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7일 금요일

...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교수들 원고처럼 혼란스러운 시국이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같은 오류를 다시 반복할 것인가? 아닌가? 예측을 넘어 개입해야 한다. 개입을 통해 예시해야 한다. 예시를 쌓아 본이 되게 한다... 그들로부터 우리를, 우리로부터 그들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를 그들에게 집어넣고 그들을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그 일은 일어난다. 그것이 내가 배운 교정 정신이다. 앞날이 어찌 달리 전개되어야 할지 상상하기 위해서라도,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일을 해둬야 한다.

사적인 얘기로 시작해보자. 내게는 적赤의 좌우명 셋과 백白의 우좌명 셋이 있다. 백의 우좌명 셋은 다음과 같다: 1) 하면 된다. 2) 안 되면 되게 하라. 3)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모조리 죽여라. 앞의 둘도 참 좋지만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는 건 곱씹을수록 좋은 지혜 같다. 하느님은 번역되길 기다리며 쌓이고 있는 비유다. 사실에 가깝게 보아, 하느님이 있다 치면 죽이는 쪽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매일같이 아주 오랫동안 떼거리로 죽이고 있다. 하느님은 도살의 광기를 맡아 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성의 심판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은 이들, 죽은 이들에 대한 우리의 물화된 기억이다. 도살의 이성, 광기의 심판이라 바꿔도 무슨 상관일까. 어쨌건 하느님은 잠깐의 반짝임과 긴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허투루 흘러 사라지는 듯한 개개 모조리에도 포개어진 진실이 있다는 것이고, 피눈물이 나는 참경의 와중에도 차거운 홀가분함이 있다는 것...

너무 갑자기 너무 멀리 간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하려던 이야기를 해보자. 지난여름, 이 교정공기가 원고로 포함된 책 『교정이 요정』이 나온 뒤부터 나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감상문들에 대한 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종이책의 물리적인 경계를 통해 인도되는 특정한 종류의 고전적인 광기가 있으며, 그 광기는 오늘날의 방식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 저자이자 독자로서 나는 독자이자 저자인 이들의 길고 짧고 반짝이는 감상문들을 최대한 읽어보았다. 놓친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거의 모두일 것이다(...모조리 죽여라). 그렇게 들여다봤으니, 혼자서만 무슨 생각을 하고 말기에는 음험이고 배임이고 착오다.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독자들이란 도살의 하느님이다. 이 시국, 물질과 환상이 서로를 향해 역류 중인 이 시국에... 독자들이 반쯤 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들도 반쯤 미쳐 있다. 이제 나, 교정공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교정의 요정』은 글을 교정해주는 요정을 뜻하지 않는다.
『교정의 요정』은 교정을 주제로 삼지 않았다.
『교정의 요정』은 일기장이 아니다.

‘~이 아니’라고만 하는 나를 부디 용서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의 아닌 것들은 농담이 아니다.

문제는 책이 아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편집자분들의 감상이었다. 어떤 편집자 아저씨는 보도자료만 읽고서는 ‘버티다 보면 자신과 같은 훌륭한 편집자가 될 것’이라고 농을 써놓았다. 그 감상에는 대표적인 면이 있었다. 내가 많지 않은 시간에 기대어 쓰고 싶은 것만 썼듯 많지 않은 시간에 기대어 읽은 척한 다음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 서로의 하고 싶은 말을 겹쳐보면? 나는 무슨 훌륭한 편집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 노동에 ‘좋은 책’ 같은 개념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나는 내 노동의 결과물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내가 심리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는 직종은 인쇄기사이지 편집자가 아니다. 나는 훌륭하게가 아니라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상황이 허락되는 한 최대한 태업한다. 책 역시 태업의 결과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문제는 책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일까? 내 임금이 너무 낮게만 느껴진다는 것일까? 교정이라는 일 자체와 내가 맞지 않는 걸까? 항상 나는 그 생각을 한다. 오직 시간만, 오직 인간의 시간만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도 점점 더 많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부터 유리된 각자의 방식대로 인간성의 마모가 관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아니다

저자, 특히 교수에 대한 욕을 중심으로 공감을 표한 감상들도 많았다. 이 감상문도 그렇게 시작했듯 욕하기는 언제나 재밌는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교수가 아니다. 누군가들에 대한 욕으로만 문제가 마무리되고 문제가 반복된다는 것이 우리가 직면 중인 최대의 문제다. 바로 지금과 같이, 마모된 우리의 인간성은 드러난 채 화를 모으고 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도 교수님들 덕에 피가 거꾸로 솟는 나 자신을 자료로 삼아 화의 까닭과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봤다.
  • 틀리는 새끼
  • 맞아야 하는데 틀리는 새끼
  • 틀려놓고 맞다고 우기는 새끼
 ↑살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음
 ↓천하의 개씨발좆같은새끼들
  • 틀려놓고 맞다고 끝까지 우겨서 기어이 관철할 수 있는 새끼
  • 맞고 틀리고의 기준을 지 좆대로 바꾸려는 새끼
  • 맞고 틀리는 것은 없으므로 맘대로 써도 된다고 선동하는 새끼
한 인간을 천하의 ㄱㅆㅂㅈㄱㅌㅅㄲ로 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대체 어떤 힘이 그에게, 또는 나에게 작용한 걸까? 잘못은 인간이 저지르는 것이지만 인간이 잘못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들과 우리는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다. 문제는 인간‘들’이다. 문제는 우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 우리를 다루는 우리의 방식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이지만 ‘우리가 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제하는 생활상의 절벽 앞에 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경사로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 일은 한 인간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그 일은 한 인간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문제는 언어가 아니다

세계가 박살 나고 있는 와중 두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언어는 중요하다는 생각과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네 말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증오스럽고, 내 말은 너무 하찮기 때문에 마구 흐른다. 또는 그 반대...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들은 손잡고 돌다가 서로를 깨물고 껴안았다 쥐어뜯는다. 시대, 시간, 사건, 화자, 독자, 지면... 온갖 것들을 따라 언어는 일렁인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대로 기록되는 듯하고 모든 것이 더 분명한 것만 같은 이 시대에는, 더 높은 해상도로 흔들리며 더 큰 현기증을 부른다. 하느님이 비유라면 지금 그것은 우리를 우리로부터 찢어 놓는 시험을 벌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유다. 우리는 점점 더 말을 잃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크게 말하고 있다. 점점 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된다. 언어는 중요하다는 생각과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다. 함께 쓰는 말이 찢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세계가 박살 나고 있는 것이 맞나? 박살 나 있던 세계를 우리가 비로소 나눠 갖기 시작했을 뿐이다. 문제는 언어에 있지 않다. 문제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간에 ‘있다’. 문제는 아직 내가 읽지 않은 곳에, 읽었지만 대충 지나친 곳에, 아직 언어가 등장하지 못한 곳에, 언어가 과잉된 곳에, 자신조차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곳에, 언어가 중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음성의 허공에, 노출된 인쇄면과 그 상공에 떠있는 것 사이에 있다. 움직이는 쪽은 언어가 아니라 우리다. 죽일 것인가? 언어의 구름을 밀면서 우리는 가게 될 것이다. 혼란은 이제 시작이다.

