다. 거인 기사와 벙어리 종자로 유명해집니다.

세모총연 칼미야지부 기수 아진
아진은 연합원정대의 일원으로 레모링 전투 막바지에 참전했습니다. 수많은 언데드들을 베어 넘겼습니다. 페네간 이후 공석이었던 칼미야 지부의 정식 길드마스터가 됩니다.

이계학자 오즈루드
비밀결사 렌틸을 이끌며 날개산맥 서편 이곳저곳을 직접 탐사합니다. 지난 역사의 많은 비밀을 밝혀내고 카마이로부터 비밀스런 도움을 받으며 금자탑을 쌓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신과 마법 사이의 관계를 밝혀 세계 정립의 이론으로 널리 인정(오즈루드론)됩니다. 카마이 대학교를 설립합니다. 장년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 젯톤산 정상에 떨어졌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젯톤산 등반 도중 실종됩니다.

붉은 늪의 개구리인간들
갈라진 늪과 늪에 파묻힌 역참 신수는 개구리인간들의 성지로 경외를 받습니다. 그 주변에 접근하려는 이들은 모두 격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오즈루드의 탐험대조차 접근에 실패했습니다.

신대륙 수호단장 론드리사
론드리사는 연합원정대의 일원으로 레모링전투 막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가나슈의 유해를 수습해 흑요석 봉우리 근방에 장사 지내고 비를 세워주었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 삽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제자와 함께 도마를 찾아갑니다.

2026년 1월 16일 금요일

눈사람을 위한 플로깅

나뭇가지를 주우면

눈사람이 떠오른다


쓸어내린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묻어 있는 게

참 많기도 한


눈사람을 떠올리면

눈이 쌓인 공터를 거닐게 된다 


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파내고

누군가 흘린 장갑을 건지면


살아 있기

쓸모없지 않기


뭉개진 코와 부러진 팔다리에게

굳이 쓸모를 얘기하지 않기


더 많은 걸 선물해도 될까

비닐봉지, 스타킹, 양말, 모자


그러다 날씨가 좋아져

눈사람은 다시 흘러내리지만


거의 물이 되어가는 눈사람의 말


다시, 또다시


눈이 내린다

친한 눈사람이 떠오른다


2026년 1월 4일 일요일

버스 안에서

중절모를 쓴 운전수가 승객들에게 고개 인사를 한다. 승객들 사이엔 운전수의 옛 애인들도 있다. 실제로는 운행하지 않는 버스이나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차량도 있단 걸. 중절모의 아래로 드러난 운전수의 생김새와 거의 같아 보이는 승객이 마지막으로 탑승했다. 버스는 출발을 한다. 잠깐 정차하고 다시 핸들을 잡기 전에 운전수는 중절모를 고쳐 쓰고. 승객들이 짝짝짝 정해진 듯이 박수를 친다.

그런 광경을 암시하는 것 같은 그림이 이 미술관에는 걸려 있기도 하다. 운전수가 결여한 것은 손위나 손아래 누이가 아닐까. 그가 어쨌든 갖고 싶었던 것은 형제자매들이기도 했다. 그동안 운전수는 주름이 많이 잡히는 쪽으로 늙어왔었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한다. 아까 전에 탑승했던 운전수와 생김새가 거의 같은 사람이ㅡ형제자매를 넘어서ㅡ 운전석에 있는 거울로 운전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운전수는 이런 순간을 실제로 겪었다. 뒤에서 경차 하나가 맹렬히 다가와 옆 차선으로 아슬아슬하게 추월한 순간이었다. 무언가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으나 운전수는 욕설을 내뱉지 않았다. 그 대신 승객들이 놀라지 않았는지 조용히 거울로 확인했다. 

깜깜해진 하늘 위에 내가 좋아하는 흐릿한 구름이 끼어 있다. 승객들 중에는 예의 운전수의 도플갱어가 가장 먼저 잠들었다. 히터를 튼 버스 내부는 밖에 의존하지 않은 채 따스했다. 옛 애인들과도 운전수는 곁눈질이라도 하는 순간이 없었다. 그치들은 운행이 끝나 내리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고 그에 대한 운전수의 생각은 알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나는 조금 놀랐다. 마침 뒤를 거울로 응시하던 운전수와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입 모양으로 무언갈 내게 말하고 있기까지 했다. 

빙, 과. 아니면 잉, 걸 이렇게 말하는 듯도 했다. 나는 거기서 시선을 금방 거두고 내 맞은편 승객을 힐끔 쳐다봤다. 버스를 막 탈 때보다 피곤에 지쳐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남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내 얼굴도 그럴는지는 몰랐다. 나는 늙고 싶지 않았고 조금만 늙고서 그 이상의 것을 거머쥐고 싶었다. 운전수는 하나하나의 얼굴들을 다 눈에 담아두는 듯하게 무뚝뚝했다. 운전수들이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무뚝뚝해지기. 