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후일담

K가 다 측량하고 난 뒤 사람들은 그것을 기원의 햇빛이라고 얘기했다. 저 너머의 성에서 뛰쳐나온 행렬들 이벤트는 다들 그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모두 웃음 짓는 얼굴이었고 기뻐했다. 기념 리본을 매단 검은색 증기 리무진이 K에게 도착했다. K는 조수들과 함께 탔다. 그의 조수들은 경박스럽게 벌써 할로윈 복장을 입고 드문드문 이 분위기와 열기에 어울리는 흰소리들을 내뱉었다. K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했구나. 분명한 것은 전 날까지도 측량 작업이 이렇게 곧바로 끝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조수들은 그것을 미리 안 듯했다. 그것을 모른 건 여기서 K 혼자뿐인 것 같았다. K에게 판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일에 깊게 몰두했었음이 이유로 여겨졌다. 나온 사람들은 K의 이름이라 생각되는 것을 연호하면서(K는 자신에게 그런 이름이 성 안에서 붙여졌구나 탄식했다) 노점을 열고 북적북적댔다. 증기 리무진은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나아갔다. 게다가 곧장 가지도 않고 사람들 행렬을 빙글빙글 돌기까지 했다. 성과 외부의 통신이 중단되었던 그런 단절로 말미암아 서로가 일종의 괴물들로 비친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내내 성 사람들이 K의 측량을 기다렸단 것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말을 하는 조수들의 말에선 과장의 기미가 엿보였다. 그러나 밖을 내다보면 사람들의 기쁨이 솔직하게 증명되고 있는 순간이 계속되었다. 성은 그렇듯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K는 기원을 열었다는 말들을 수첩에다 적어놓았다. 측량이 그랬다는 것인데, 어떤 맥락인지 알기가 어렵고 단지 거기 담긴 감정만이 진실된 듯했다. 그의 작업이 이렇듯 큰 기쁨으로 변질될 줄은 몰랐으므로 어정쩡하게 한 번 웃어 보이기도 했다. 묵빛의 증기 리무진에서 내리고 K는 성의 총독을 만났다. 그는 K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번의 총독은 그대라고 선포했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들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측량이 단순히 완료되어서라기보단 어떤 정치적 공작이 있었을 법도 했다. 이들은 단순히 후계자가 생긴 것이 기쁜 특유의 고립된 문화가 가진 폐쇄성을 보이는 것 같았으며 그 이전의 얼개에 대해선 짐작할 수 없었다. K는 그럼에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째서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 일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까 만난 사람들의 기쁜 얼굴이었다. 그것을 부정하고 다시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엔 그는 이미 이곳의 위정자가 되어 있었다. 지쳐 있었다. 물론 이 성에 오래된 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K가 그런 얘기를 꺼내자 총독은 자신도 그러했다 일러주곤 한 손에 포도주를 들고 총독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주의 깊게 듣지 않아도 괜찮다며, 자신처럼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여유롭게 듣길 권했다. 어려운 일은 다 끝냈으니 말이네(그것도 자네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측량 작업이 중요했던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인식의 나무에 열린 선악과를 언급했다. 판단하는 언어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과실에 얽힌 뱀에 대한 얘기를(그들은 그 뱀을 신앙한다고 했다)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K의 드라마를 자신이 알았다는 것이다. K는 이 사람의 말이 왠지 낯설면서도 온유하게 자신의 과거 격정적인 시절을 품는 것 같아 마음이 빠져들었다. 왜 측량 작업이 기원후라고 말해지는 건지요? 전임 총독은 자신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운을 뗐다. 그리고선 그는 다시 인식의 나무에 달린 선악과 얘기로 되돌아갔다. 아마 그도 잘 알지 못하는 주제인 듯했다. K는 자신의 의아함을 해갈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쭉 진행해가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러면서 K는 하나의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괜찮다는 것이 그랬다. 하나의 궁금증이 생기긴 했다. 측량이 그들에게 있어 필요한 외부의 것이었다면, 그것으로 인해 무엇이 바뀌게 된 걸까? 그 이전의 일들은 측량이 아니었던 걸까? 총독은 아까부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K는 듣고 있었고 마침 K가 궁금하던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그 측량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곳의 사람들이 마음껏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진 땅이(총독으로부터 나온 것이긴 하지만) 생각하던 것보다 측량에 따르면 비싸게 매겨졌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K는 지나온 날들의 절망을 기억했다. 거기에는 기쁨도 함께 있었으나 앞으로는 그와 마찬가지로 슬픔이 함께 있을 것이었다. 평안함과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다. 총독의 제안을 애써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 같았고 K는 그럴 생각이었다. 어차피 거부하기도 어렵게 된 것 같았다. 총독은 그런 K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운이 좋다고, 자네나 나나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K는 해골의 눈두덩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광경을 떠올렸다. 연말인 시기였고 그런 크리스마스가, 어릴 때 이후로 만나지 못했던 안온한 시기가 되돌아온 것 같았다. 총독은 수다스러웠고 그가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계속되었다. K는 그 사람이 술을 잘 못 마신다고 생각했다. 마셔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이가 건네는 포도주 잔을 받고 그는 좀 더 능숙하게, 과거에 익숙했던 것처럼 몇 모금을 목구멍의 어둠 안으로 넘겼다. 총독은 껄껄 웃으면서 그렇게 총독의 자리를 넘겼다. K는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조금 취한 채로 뒤에 시립해 있던 사람을 시켜 조수들이 오게 했다. 측량사 K는 이들의 형식적 위치로 전과 같이 염두에 두고 은근히 사유하는 일 대신 아까까지 총독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시켜 포도주를 더 들고 오게 했다. 맥주도 가져오게 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전임 총독만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K는 후일 밀레나라는 가수를 전임 총독이 그 자신에게 그러했듯 후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것은 전임 총독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절망이 눈에 띄어서였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전임 총독은 당시보다 늙은 채로 두꺼운 토끼 옷을 입고 성 사람들 사이에서 할로윈이면 마시는 음료를 들고 있었다. K는 전임 총독과 후임 총독 사이에서 절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신 이미 절망이 어느 한 시절의 집약된 것으로만 떠오를 만큼 무뎌진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K는 전임 총독이 그러했듯 밀레나에게 독특한 절망을 보았다. 이는 전임 총독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을지 몰랐으나 인식의 나무로 거슬러 올라가면 맞는 결의 생각일 거라 생각했다. 밀레나가 후임 총독으로 정해졌으니 곧이어 사람들이 다시 기쁜 얼굴로 거리에 나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녀가 감동적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어서일 것이라고, K는 그렇게 생각했다.