나는 얕은 불 속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버스의 안과는 상관없는 추억이자 잠시 들게 된 꿈이었다. 그 광경. 나는 가방을 열고 운전수가 쓴 것과 최대한 닮은 벙거지 모자를 꺼내 썼다. 막 휴게소에 정차한 버스를 뒤에 두고 사람들이 한 명씩 내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거나 매점이나 식당에 가서 뭘 사먹든 했다. 나에게는 이렇다 할 흥미가 들지 않는 시간이었다. 휴게소로 간 나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어두운 버스로 다시 가서 탔다. 

이 모든 일이 나의 미래에 없을 것 같기도 나의 과거에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현재인 이런 순간을 앞으로도 간직하기엔 무언가 의미를 가진 사물들이나 말 따위가 필요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난 버스 안에서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만큼 더 복잡한 사물들이 기억에서 나중에라도 솟구치게 하도록. 나는 다시 출발한 버스 안에서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격앙되어 있지 않단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꿈의 탓이었다. 이 중에 결원은 없어 보였다. 무언가 잘 맞춘 퍼즐을 보는 듯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런데 다시 거기서 하나가 빠진 그래서 완성에 못 미치는 아쉬움이 곧바로 들었다. 레고를 조립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버스 안을 유려한 몸짓의 고양이가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휴게소에서 얻어 탔는지 이 사람들 중 한 명이 놓쳐버린 건지 아까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고양이였다. 그치는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리란 걸 틀림없이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각각의 좌석마다 기대를 가지곤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었다. 고양이 간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꽤 많았다. 

나는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안타깝게도 수중에 고양이 간식이 없었다. 아까 전에 은근한 암시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버스 운전수의 말을 듣고도 중요하지 않게 여긴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친절한 고양이는 성큼 이 자리로 와선 내 허벅지에 웅크리고 누웠다. 버스가 잔잔히 달리고 있을 때 옆으로 사람들이 와서 고양이에게 간식을 먹였다. 그들은 그러고 나선 만족한 듯 저의 자리에서 두 눈을 감고 쉬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기도 했다. 고양이는 운전수의 중절모 속에서 뛰쳐나온 것 같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고양이는 이제서 버스 중앙의 바닥에 엎드리고 누워선 눈 위를 앞발로 쓰다듬는 것 같기도 했다.

운전수의 중절모에서 뛰어나온 저 고양이에게 잠시 샘이 났다. 그것은 누구에게라도 그럴 법했다. 저런 곳 안에는 이곳만큼 또 다른 행복한 세상이 있다고 추적추적한 현실의 날씨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요즘 시대에 중절모를 쓰는 것은 드물게 됐다. 나는 모자를 쓰는 일도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주 쓰고 다닌다.

어느샌가 운전수가 몰고 갔던 버스에는 사람들이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 나를 제외하면 너댓 명인 듯했다. 운전수의 옛 애인 중에는 추측이지만 한 명만이 남은 듯했다. 그치는 그 사실에 의기양양하며 운전수와 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옆창문에 기댄 표정이 온화해 보였다.

다 내리기 전까지 운전수의 옛 애인들 사이에서는 다툼이 있었다. 서로들 자신이 가진 초조함을 다 드러낼 만큼 조급했다. 운전수의 도플갱어 또한 언제쯤인지 내리고 없었다. 여인들은 운전수로 다투면서 운전수가 가치를 지닌 사물인 양 말했다. 운전수는 곤란하거나 조금 부끄러워 하는 듯했고 나는 그가 이 버스를 이렇게 계속 운전해주었으면 했다. 내일도 내일 모레도 똑같은 이 버스를 탈 수 있게. 그렇다는 것에 대해 나는 수치심도 별로 느끼지 않았다. 나에게는 빨리 도착하고 싶은 곳이 있었다. 설혹 이틀이나 삼일씩의 시간을 곱빼기로 먹어 점점 더 남보다 늙는다고 해도 말이다. 거리는 너무 추웠고 버스 안은 보호받는 것 같아 아늑했다. 

버스 기사는 한참 동안이나 적요로웠고 정거장 안내 음성의 뒤로 자신의 육성을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운전수는 아까 전에 저의 옛 애인들이 내릴 때 씩 웃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사람 남았던 그치들의 마지막 사람도 꽤 한참 전에 내렸다. 나는 그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이 나의 신이지 않느냐고.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새카만 밤 속에서 이 앞은 어두웠어도.