2024년 12월 12일 목요일

좀비를 위한 돌림노래

  비틀거리는 검은 머리

  그 속에서 탈출하려는 감각이

  이빨처럼 돋아난다

  텅 빈 시선으로 닫히는 너의 세계


  허기를 따라가다 엎어진

  차가운 짐승을 쓰다듬을 때

  나는 무언가를 약속했고


  살과 삶을 떼어내며 

  사이좋게 나눠 가지는 침묵도

  부패할 수밖에 없겠지만


  너는 으르렁, 노래를 부르고


  침대 위에 올려놓은

  침 흘리는 얼굴 하나


  나를 한번 따라 해볼래?


  목젖 속 짐승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일렁이는 

  우리의 실루엣


  살아있어? 


  그래도 네가 네가 아니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너는 너를 찾는 너의 무리 속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입에서 입으로 온기를

  심을 수 있을 것 같은 밤


  혼자 하려니 무섭지?


  심장이 썩는 속도만큼이나

  사랑은 느리게 스며들고


  나는 떠미는 법을 잊어버려 자꾸만 네게 네 몸을 돌려주려 한다 덮을수록 더욱 차가워지지만 네게 남은 것인데, 이 몸은 어쩌지

  나는 아직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너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죽어 있는 순간은 처음이라 오랜 시간 네 몸 위로 너를 토했지 너는 


  우리의 포옹이 속삭인다

  알아들을 수 있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이상하게도 부패는 상냥했고


  누가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 왔다

  몸이 춥고 배고픈 것이 느껴져 좋은 기분


  이제는 안에 있던 것들이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시간 나는 위험한 우리를 사랑하고 싶어서 창문을 열었다 떨어진 유리알같이 조금씩 깨지고 있는 세계


  멀리 굴러갔던 몸들이 모여 있네 그래도 여전히 세계는 그저 세계일 뿐 그저 너의 노래가 흐르고 사람들은 도망가고 있는 세계 우리는 손에서 손으로 우리를 건넨다 가볍고 따뜻한 침묵으로부터 몸이 몸을 배반하는 미래로부터 배부르고 따듯해지기 않기 위해 그저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잡고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24년 11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3,499원 (0원 + 303,183원 + 316원)

2024년 11월 28일 목요일

빈 방을 위한 허기진 이야기

  비어있는 곳을 비어있는 것들이 이어나간다
  나는 침묵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방에 
  뚝뚝 침을 흘리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 안에는 아직 당신을 삼키지 못한 내가 있고

  이곳을 지키는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늘어지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있어

  당신이 굴리던 볼펜 끝에서 망가진 문장들이 흘러나오고 당신이 남긴 침묵과 나의 침묵 사이엔 낯선 영원이 태어나고

  다만 이것은 오래된 일이어서  
  아직 나에게도 갓 태어난 소문인 일  

  왜 하필 당신은 사라지기를 사랑해서 

  당신처럼 이곳을 통과하려고
  눈을 감아보아도 나는
  여전히 아무런 미래가 없는
  꿈으로밖에 가지 못하는데

  이 사실을 어찌해야 해?

  당신을 없애기 위해
  조금은 혼잣말을 곁들여도 될까?

  나의 일기장이 메말라 가는 동안에도 
  어디서든 어디로 이어지는 당신은
  또 어딘가로 뻗어나가는 최선의 것

  구부러진 약속과 망가진 희망이 이어나가는 당신의 릴레이
  그러다 모순이 허기를 어루만지는 저녁이 오고
  오랫동안 자라나는 당신을 바라보다 잠에 들었어

  투명한 몸을 입고 온 당신이
  더 이상 비어있지 않기 위해
  어린 당신을 데리고 나간 것 같아
  아마 바다나 안개 그런 곳으로

  축축하고 끈적이는 아침

  포옹이었던 것들이 벽지 위에 찰랑인다

  밤새 오래된 이야기를 지키던 아름다운 단어들이 이제 이곳의 공기가 되겠지 더 이상 우리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약속이나 비밀이 되며 망가질 필요도 없이 구석구석 가지런히 흔적이 죽어가는 친밀한 현실 속에서 고요하게 잠든 완벽한 기억을 봐 도무지 이것은 이야기처럼 보이질 않을 거야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당신을 상상하는 것처럼

2024년 11월 25일 월요일

산의 중턱에서

산 중턱에 도착한 그들의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들도 알지 못한 사이에 숲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것 같았다. 산의 비탈을 따라 내려오던 그들이었다. 그동안 희미하게나마 길을 밝히던 달빛도 감지되지 않았다. 하늘을 보려 고개를 올렸지만 달라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그들의 눈앞을 지나가던 풀벌레들이 있었다. 달빛을 가로지르며 지나갈 때마다 수면이 깨어지듯 빛이 일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곧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갈 것이다. 이런 낙관으로 당혹감을 떨쳐내야 했다. 몇 걸음 걸어 보았지만 곧 멈추었다. 한 발 내딛는 일이 마치 깊은 골짜기를 뛰어 건너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온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다고 확신했다. 드디어 어둠이 그들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산의 중턱이었다.

온 세상이 어둠에 휩싸이기 전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다 마주친 중년 남성이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산의 중턱에서 그 순간에 직면할 것이다. 다들 그때를 준비해야만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산의 중턱이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 알 수 없다. 산의 중턱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당신들에게 내가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진실을 일러주겠다. 나는 이미 산의 중턱에 서 있다. 지금 이곳에서 빛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은 아직 산의 중턱에 도달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들이 다시 걷기로 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들은 일어나 어떻게든 계곡 사이를 뛰어넘어 가기로 했다. 빛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걸음은 산의 중턱에 도착한 순간부터 도약의 연속이 되었다. 몇 번의 도약이 있고, 그들 중 하나가 넘어졌다. 팔꿈치가 쓰리지만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가 크게 다쳤고 얼마간 쉰 뒤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둘 중 하나가 넘어지고 앞니가 박살 났다. 턱이 두 동강 났다. 어깨가 빠졌다. 무릎이 쓸렸다. 발목이 꺾였다. 별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럼에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멈추어 선 상태에선 아무런 가능성도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판단 유예도, 유보도, 추이를 살펴보는 모든 일들이 그들에겐 살점을 내어주는 일과 같았다. 그들은 이런 어둠을 준비해본 적도 없었고 아니, 그에 대한 준비가 가능하긴 한 건가. 다만 걷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아픔을 동여매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그들을 한 사람이 지나쳐 갔다. 그는 바닥에 긴 불꽃을 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불꽃에 드러난 것으로 보면 그는 마치 머리를 끌며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불러 어떻게 하면 불꽃을 그릴 수 있는지 물어보고자 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 새빨간 흙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가 그린 궤적을 따라 내려오는 한 무리가 있었다. 무리 역시 모른 채 지나갔다. 붉은 흙이 사그라들었다. 그들은 다시 어둠 한가운데 걷는 신세가 되었다.

그 불꽃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그들 중 하나가 쓰러지며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그 과정에서 두개골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다. 넘어지지 않은 다른 하나가 두개골이 땅에 부딪히며 발생한 불꽃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불꽃의 정체가 규명되었다. 달빛도 별빛도 꺼진 이 세계에 두개골로 만든 빛만이 점멸하게 되었다. 그들은 애써 머리 가죽을 벗겨내고 땅에 머리를 부딪쳤다. 붉은 불꽃이 사그러지는 동안 서 있는 하나가 나아갈 길을 가늠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즉 빛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개골이 드러나야만 했고, 그것은 당사자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 일을 한 사람만 하자는 것이다. 한 사람은 계속 머리를 끌고 한 사람은 계속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제 한 사람에게 고통이 집중된다는 점에서 이전에 그들이 취한 방식보다 진보했다고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아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머리를 끄는 동안 하나는 비명을 참기 위해 애써야만 했고, 나머지 하나는 억눌린 비명을 고스란히 들으며 그의 시야를 겹겹이 메운 의심을 몰아내야만 했다. 그것이 안쓰러워 나머지 하나가 두개골을 드러내고 땅을 기며 피고름에 시야를 가릴 순 없었다.

이런 식의 여정이 이어지고, 놀라운 일이 발생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머리를 끄는 쪽의 두개골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의 머리에서 안구는 곪아 사라졌고, 그 사이를 응고된 핏덩어리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코 또한 쓸려 사라졌다. 목뼈는 이미 뒤로 휘어 있었으며 비명을 감추기 위해 부푼 혀가 입안을 채우고 있었다. 바닥에 붙은 코 대신 터진 고막이 펄럭이는 귀를 통해 호흡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사지를 헤매고, 으깨어진 뇌가 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빛이 빠르게 사그라진 것이 몇 번이었다. 그의 귀에는 굳은 뇌수의 거품이 엉겨붙어 있었다. 서로의 역할을 바꿀 수 없을 만큼 멀리 갔기에 아예 몹쓸 동정심으로 이 여정을 포기하기로 결정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두개골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며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덕분에 이전보다 더 밝은 빛을 낼 수 있었다.

내 생각엔 그것은 뼈보다는 아주 단단한 각질에 가까웠을 것이다. 지금 이곳을 낮게 울리는 거대한 존재들의 성장 과정 또한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존재들은 그 크기에 걸맞는 어떤 폭발적인 계기가 있었을 뿐 그가 전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이따금 그들을 지나치던 무리가 있었다. 대체로 세 명에서 네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무리가 머리통을 운영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머리통의 운동 기능을 살려두거나 머리통의 운동 기능을 다른 이에게 전담시키는 것이다.

이전의 무리는 전자의 방식이었다. 한 명의 ‘머리통’을 데리고 있고 또 하나의 교대할 머리통을, 나머지는 반쯤 기능을 잃은 눈으로 길을 판독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길을 찾아 나갔는데, 그러기 위해서 머리통이 탈진하기 직전까지 몰고 다닌다. 결국 그 머리통이 탈진해 운동능력을 상실하고 나면 나머지 머리통이 뒤를 잊고 탈진한 머리통은 다른 한 명이 부축해 가는 방식이었다. 저들이 두 머리통을 어떻게 무리에 포섭했는지, 혹은 무리 내에서 뽑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을 걷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그들’ 또한 한 명의 고착된 머리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죄책감의 연대 때문에 감히 물어보지 않았다. 누구도 서로를 지옥으로 떠밀진 않았다. 다만 누군가는 결국 지옥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이런 일들은 항상 아무 말 없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또 다른 무리는 머리통의 운동 기능을 다른 이에게 전담시키는 예가 될 수 있겠다. 다른 누군가가 탈진한 머리통을 끌고 가는 것이다. 이 방법은 무리 안에서 머리통을 하나만 보유하면 된다는 장점이 있으나 그 머리통을 끌고 가야 할 사람이 탈진할 경우를 대비해 나머지 하나가 길을 살피는 한편 교대를 위해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이전의 무리에 비해 무리의 덩치를 더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머리통의 크기 자체도 다른 무리보다 더 크다. 머리통은 거의 가사상태로 내버려 둔다. 역시 이 무리의 머리통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끌고 가는 사람이 앞에 위치해야 했기 때문에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어떤 무리가 다른 무리와 마주치게 될 경우에는 아무래도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각 무리 간에 싸움 전야의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그 무리가 몇이건 상관없다. 어떤 무리가 먼저 앞으로 가면 생기는 불꽃으로 나머지 무리가 뒤따라간다. 물론 나머지의 머리통은 땅에서 떨어진 상태로. 아무리 굳은살이 빠르게 발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국면을 넘어서야만 한다. 대개의 머리통은 그것을 못 버티고 죽는다. 대부분의 무리가 그런 머리통을 보유한 상태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 국면 이전에 있는 머리통을 땅에 끄는 것은 무리에 있어서 아주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신경전 끝에 여러 무리가 한 무리로 통합되는 경우가 있고, 치열한 싸움 끝에 대부분이 죽는 일도 벌어진다. 이럴 때는 살아남은 몇 사람들은 죽음의 긴장을 안고 한 무리로 통합한 후 다시 산 아래로 향한다. 결국 누군가는 머리통이 된다.

나는 머뭇거리는 무리와 마주친 일이 있다. 나는 아직 산의 중턱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길을 안내하길 자청했다. 그들 또한 내가 그곳에 도착하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무리에 끌어들이고자 노력했으나 나는 그냥 안내만 하겠다고 거절했다. 다만 그때의 내 걸음은 긴장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산의 중턱에 대한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이렇게 걸음을 재촉하다 산의 중턱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무리 사이에는 희미한 빛을 덮으며 등장하는 산 너머의, 산 아래의, 산의 골의 엄청난 빛의 근원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저 빛은 너무나 강해 이들이 길을 찾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산의 중턱에 닿기 전 그 빛의 근원을 본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그것이 거대한 머리였다고, 거대한 바위였다고, 거대한 산이었다고, 거대한 산이 움직이며 우리가 산 아래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 거대한 것이 이동할 때 울리는 대지의 소리는 이미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 중 하나는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운동능력을 갖춘 머리통이 스스로 팔과 다리를 움직여 무리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거대한 머리를 끌며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그 빛이 다른 머리통에 비해 강했기에 그가 지나간 땅은 한동안 달아올라 있었고, 그 빛을 따라 이동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며 그런 식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거대한 머리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무리는 오랫동안 나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얼마 지나 나는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미 각자 머리통을 갖고 있었고 머리통들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피부가 두개골을 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부가 두개골을 가리기 전에 다시 사용해야만 했다.