2026년 1월 1일 목요일

25년 12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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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638원 (0원 + 318,298원 + 340원)

2025년 12월 1일 월요일

25년 11월의 모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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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9일 일요일

초보자를 위한 짧은 안 하기 가이드 모음

1. 책 안 읽기 ☉책은 불에 잘 탄다는 점을 기억하기. ☉책을 사서 읽지 말자. 모든 저자에게 복수하자. ☉책은 변형되기 쉽다. 그러나 섣불리 책을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남 좋은 일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 ☉남들이 뭐라 해도, 애원하고 소원이라 해도 절대로 추천하는 책을 읽지 말자. ☉남이 재밌게 읽었다고 해서 책을 사는 일은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종이는 썩어가는 시체를 압착한 끔찍한 물건이다. ☉두꺼운 책 표지와 커버는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뜻이다. ☉남의 이야기 따위 들어줄 필요 없다. 불필요한 지식도. ☉아, 그 책은 읽어보았습니다. 형편없더군요. ☉아, 그 책은 읽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등을 연습하라. ☉표지로 책을 평가하는 연습을 해라. ☉책의 한쪽을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페이지를 한 번에 끝까지 훑어라. ☉그리고 책을 읽어봤다고 말해라. ☉죽어가던 그 사람이 읽지 못했던 수많은 책들을 생각하면서 잠에 들어라. ☉머리와 눈이 나빠서 글을 읽지 못했던 수많은 부랑아들을 생각하라. ☉그들의 수호성인이 되어라. ☉정기적으로 서점에 방문해서 모든 블록을 적어도 한 번씩은 둘러보고, 절대로 한 페이지도 읽지 말고 떠나라. ☉판단하는 눈빛을 유지하라. ☉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라. 책을 받침, 베개, 장작으로 사용하라. 책을 살인도구로 사용하라. ☉책을 버려라. 버려진 책들을 수집해라. 그리고 그 책들이 재활용 장치에서 펄프로 되돌아가는 것을 지켜봐라. 캠핑용 의자와 와인을 준비해라. 녹아내리면서 나는 그 냄새를 음미해라. ☉책들의 표지를 없애라. 잉크를 지워라. 그리고 견본용 책인 것처럼 대형 서점이나 까페의 장식장에 비치해두어라. ☉어린아이들에게 그들이 절대로 읽지 않을 책들을 선물해주어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약속하는 책을 선물해주어라.



2. 영화 안 보기 ☉너무나 보고 싶지만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 영화들을 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라. 그 영화들을 모두 모아라. ☉그 영화들에 대한 설명과 해설, 비평을 모두 읽어라. 그 영화들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수집해라. 인쇄해서 집에 모셔두어라. 꿈에서 그 영화들을 감상해라.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라. ☉영화 감독과 출연 배우들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여러 번 감상해라. 영화 로케이션 그리고 로케이션 후보지를 성지순례해라. 영화의 레퍼런스와 오마주를 확인하고 영화에 영감을 준 소스들을 추적해라.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그 영화들을 보지 말라. ☉짧은 공개 영상이나 예고편은 마음껏 보아도 된다. ☉그러나 영화를 실제로 보아선 안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동받은 사람들, 인생이 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그리고 그들을 비웃어라. ☉영화의 중요한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속물적이고 가볍게 소비하는 사람들의 여정을 따라가라. ☉영화를 소재로 한 팝업 스토어와 연계 행사에 방문해라. 포스터와 굿즈를 모으고 명장면에 나온 요리의 레시피를 시도해보라. ☉영화제나 지자체의 영상자료원에서 특별 기획으로 재상영되는 경우 꼭 예매해라. 여러 번 예매해라. ☉그리고는 영화관까지 가서 실제로 상영관에는 들어가지 말아라. 서성이고 포스터와 광고를 구경하다 집에 가라. ☉그러나 GV에는 참여해라. ☉하루 종일 그 영화의 시나리오와 이미지를 상상해라.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상상해라. 촬영감독의 고뇌를 상상해라. ☉영화를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가늠해보아라. 보지 않은 그 영화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라. ☉그 영화들을 여러 번 돌려본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해라. 그들이 떠드는 동안 비밀스러운 미소를 숨긴 채 침묵을 유지해라. ☉그리고 어느 날 그 모든 영화들을 잊어버려라. 자료들을 버리고 떠나라. 영화관은 근처에도 가지도 말아라. ☉영화관은 비싸고 허리만 아프다고 말해라. ☉당신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이불 빨래를 해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가계부를 작성해라. ☉각종 광고와 마케팅 영상에 몰두해라. 이윽고 그것이 어느덧 시들해질 때까지. ☉이후에는 어떤 것에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무덤에 누워라. ☉무덤에는 이렇게 적어라.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우리의 어머니 여기에 잠들다