내게 굳은살에 대해 말한 ‘그들’을 또 보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내가 이전에 안내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둘이 머리를 끌며 이동하던 중 십수 명의 시체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마침 발생한 산 아래의 빛을 통해 그들 중 몇 명의 머리통에서 각질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통은 이미 너덜너덜하게 박살 난 상태였다고 한다. 추정컨대 그들은 각질이 생긴 머리통의 독점 여부를 놓고 다툼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머리통의 시체에서 발생한 각질은 여전히 쓸모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들은 그의 머리통의 머리에 굳은살이 생긴 머리통 일부를 보철하는 시도를 해 보았다고 한다. 그 시도는 효과가 있었다. 이미 죽은 머리통은 꽤 큰 상태로 발달했고, 보철한 머리통 세 개 중 하나로부터 굳은살이 발달하기 시작해 그와 함께하던 머리통의 각질과 더불어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기꺼이 그들을 안내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은 처음 내게 중요한 정보를 선뜻 알려준 이들에 대한 예우였다.

우린 오랫동안 길을 걸었고, 나의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우정이라고 할 만한 감정이 오갔다. 그가 보인 머리통에 대한 우정, 피할 수 없는 희생에 대한 죄책감에 나는 깊이 공감했고, 그가 언뜻 내보이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모색은 내게도 깊은 충만감을 선사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나의 실수였다. 나의 잘못된 안내로 그의 머리통이 길에 튀어나온 바위를 무리하게 넘어가려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친구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한편 내게 위로를 건넸다. 나는 죽음의 슬픔보다 실수에 대한 책임에 사로잡혀 겁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그는 서럽게 울다 나를 위로했다. 나는 위로 한마디 못하고 그저 그 상황에 있어서 내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의 잘못이었는지 판단하는 일에 사로잡혔다. 결국 나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거대한 책임에 사로잡혀 길에 주저앉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죽은 머리통의 경련이 멈추었다. 그가 일어나 내게 말했다. 내게 큰 돌을 구해다 주렴. 한 무리가 우릴 지나치며 혀를 찼다. 나는 일어나 큰 돌을 찾아 그에게 건넸다. 그는 그 돌을 죽은 머리통의 뒤통수에 내려찍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내려앉고 뇌수가 튀었다. 그는 완전히 내려앉은 머리통의 머리를 완전히 열고 그 안에 있는 기관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손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들어낸 후 그 안에 가득 찬 피를 빨아내 밖으로 뱉어냈다. 이후 그 안에 흙을 넣어 내부를 깨끗이 닦고 흙을 모두 꺼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끝내고 숨을 돌리며 머리통의 머리맡에 앉았을 때 이를 부딪치며 떠는 내게 말했다. 별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텅 빈 머리통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게 인사를 남기고 단단하게 굳은 시체를 끌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기꺼이 길을 안내하겠다고 소리쳤으나 그는 빠르게 내 시야에서 벗어났다. 피투성이가 된 길가에서 단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몇 개의 무리가 나를 지나쳤다. 그러다 내가 다시 일어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어쨌든 별수 없이 어떻게든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둠의 정오에서 나는 산의 골을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빛을 보았다. 산의 귀퉁이를 무너뜨리며 이동하는 거대한 덩어리들을 보았다. 덩어리를 따라 대지가 으르렁거리며 뒤따라갔다. 먼 산의 탄내가 내게 도달할 무렵, 나는 내가 산의 중턱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겁에 질려 내달리다 땅에 고꾸라져 머리를 처박은 내게 무리가 찾아왔다. 그들이 나를 끌기 시작했다.

2024년 11월 24일 일요일

물건

K는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사기엔 수중에 있는 돈이 조금 모자라다. 조금의 선호를 포기하면 딱 알맞은 돈으로 비슷한 종류의 물건을 살 수 있다. K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 그런데 잠깐. 선호를 포기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물건을 사려는 계획은 취소다. 꼭 원래의 물건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 바뀐 그 물건을 사기엔 왠지 손해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원래의 물건이면 참 좋을 것이다. 하지만 수중에 있는 돈이 모자라다.

K가 사려고 했던 물건은 사실 다른 이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다. 이에 따라 K의 물건에 대해 망설이는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K는 처음 사기로 했던 물건을 사기로 한다. 이럴 때를 위한 것인 듯 잊어버린 현금을 지갑에서 발견했으므로.

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다정 같은 것

죽어 있는 짐승이었다
다시는 그 무엇과도 싸우지 않아도 되는
영원히 자고 있는 듯한
짐승 일부

머리는 남아 있어
다시 깨어나 입 열면
다 꿈이었습니다
잘 놀다 갑니다
무릎 탁 치고
일어날 것 같았는데
아주 일어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전면적으로 눈을 질끈
감게 하는 짐승
약간이었다

나는 커다란 장정 아니지만
마치 그런 사람인 듯
거대한 물러터짐이
가슴께에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한쪽 어깨에 메고
설산을 내려왔다

강추위 속에서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고
너무 죽어서
살아 있었다
털과 이빨이 내게도
있었고 우리의 공통점
조금이었다

숨 쉴 때
옆에 있으면
아주 커다랗게
따뜻하겠지
하지만 숨
안 쉰다는 차이

나는 너무 무거워서
아니 이걸 어떻게
흘려보낼 수 있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 넣어둘까 하다가
제일 아래 칸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 안에서 짐승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라고
푹 죽어 있으라고

매일 나는
일 마치고 돌아와
씻고
옷 갈아입고
서랍을 열어본다

오래도록 안쪽
모서리에 끼어 있는
먼지 같은 짐승 죽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죽어도