3. 글 안 쓰기 / 기억 안 하기 ☉꿈에서 본 것을 애써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이 흩어지듯이 매사에 그렇게 해라. ☉소중한 생각들을 모두 마음에 오래 간직해 그것이 꿈처럼 되게 하고, 오래 간직해 그것을 흩어지게 해라. ☉노동의 무게 아래서 마음이 찐득한 가래 같은 것이 될 때 불현듯 스쳐가는 섬광과 이미지들을 오랫동안 간직해라. 절대 어디에도 적어놓지 말고 아무에게도 공유하지 말아라. 그 마음과 생각이, 단어들의 조합과 그 단어들을 생각나게 하는 얼굴들이 빛바랠 때가 되어서야 그것들을 불러내려고 애써라. 그것들이 먼지가 된 고인들처럼 흩날리는 것을 지켜보아라. ☉깊은 곳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감정,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 길이 기억되기 바라는 소망, 되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의 순간, 짧지만 행복했던 어떤 전셋집, 일 끝나는 시간에 만나기로 한 약속. ☉몸의 특정한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반응, 말소되어 가는 기억의 단자를 곱씹어 느껴보아라. ☉피부와 근육의 세심한 반응, 말초적인 감각들, 부드러운 촉감과 상처의 기억들. ☉연필과 키보드가 치고 남기려고 하는 그 욕망을 느끼고, 그것이 결국 쓰지 않고 있는 것들을 느껴라.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단련 덕분에 당신의 마음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고, 종이에 아무것도 써 내려갈 수 없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분노와 절망과 치매 감정을 잘 포착해라. 치매는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조기교육 받을 수 있다. 문맹이나 교육받지 못한 자들과 달리 글 안 쓰기와 기억 안 하기를 배운 사람들은 정당하게 불타오르는 안 하기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불타오르는 치매. 글을 쓸 수 없고 기억해낼 수 없는 사람들의 불타는 연대. ☉실용적인 장점으로는 모르는 체할 수 있다. 글을 쓸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런 책임도 권리도 없다. ☉정신병원과 감옥 중 편한 곳을 선택해라.



5. 안 듣기 / 말 안 하기 ☉목소리는 최소한의 보루이다. 명예와 신념으로 그것을 지켜라. 어떠한 리듬에도 몸을 맡기지 말아라. 가능하다면 성대와 고막을 제거해라. 아이가 당신을 찾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라. 노인과 병자가 앓아 눕는 소리에 신경쓰지 마라. 평생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는 그의 침대 옆에서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라. ☉모든 말들을 입안에 감추어라. 그것이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주시해라. 발버둥치고 낙담하고 바들거리는 것을 감상해라. 너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남들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권해라. 모든 말들을 무덤까지 가져가는 것이 최선이다. ☉듣지 않으면 말할 일도 없다. ☉다만 항상 무덤의 유령처럼 웅얼거리고 병자의 앓는 소리를 내라. 명확하지 않은 말을 해라. 세상의 소리들을 쫓아오는 병마처럼 피해라. 파동과 진동으로부터 몸을 숨겨라. 담요를 둘러싸고 어두운 방에 숨어라. ☉방심하지 마라, 문득 처음에는 즐거이 들을 수 있는 어떤 소리도 죽어가는 아기들의 숨소리일 수 있으니.



6. 밥 안 먹기 ☉배에 구멍을 뚫고 유동식 튜브를 삽관해라. ☉입과 식도, 위장의 즐거움은 기초적인 기피대상이다. ☉허기는 가장 지루한 종류의 적이다. ☉순서대로 혀, 식도, 위를 절제해라. ☉종종 식당에서 무언가를 주문하고 아주 조금 입에 잠시 담았다 뱉고 자리를 떠나라. 나가기 전에, 음식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화목한 가족에게 입안과 장의 구멍을 보여주어라. 가능하다면 아이에게 목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게 해라. ☉밥을 안 먹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는 힘든 일이고, 밥 안 먹는 것 따위 그다지 가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7. 숨 안 쉬기 ☉목에 구멍을 뚫고 기관절개튜브를 삽관하라. 호흡기를 달아라. 숨 쉬지 못하는 그 감각에 익숙해져라. 어느 경지에 다다르면, 전혀 숨 쉬지 못하고 숨 쉬지 않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물에서도 뭍에서도 숨 쉬지 않는다.




2025년 11월 6일 목요일

랠리를 위한 놀이

랠리를 이어갈수록 우리는

무수히 많이 짝이 되었지

 

금방 끝낼 때도 있었지만

몇 번을 해도 서툴러서 오히려

쉽게 그만두기 어려운 여운


두 개의 속도가 하나의 속도로도 작동하고

온종일 손에서 손만으로도 가능한 율동

 

그저 무언가를 쳐내는 게 좋아서

공원을 마음대로 쓰는 게 좋아서

 

우리는 언제까지 짝이 되어볼 수 있을까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공을 둘이서 열심히 응원하며

억세게 자라는 풀들을 짓밟고 가만히 자고 있는 돌들을 차버리며

다시 서로에게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지


최초의 놀이를 발명한 사람들은

아마 놀다 지쳐 죽었을 거야


우리라고 다를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공원에서

우리는 다시 놀이를 복사하기 시작하고


점점 느려지는 낮

바람이 불고 그림자가 길어지면

의문이 갑자기 찾아오며


나무에 걸린 셔틀콕을

절대로 꺼낼 수 없을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서

 

열렬히도 이어나갈 수 없는

랠리에게로

 

나무는 공원을 계속 흔들고 있지

2025년 11월 2일 일요일

중성화

 

나는 이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고 무성애자도 아니고 양성애자도 아닌, 본의 아니게 이렇게 되어버렸네. 내가 혼란스러웠을 때 너도 혼란스러웠겠지. 우리 둘 다 그렇게 혼란스러워서 거실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 나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내 결정이었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 너는 항상 망설이잖아. 근데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되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나도 어쩔 수가 없네. 가끔 너를 보면, 중성화된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해. 가끔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네가 부럽기도 하고. 하지만 네가 행복해하면 나한테 갑자기 잘 해주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더라. 그런데 가끔은 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이해해보고 싶어. 너는 왜 내 엄마도 아니면서 엄마처럼 잘 해주는지. 왜 너는 나한테 이렇게 많이 그냥 주기만 하는지. 나도 엄마가 있었는데, 아빠는 모르겠고, 아빠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엄마가 입양이 되면서 혼자 남았는데, 내가 입양되지 않은 건 내가 너무 말썽꾸러기라서 그렇다고 하더라. 엄마는 아주 침착했나봐.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내 엄마도 아닌데, 내가 가끔 일부러 짜증이 나서 네 옷을 그렇게 찢어놓는데, 그 옷 새로 산 옷이라는 거 아는데도, 성질이 나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래서 그 옷을 찢어놓고, 오늘은 밥 못 먹겠다는 생각으로 의자 밑에 숨어 있는데 네가 와서 밥을 줬잖아. 밥도 주고 심지어 간식까지 줬잖아. 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네 옆으로 슬그머니 갔는데, 네가 울고 있는 거 봤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내가 찢어놓은 옷 때문은 아니지? 나는 너한테서 약간 떨어져서 너를 쳐다봤어. 영문을 모르겠더라고. 왜 운 거야? 아무튼 그래. 나는 8월에 태어나서, 이제 곧 있으면 한 살 더 먹는데. 생일 선물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아. 부담스럽게 선물 줄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 나는 너랑 자주 집에 있어서 좋지만, 너도 가끔은 바람도 쐬고 밖에도 나가고 그래라. 매일 같은 영화만 반복해서 보는 거 지겹지 않니? 

2025년 11월 1일 토요일

25년 10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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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o: 1


이달의 총격려금

10,00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10월 26일 / 10,000원 ― silo/김깃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silo [入] ☞ 10,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17,871원 (0원 + 317,532원 + 339원)

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어언

오늘 세 번째 면접을 다녀왔다. 면접은 항상 좆같은 경험이다. 권고사직을 당한 지 어언 6개월, 행복했던 시간도 실업급여도 슬슬 끝이 보인다. 5개월 정도는 개인사를 돌보는 데 집중했고 이제 좀 진지하게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이 얘기 때문에 부정수급으로 신고당하지 않길 빈다.) 앞선 두 번의 면접에서는 다 안 됐다. 처음 불려 간 곳은 신문사였다. 신문을 교정해버리면 어떨까? 1년 단위 계약직, 최대 2년까지. 월요일에는 1시간을 더 일하라고... 개새들. 다음 간 곳은 무슨 수험서 만드는 곳. 대학교재보다 어렵다느니 교정만 하시면 외주밖에 못하신다느니... 왜 그딴 소릴 늘어놓는 걸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씹새들... 하고 싶지도 않았느니라... 아, 마침 딱 지원하고 싶은 회사를 발견했다! 하지만 기업평을 보니 아주 개차반이다. 이력서를 써보려는데 퇴사자들의 절절 원통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냥 알바나 잠깐 할까? 데이터라벨링? AI의 오류를 교정하라고? 그리고 오늘 면접 본 곳에서는... 말을 말자. 뭐가 어쨌건 무슨 일이든 일을 해야 한다. 어디로든 짐승의 소굴로 가서... 노동은 말할 것도 없이 고통이다. 공고문에서부터 쌔한 냄새 오지는 개 줮같은 회사들 들여다보며 하는 생각: 현대의 노동은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게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의 사타니즘 그 자체다.