셋, 정원

광대가 가지를 끊고 나를 본다. 웃는 얼굴. 광대가 깎은 나무들은 테마파크인 것처럼 모양이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마주 웃었다. 저 광대의 눈에 내가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광대가 이상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광대는 이상했다. 나는 웃음이 일그러졌고 광대는 나를 보며 웃지 않았다. 아까까진 웃었는데. 지금은 웃지 않는다. 무표정한 광대 얼굴. 그 뒤로 테마파크 같은 나뭇가지들. 광대가 내 뒤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직 깎고 다듬지 않은 정원의 나머지 장소를. 여기는 광대의 정원이었다. 광대의 안부를 묻기보단 특별한 정원의 모양새에 관심이 있어 오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나, 나는 광대 앞에서 생각이 저해되었다. 나의 리듬이 느려지고 있었다. 비 올 만하던 날씨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졌고 나를 바라보던 광대가 다시 환한 웃음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검지 손가락을 자기 입 위에 올렸다. 무엇으로부터? 조용하란 뜻인 걸까?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걸까? 광대가 웃음을 떠올린 것은 안도되는 일이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 앞에선 여기 있기가 난감했었으니까. 난 여기에 왜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김광석의 노래가 한쪽에 있는 공원 스피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광대가 공손하게 눈웃음 지으며 왜 여기 있었는지 모를 나에게 뒤늦은 인사를 한다. 나는 광대의 시간을 빼앗고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광대도 마찬가지로 나의 시간을 뺏은 것과 다름없었으나, 나는 왠지 나에게 동정적인 구석이 있다고 느껴졌다. 저 광대에게는 선의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엇을? 광대는 다시 쉿, 하는 제스처를 했고 검지 손가락이 그의 입에서 다시 떨어질 때 그의 턱 주변에 걸려 있던 마스크도 함께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가 마스크를 걸고 있었던 걸 몰랐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가 끝났다. 다른 김광석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광대가 손에 그러쥔 마스크를 놓는다. 김광석의 노래는 이렇다 할 감정을 담고 있었는데 와닿지 않았다. 여기로 오기 전까지 나는 좋아했었는데 말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여기로 오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지? 그것을 광대가 보며 눈웃음 짓는 것 같았다. 새로 꺼낸 마스크를 다시 걸고. 올라가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려오려는 듯 말을 마쳤다. 그 사이에 있던 말은 왜, 왜…… 뒷말은 잘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과장된 나뭇가지 모양들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대가 뒤돌았고 보이지 않는 그의 입에서 나직이 아까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니, 들려오기보단 다가왔다. 나에게 닿아 왔던 것 같다. 아, 생각났다. 나는 검은 고양이를 좇아 여기에 왔다. 그날은 지금처럼 공기가 습하고 빗방울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광대가 한 말처럼 그날은 오늘로 닿아 왔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날이, 앞두었던 그날이 미루고 있었던 오늘로 왔었다는 것이다. 광대는 이렇다 할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무엇을. 그 검은 고양이는. 나는 평범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이 후회되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준비를?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다 기억나지 않았어도 나는 그동안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았다. 광대는 내 앞에서 웃었다. 여기서 정원 만들기를. 하고 있죠. 그 검은 고양이는. 나도 잘 모르겠군요. 광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으나 오직 표면적인 부분만 건드릴 뿐이었고 그는 나보다 준비가 된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건가요. 모두 노는 시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광대 당신이. 이들을 여기로 불러 모은 건가요. 아니요. 스스로들 온 것입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 광대는 세 번째로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나는 그에게서 의미를 가져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좇았던 검은 고양이에게 가고 싶었다. 광대는 잠시 기다려보라는 듯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광대의 품에는 검은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그렇게 광대가 나타낸 것은 광대 자신보다 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이. 검은 고양이가 뛰어내려 야옹,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에게로 다가와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나는 검은 고양이를 안아 들고 광대에게 말했다. 이것이 내 기다림의 결과입니까. 광대가 고개를 저었다. 그와 어떤 말을 나누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광대나 고양이에게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핥았다. 부드럽고 까끌까끌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나는 광대나 고양이를 제외하고도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나도 마스크를 쓰고 싶었다. 말할 때는 마스크를 내리고 그것을 손안에 쥐고 있다가 내려놓고 싶었다. 광대처럼. 나는 광대가 되고 싶었다. 내가 좇은 검은 고양이를 감쪽같이. 불러내는 일을 할 수 있는 광대. 허공의 만족을 위하여.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겐 이성이 있었다. 나는 광대가 아니었다. 그러자 광대가 잠시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 존재와 더 이상 교분 나눌 것이 없었다. 독특한 이성이랄 수 있는 광대가 그런 날 보며 마주 웃었다. 그런 뒤 그는 내 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무들을, 곧 테마파크처럼 가꾸려고 가늠하려고. 나는 광대에게서 사선으로 나란히 걸으며 긴장을 버리지 않았다 고양이가 내 뒤를 따라오는지를 살폈다. 따라왔다. 나는 광대를 방해하고 서 있지 않았다. 그런 도중 가운데쯤의 허공에 누군가의 웃음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눈에 보이는 웃음은 나타나기만 했을 뿐 자기가 누구의 것인지는 표시되지 않았다. 광대가 그 웃음을 만지려는 듯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 품에 있던 고양이가 그곳으로 천천히 뛰어내려 걸어갔다. 거기에는 웃음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흔적]이 남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따라 웃지 못했다. 그건 내가 모르는 것이었으며 이미 지난 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안다는 생각이 곧이어 들었다. 지금 서로 가까워져 가고 있는 저 광대와 고양이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왜인지 익숙한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분위기란 것과 비슷했다. 그것에게로 광대와 고양이가 다가가 셋이 50cm 정도의 원 안에 있게 되었고 광대가 재밌는 것이 생각났다는 듯 원 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하자고, 아무도 안 듣는 권유를 했다. 내가 심판이라고. 고양이는 그것을 묵살했고 둘 사이에 엷어져 가는 그 웃음의 흔적은 이제 [증거]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기다리고 있으면 [쓰레기]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된 웃음이었던 것은 밖으로 내던져졌다. 광대의 손에 의해. 그것은 탄력이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던져진 곳으로 내려앉았다. 기체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잡고 싶었다. 그것은 내 바람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그것은 흔적이자 증거이며 늘 쓰레기가 될 테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것이 웃음의 장막 저편의 다른 무언가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대는 아까 나타난 웃음으로 이미 끝이 난 극이었고(아무도 웃지 않았으나) 남겨진 이들에겐 아무런 유열도 없었다. 나는 이들이 그런 배우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배우들이 광대가 되고 고양이가 되는지 알고 있다. 그건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 생각이 부끄럽기도 했고, 이들이 배우로서의 과거를 가졌다면 존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레이트를 내린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가능성]이 뚱뚱한 고양이의 엉덩이로 쿵 떨어졌으며 광대와 고양이는 훤칠한 인상의 남녀가 되어 고양이였던 배우가 광대였던 배우의 뺨을 한 대 때리고 뒤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고양이]가 광대 남자 배우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원래 고양이였던 여자 배우는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나는 이 정원에서 나갔고 정원 안은 금세 어두워졌다. 지금 누군가가 서 있는 이 가지 숲 아래엔 무언가 작은 새가 있었는데 그것은 웃음과는 달랐다. 말로만 듣던 슬픔인 것 같기도 했다. 지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정원 안의 선생님에게 혼날 것이었다. 정원은 그런 생각을 하곤 웃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다시 틀며.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적극성 같은 것

인터넷에서 사진 하나를 주웠다
모스크바 개념주의 사진이라고 했다
미술 노동을 하는데
가끔 미술에 역정 내는
e님의 추천이었다
e님은 모스크바 개념주의 사진을 볼 때마다
울고 싶어진다고 했다
(이유는 모른다)
(묻지도 않았다)
(모스크바 개념주의란 무엇인가?
묻고 싶었지만 알고 싶진 않았다)
크기가 너무 커서
그림판에서 축소한 뒤
화면 가운데에 깔았다
나무들에 흰 현수막이 매여 있고
그 위에 빨간색 키릴문자가 적혀 있었다
나무들이 온통 검은색이어서
빨간 글씨가 더 강렬해 보였다
배경은 검은색으로 설정했다
이제는 검은 배경 속의
검은 나무들 사이의
흰 현수막 위에 쓴 빨간 글씨가
훨씬 더 강렬해 보였다
그 위에 한글문서와 피디에프를 화면분할로 깔아놓고
타닥타닥 작업했다
(e님한테는 이렇게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지는 9개월 정도 되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나
하던 작업창을 닫았을 때만
사진을 볼 수 있고
바탕화면은 그런
아무렇지 않은 느낌이다
나는 바탕화면 속 사진을 보기 위해
작업창을 전부 닫기도 한다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024년 11월 6일 수요일