이런 답답한 얘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명을 찾아서』의 출간도 드디어 임박했다. 북펀딩이 사흘 전에 시작되어 18일에 끝나고 말일에 출간 예정. 이건 안 답답한 얘기냐 하면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출판사 대표님과는 같이 TRPG 한 사이다. 수상쩍은 인맥으로 출간이 결정된 것, 그야말로 출판 적폐다. 대표는 시인인데 출판까지 해보려는 이다. 자기 책을 내는 것까지야 흐뭇하게 봤는데 이제 남의 책도 만들겠다 한다. 그것도 이런 책을... 이게 말이 되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거는 뭐냐면 펑크다. 사타니즘에 대한 사타니즘이다. 원고를 보내기는 작년 나온 『교정의 요정』과 비슷한 시기에 보냈다. 우리 바지대표 말고 그의 배우자인 실무편집자님(이 사람과도 TRPG 같이 했다)은 ‘이딴 책을 어떻게 파냐’고 낙심해 있던 차에 다행히 ㅁ사의 출판-대자본이 어쩌구 요정으로 먼저 길을 뚫어줘 한시름 놓았다...지만 그래도 큰일이다. 우리는 1쇄를 과연 소진할 수 있을까? 무서워서 몇 부 찍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블로그에다 셀프 광고를 쓰면서는 오만 부 운운하는 미친 소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오백 부 정도인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정’ 때는 제목-표지-도입부 쇼부로 어떻게 사기를 쳐서라도 팔았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두려운 기적이 일어나 오만 부가 나가면 당분간은 일을 구하지 않아도 되...나? 그래도 구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오만 부라는 건 꿈같은 얘기다. 책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그냥 아이돌도 아니고 유수의 아이돌이 되어야만 설 수 있는 올림픽체조경기장(케이스포돔)의 객석 수가 만오천. 이 책이 모범으로 삼는 화장실 책의 영원한 고전 최불암시리즈는 몇 종 만들어져 몇 부가 나갔을까? 최불암 씨는 인세를 받았을까? 아닐 것이다. 얼굴 모를 원고 생산자들은? 모른다... 이게 해적이고 펑크다... 이게 공공재다...

예전에 무슨 스타트업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이른바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했는데, 담당자로서 와○○에 교육을 받으러 갔었다. 후원 곡선은 대체로 U자를 그린다고 배웠다. 추세대로라면 이 북펀딩으로 200권 밀어내기를 목표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는 150권 정도. 중요한 건 이제 그다음이 중요하다. 리뷰어 섭외가 필요하다. 빨간 안경 쓴 그 사람이 일단 떠오른다. 어떻게 ‘우연히’ 그의 손에 책을 쥐여줄 수는 없을까? 잠복해 있다가 어깨빵 갈기고 툭 떨어뜨려... 최근 출판사를 차렸다 하는 배우 P정민도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L동진보다는 그의 손에 책을 쥐여주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타짜 3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아니면 L재용도 괜찮다. 책에 아버지 얘기도 나오는데... 보니까 뭐 어디 누구랑 치킨 처먹고 있더만. 아직도 좀 모자란 도련님 이미지인데 책을 통해 이지적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수필의 명수 P근혜는 내 맘속에 언제나 있는 섭외 대상 1순위. 맘속의 섭외 대상으로는 S경숙도 빼놓을 수 없다. 즉 이 책의 리뷰어는 그런 분들의 저 반대편에 계신 여러분, 여러분뿐입니다... 무료 여러분... 여러분이 아니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오까네를 남긴다든가 하는 그런 감정적인 접근과는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사기를 칠까? 사기는 없다... 몸통박치기다... 이건... 이건 복수다... 내가 심리조작을 통해 책을 팔려 든다고 오해하지 않길 빈다... 이건 복수다... 여러분의 복수다...

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마른 꽃잎 하나가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몰라

어깨에 조금 붙어서
그의 하루종일을 넘겨다볼 뿐

이 거리의 사람들 다
가벼운 재질의 여름옷 입고 있는데
아저씨만 몸에 붙는
블랙야크 등산복을 입은 거예요

때는 밤이었고
사람들 어디로든
돌아가 쉴 곳 찾고 있는데
아저씨 가게만 밤새 거기 있을 것처럼
조명을 환하게 켜놓고 있는 거예요

간간이 오는 손님들은
그와 약간씩 대화합니다

꽃 이름 몇 가지 물어보고
감당할 만한 가격인지 체크하고
힘든 사람 위로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것
적당히 챙겨서 떠나지요

나는 어깨 너머로
아저씨가 권하는 아름다운 것

카라를 신문지에 싸주며
이게 더 낫다 말하는 것

라벤더의 꽃말은 “기억해주세요”랍니다
허허 웃으며
너스레 떨 줄 아는 것

하나하나 보고 배웁니다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는
뭐든지 겪고 있으니까

우연히 아저씨를 겪고 있어요

그가 견디는 박살 난 화분을
뿌리가 거꾸로 난 마른 식물을
흙과 뒤섞여 범벅된 바닥을
나도 견뎌봅니다

꽃집의 분위기는 적당히
아저씨 하고 있고
그나마 자신이 오래 해온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손님 맞고 식물 관리하는 일과
다 말라서, 그의 어깨에서 날아갈 때까지의 내가
남은 생애에 하는 일이
구별되지 않을 때가 좋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나는 몰라요

그런데 아저씨를 한다면
그의 어깨 정도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내게 아저씨 하라는 사람
세상에 아무도 없지만요

2025년 10월 25일 토요일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 실라에게

실라야. 너는 오늘도 나를 피해 도망가는구나. 나는 오늘도 도망가는 네 뒷모습만 봤어. 도망가는 뒷모습만 보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생각하면서. 인간들이 도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을까. 너는 다른 고양이들이랑은 잘 지내잖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쩌다 너를 만나게 된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지. 내가 고양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근데 네가 고양이인 나를 또 싫어했을지 모르지. 우리 둘 다 인간이었어도 서로 미워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우리가 다른 종으로 태어난 것은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나는 매일 같은 시간 너를 찾아가면서 언젠가는 네가 나를 조금은 믿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나도 아무도 믿지 못하거든. 오늘도 네 뒷모습만 보고 돌아왔지만 나는 네 생각만 하면 행복해져.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건 예상 못한 일이야. 하지만 나에게 이미 나를 피하는 무언가와 사랑에 빠지기 쉬운 어떤 조건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해. 근데 그게 왜 하필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인지는 모를 일이야. 정말 모를 일이지. 모를 일들이 일어나는 중이야. 나는 오랜만에 카페에 와서 앉아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인데,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 좋아. 이런 분위기 속에 있는 것이 행복해. 나는 혼자 있지만 말이야. 혼자 네 생각을 하면서, 내일은 너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고,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내가 너를 피하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도망치는 네 뒷모습만 보고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닐까 하면서. 너를 위한 노래를 만들고 너를 위해 글을 쓰고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더 중요한 일이나 더 하고 싶은 일은 없고.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아프지만 떠날거라는 다짐도 하면서. 사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나는 너를 보면 내 안에 뭔가 환하고 좋은 것이 드러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나를 조금만 덜 피하면 좋겠지만. 나는 내일도 같은 시간에 너를 만나러 가겠지. 너는 내 마음을 모르겠지만, 그래서 가끔은 좀 슬프지만, 그래도 내가 슬픈 게 낫지, 네가 슬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랑니 뽑고 다음 날 아침

피를 뱉고 놀라웠다!

어떻게 몸에서
이렇게 역겨운 색깔이
나올 수 있지…

피부 아래엔
내가 먹은 빵과 풀 비슷한
자연적 색깔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일요일의 상한 굴
쓰러진 거인의 타액
너무 피곤해서 죽어가는 사람의 냄새가
절망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감은 눈꺼풀 속에서나 끈적거리던 기억이
세면대 위를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스무 살, 나 같은 애들로 빼곡한 대형 강의실에서
교수는 어느 스페인 화가의 투우 동판화를 보여주었지.

정오의 뜨거운 태양 아래
창을 든 군중들이
소의 힘줄을 찢고 있었어.

한 사내는 장대를 들고
인생의 단독 무대처럼 사방으로
소의 등을 뛰어넘었다.

이 그림의 제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완전히 죽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였던가?

소는 자기 목숨만큼이나 짧은
그림자를 밟고 서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공황에 빠져 있었어.

다 끝나기 전까지는 차라리
축제 같은 느낌이었고
은회색 그림 속엔
단색조의 긴장감이 흘러넘쳤어.

하지만 화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지.
교수는 그래서 예술가인 거라고 했어!

커브를 돌며 피하는 소의 등허리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거든,
관중석까지 피가 튀자
그림 전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거든…

그때 내가 목격한 건
날카로운 철침으로 선을 새긴 뒤
산을 뿌려 부식시킨
금속성 폭력이었어.

나를 매달리고 애원하게 만드는 냄새,
나를 두 손 들고 굴복하게 만드는,
함부로 폭도 같은 피 냄새…

이제 나는 더
뽑을 사랑니가 없다.

마음속으로 여러 번
남의 등에 칼을 꽂고
거기서 멈추지도 않아.

살아서 움직이는 우유처럼
없는 상상을 하지 않아.

그런 건 내가 만든 시신들을
하얗게 표백할 때나 의미가 있다.

어제는 뭘 죽였을까?

잊어버리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해.

오늘 아침처럼 가끔씩
입안에 머금은 피를 생각하고.