눈물

 

 

오늘 말을 하다가 눈물이 났는데, 그 공식적인 상황에서 일부러 울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물이 났고, 그 눈물의 기원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눈물의 기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눈물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어하던 사람처럼. 하지만 나는 그냥 눈물이 나는 대로 눈물을 흘렸고, 우리는 굳이 그 눈물에 대해 분석하지는 않았다. 그 눈물은 어떤 과거와 관련된 눈물이라기보다는 그냥 흐르는 눈물이었다. 유년시절과 관련되지 않은 눈물이었고, 내가 하던 얘기가 과거의 얘기긴 했지만, 슬프지는 않은 눈물이었다. 눈물이 났을 때 당황하며, 어 내가 왜 이러지, 원래 잘 안 우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고, 그냥 눈물이 나는 대로 나게 두었다. 그는 나에게 눈물에 대해 묻지 않았는데, 휴지 같은 것도 건네지 않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눈물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잠시 말을 멈췄고, 눈물이 끝나자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창문이 바람에 열렸고, 밑에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지나간 뒤에, 나는 시계를 봤고, 이 시간이 끝나기까지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었다.

2024년 11월 4일 월요일

겨울 게스트하우스

타버린 나뭇가지에 대고 숨을 들이마신다. 사향이랄까. 잘 모르지만 그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겨울날이었다. 왜냐하면 계속 겨울이었으니까. 내 언 손을 붙잡아주길. 다른 사람들은 이 장소처럼 계속 겨울이 아니다. 겨울이 되어버린 건 마주 잡을 수 있는 손들을 뿌리쳐버린 것에도 있었다. 불길로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외로움을 감당하기 어려웠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은근히 불길 안에 감자를 구우면서 군침을 삼키는 사람들이 내가 피운 불길을 보고 있었다. 이런 대화는 내가 숨기고 싶은 것이 그 사람들 눈앞에 드러나 있고 사람들은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관심이 없는 건지 그저 감자들을 베어 물 뿐. 다들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얼게 하는 추위 때문에 그렇다. 누군가가 내게 건넨 화관이 풀려 봄의 꽃잎들이 잠시 동안 내 머리 위로 흩날려 떨어진다. 콧물이 나온 사람들. 불길 안에 손을 가까이한 사람들. 불길 안에 붙들리는 듯이 있는 사람들이 마주 보며 제 자신에 대한 소개라기보단 서로에게 평상시에 쓰이는 익숙한 말씨로 알게 하고 있다. 저들끼리를. 무언가 추운 것이 있는 사람들이 털레털레 웃으며 추위와 관련된 기억을 얘기한다. 여기 말고 다른 데는 무섭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게 되어가는 불길 앞에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 이곳을 오래 지키고 있으면, 불길의 주인인 것처럼 굴 수 있고 또 나뭇가지도 구울 수 있다. 나뭇가지 숯을 만들기란 몸통을 베어 그렇게 만드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불길을 오래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만 했다. 사향이라고 한 그 냄새를 또 맡고 싶었다. 불길 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까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한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나 혹은 불길이. 아니면 그 감미로운 느낌들이. 이곳의 모두는 제한되어 있다. 추위 탓에. 눈송이를 돋보기로 보더라도 과학 시간에 배운 결정 모양이 안 보인다. 하지만 이 추위는 진짜였다. 대부분의 일이 그런 것 같은데,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고 타버린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면 그 둘 중에 하나가 된다. 곧 있으면 저녁이 된다. 그렇다면 곧 밤이 될 것이며, 캠프파이어로는 이 한데서 버틸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자리에 눕는다. 방 안에는 온기가 감돌고 사람들은 피곤했는지 금방 잠든다. 이 밤의 밖은 정말 춥고, 난 잠이 안 온다. 불길 안에 손을 가까이한 사람들. 왜 시간을 버려가며 이곳에 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사람들. 나도 그랬으니까.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딱 그 부분만은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불길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 불길이 나의 것이 되겠노라 하며 펄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이 된 나처럼 계속 겨울이 아니었다.

2024년 11월 2일 토요일

초월일기 17

지겨운 것

1, 11월에도 등장하는 모기 2. 입만 산 놈들 3. 자신의 신념을 설명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놈들 4. 보다 더 지겨운 건 5. 자신의 신념에 대해 설명도 못하는 놈들

2024년 11월 1일 금요일

두 가지 일

오늘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A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그 일을 오늘 알게 되었다. A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아니면 병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A가 죽기 전에 그에게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 일을 오늘 어쩌다가 알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의 삶이, 하지만 그는 나름의 이름을 얻고, 아마도 살면서 그 명성을 누리기도 했을 텐데, 이렇게 끝나버리고. 그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 그의 작품을 기억할 사람이 세상에 1백 명도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그 사람의 작품에 크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어떤 위치, 뭐랄까, 새롭고 독창적이라는 이름, 어떤 아이콘, 어떤... 아무튼 그런 타이틀을 달고 지내던 사람이 죽자,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들, 50년 100년 전의 작품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그의 그 독창적이고 새롭다, 라는 타이틀은 20년도 채 살아남지 못 하고 끝나버린 것이다. 허무하다. 모든 게 너무 빠르기 때문에, 빠르게 성공하고, 빠르게 타이틀을 얻고, 하루아침에 말이다. 그런 뒤에 빨리 끝나버린다. A가 죽었다는 사실, 그 사람을 직접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실제로 교류하던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까 그렇다고.

두 번째는 B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B와 두세 번 만난 적이 있고, 그가 이 분야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하지만 오늘 우연히 B가 일하는 곳에 방문하게 되었고, 그가 거기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B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 사람을 거기서 만날 것이라고 전혀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하지만 나가는 길에 B를 알아보았지만 굳이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냥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오는 것이, 인사를 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이런 일기를 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에게 인사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B가 거기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B는 이 분야를 전공하지 않았고, 어쩌다가 그 일을 하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분야를 전공하고 있고, B가 일하는 바로 거기 지원서를 냈으며, 아무런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B를 마지막으로 만난, 6개월 전에 우리가 이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B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그곳에서 일하는 B를 만난 것이다. 내가 지원하고 연락을 받지 못한 바로 그곳에서 말이다. 나는 그들이 내 지원서에 답장하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바로 그 이유에서 B가 그곳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있고, 애쓰고 있는 반면에 B는 그 분야와 상관없고,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그 분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 내게 일어난 일과 상관없이,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진지하고, 항상 너무 진지해서, 그 일과 계속 멀어지게 되는 느낌 말이다.

두 가지 일을 알게 되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었다. 커피를 두 잔 마셨고, 마지막에 마신 커피는 조금 남겼다.