2025년 10월 1일 수요일

25년 9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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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총격려금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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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17,532원 (0원 + 317,106원 + 426원)

2025년 9월 28일 일요일

쓸데없이

날카로운 모서리에서
서서

돈 벌기.
멀리 안 가기.
인생 보내기.

(이때 내가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

내가 읽는 책은
좌절하는 느낌들에게
찬성표를 던진다

  1장. 빵 한 조각은 아무것도 아니다
  2장. 그 루프가 시작되면 산산조각 폭풍처럼
  3장. 신발 뒤축을 끌고 다니는 녀석들이 있다
  4장. 고무나무 잎에서 흐른 피
  5장. 우울 조리개를 개방하며
  6장. 버터가 된 H빔 호랑이의 투쟁

 감사의 말: 옥수수 수염 같은 부드러운 식물성 한 토막.

이 모든 걸 합친
잉여 쓰레기 늙은 여자 머리채.
  ―모서리 끝에서 굴려버린다.

세상에 아주 많은 평범한
굴러떨어진 죽음들이
이불 속에서 날 안아준다

내가 죽여놓고도 모를 죽음들이
나머지 생을 살아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 밤
나는 잘 크는 아이다

잠들기 전 읽는 과학책에서:
  얼마나 많은 공룡이 석유 1리터에 녹아 있을까?
  왜 인간은 언제나 최첨단을 추구할까?
  나와 돌멩이의 공통점은?

물으며 나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며 마구 자라버린다

아무것도 못 느끼는 하루가 많고
서서히 마음에 들지 않는 급가속.

엄마가   물려준. 공포의. 지폐와
아빠가 만들어  준 적 없는. 잡채 사리가. 머릿속에. 한  가득.

자,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맥주를 마시자.
노란 밤 어른의 맥주.
언젠가 암 덩어리가 될 수 있는
어른의!
뭐가 흔들리지 않냐고?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

모든 것에는 속옷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것은 속옷을 입고 있다
내 몸은 모든 것.
남의 속옷을 입고 있다

(이제 머릿속에선 속옷이라는 바람이 분다)

나는 하면 할수록
허탈한 맥주를 마신다.

허탈한 맥주를 마시는
나에게 찬성한다.

그리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도 속옷 바람이잖아)
(맥주 좋아하잖아)

2025년 9월 8일 월요일

루프

 

그 루프가 시작되면 뭘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 루프는 마치 알고리즘을 타고 여기서 저기로 밀려가듯이. 그리고 도착하고 나면 거기에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게 된다. 어떻게 왔는지가 중요할까?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이 모든 우연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하지만 그건 알고리즘도 딱히 설명해줄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냥 말이다 그냥.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냥 말고는 따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누구나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너는 책임을 피해 책임보다 한발 먼저 이동한다. 너는 우산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그건 책임을 피하고 싶은 것과 같은 원리이다. 비를 한 방울도 맞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비를 흠뻑 맞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면 그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감정 표현을 극도로 절제한다거나. 네가 감정 표현을 극도로 절제하는 건 아마도 많은 가정에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네가 상상하는 남성성에 대한 이미지. 그것은 너의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했고 너의 부모님의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아이에게 네가 상상하는 남성성의 이미지를 물려줄 것이다. 그 루프는 돌면서 회전하면서 양상이 변한다. 하지만 그 루프는 이미 시작되었고 끝날 수도 있고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확률로 따지자면 반반이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떨어지던 잎이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 건 그때 마침 네가 그 아래를 빠르게 지나갔기 때문이다. 너는 담배를 피우면서 걷는다. 누가 담배 피우는 너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막아도 너는 그냥 걸어간다. 그 때문에 잎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 일이 그렇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너는 어떤 귀찮은 사람을 피해 가고 있었고, 너는 아무것에도 딱히 관심이 없다.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한 선택은 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 너는 네가 충분히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는 너로 인해 잎이 방향을 튼 것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이 잎이 떨어지는 쪽으로 달려가 잎사귀를 손으로 잡으려고 허공에 손을 휘젓는다. 너는 미신을 믿지 않고 너는 항상 좋은 성적을 얻는다. 너의 친구 가운데는 극우 정당에 투표하는 친구가 있고,  너는 그 친구와 토론을 벌이지만 그 친구와 친구 관계를 끝낼 생각은 없다. 네 주변에는 그런 친구들이 많고, 너는 그 친구들이 너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네 안에는 네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니? 없어 보인다. 너는 네가 비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항상 애매한 위치에 서 있으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유리한 쪽에 서 있었던 것처럼 하는 것이 너의 특기이다. 왜 그런 곳에 위치하게 되었냐고?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그건 마치 오른쪽으로 떨어지던 깃털이 방향을 바꿔 왼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너는 그런 식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깃털을 잡으려고 허공에서 손을 휘젓는 사람에게는 깃털이 전부이다. 

 

 

 

 

2025년 9월 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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