24년 10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3,183원 (0원 + 302,691원 + 492원)

2024년 10월 28일 월요일

여름 비를 위한 연습

여름 비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갑자기 온 손님은 우산도 두고 달아났고 쓰러진 나무 밑에서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묻어둔 편지들이었다 여름 비는 항상 이상한 발견을 만든다 이때만 볼 수 있는 습기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야 할까 조만간 사라질 이름이겠지만 멈추기 전까지는 같이 젖는 이름이다 같이 있는 여름이다

편지를 받는 사람보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아직 이 세상이 사랑에 서투르다는 증거 생각하기도 싫고 삼키기도 힘든 이야기에 대해서는 일부러 답장을 길게 적는다 사랑을 믿는 건 무서운 일이니까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척 나를 접었다 폈다 하며 안부를 묻는다 우리는 아직도 솔직하지 않다 밤마다 맡는 비와 흙의 냄새 때로는 여름의 것이 아닌 것이 찾아온다 결국 나는 다른 사람과 울어버리게 될까?

네 잘 지내세요. 속삭이며 흘러내려가는 말들 사이로 끝맺지 못한 편지들을 던진다 각자 다른 여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 여름은 충분히 잘 사라질 것 같다 소나기도 장마도 아닌 이 여름 비의 이름을 지어본다 그림자 위로 자주 비치던 여름의 얼굴을 생각하며

2024년 10월 24일 목요일

오망성

나는 장난질 속에 자신을 파묻고 있다. 나의 수호악마는 더 나아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악마조차 그토록 진지한데. 최근에는 다섯 권의 책을 같이 보고 있다. 이제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혼란하다. 기억나지도 않는 언젠가 써둔 다섯 개의 작업 파일에 의지해 더듬어 나갈 뿐이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일하느라 읽어 오고 읽고 있는 수많은 문자 숫자들이 다 야속하다. 무슨 소린지 몰라도 교정할 수 있다. 아니면 나는 그냥 교정하는 흉내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아무 뜻 없듯 내게 이 일은 아무 뜻 없다. 그럼에도 그 일은 이루어지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할 일을. 나는 사전 속에 내 시간을 처박아 버리고 있을 뿐이다. 이 지겨운 시간을. 할 수만 있다면, 회사에서는 그냥 일을 할 때 시간이 제일 빨리 간다. 그 시간에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거기서 나는 장난질 속에 자신을 파묻고 있다. 널리 흔해진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분리되는 동안 재앙과 불의는 환하게 다가오고,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끔찍한 방언 대결 가운데 시들은 한없이 우스워 보인다. 나의 수호악마는 더 나아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말을 밀고 당기라… 인간 너머의 세계와 싸우라… 서로 도우라…

2024년 10월 14일 월요일

종이배 같은 것

눈앞에서 마음이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한다
불시에 찾아온 종이배
각진 접은 모서리로 발목 언저리를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는 아무리 느리게 지나가도 날카롭다
아무리 조용히 지나가도 혼자 외롭고 피가 난다
지나가는 것들 사이엔 자연사가 놓여 있다
자연사의 얼굴은 희미한 인상
내가 갖고 싶은 이미지
벽에 붙여 놓은 영원 포스터
유력한 회복은 어디에 뒷짐 지고 서 있나
마음의 종이배는 맑고 높고 날카롭다



*김일두&moc의 노래 <몰아치는 비>를 여러 번 듣고 씀.

관람차

거구인 라울 미돈은 얼마간 기다린 뒤 관람차에 올라 2인용 의자에 양다리를 걸쳤다. 관람차가 어느 정도 상승한 뒤(지금은 계속 더 올라가고 있다)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낸 야경이 보였다. 같이 관람차 타기를 거부했던 스테이블리가 저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관람차가 가장 드높았을 때 라울 미돈은 졸다가 가벼운 잠에 들기 직전이었다. 스테이블리는 라울 미돈이 관람차에 타고 난 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굳이 위를 올려다보진 않았으나 라울 미돈이 타고 있는 관람차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고 이제 어느 정도까지 내려갈 것인지는 곁눈으로 보고 있었다. 스테이블리는 그 남자가 안에서 잠들 거라 확신했다. 스테이블리와 라울 미돈은 각각 밤을 이 잠시 동안 느꼈다. 라울 미돈이 독백했다. 혼자군. 스테이블리도 마찬가지로 독백했다. 혼자군. 그 다음 라울 미돈이 독백했다. 우린 서로 외롭지. 그 다음 스테이블리가 독백했다. 우린 서로 외롭지. 아니, 외롭지 않아. 그런가?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 관람차가 어디 있는지를 보고 있지? 눈에 보이니까. 넌 보이지 않는 것도 의심하잖아. 글쎄, 곁눈을 뜨고 보면 보이던걸. 라울 미돈은 다시 독백했다. 사랑해. 스테이블리가 독백했다. 나도, 자기. 아파트 야경이 멋지더군. 자기도 봐야 해. 그 관람차에 혼자 타란 소리야? 같이 탈 수도 있겠지. 혼자 타거나. 나도 다시 그 야경을 보고 싶으니까. 그게 뭐 별거라고. 별거라니. 비좁을 텐데 괜찮겠어? 같이 타도. 그건 알아. 당신의 그 점을 난 충분히 알지. 우리가 그만큼 오래되었던가? 라울 미돈은 오래된 연인에게 보내는 독백을 시작했다. 지금은 야경이지만, 이런 것 말고 그때 우리가 봤던 일몰 기억해? 스테이블리가 지상에서 라울 미돈이 탄 관람차를 올려다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주위에서 관람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스테이블리를 쳐다봤다. 기억해! 라울 미돈이 안에서 혼잣말을 했다. 그는 휴대폰으로 스테이블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스테이블리는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사랑해, 기억해! 관람차 안에서 라울 미돈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그 안에서 외쳤다. 자기, 이제 내려가! 그 일몰을 기억해둬! 스테이블리가 전화를 받고 말했다. 자기, 그 일출은 기억해? 라울 미돈이 다시 가슴을 탕탕, 주먹으로 두드리며 럭비 선수처럼 말했다. 속지 않아! 그건 다른 여자랑 봤던 일출이라고! 스테이블리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자기는 좋은 남편이 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라울 미돈이 관람차 안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이 프러포즈는 성공적이었다. 저 멀리 아파트에 켜진 모든 불들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켜진 불들이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는 것은 정전의 조짐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 멀리 떨어진 이 놀이공원은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비상 전력 공급망이 있을 터였다. 관람차는 멀쩡히 잘 내려갈 예정이고 라울 미돈은 곧 내려가서 스테이블리에게 뛰어들어 포옹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던 아파트 단지의 불이 까맣게 꺼졌다. 정전이었고, 이 밤의 마지막 퍼즐 피스였다.

2024년 10월 13일 일요일

안개

창밖이 흐렸다. 농담처럼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 점으로 누구도 입 열어 화제 삼진 않았다. 침묵이 답답하기도 했다. 안개는 웃었다. 리어왕의 광대처럼. 그 광대는 틈날 때마다 규칙을 비웃고 특히 왕에게 버릇없이 굴었다. 하지만 왕은 눈감아주었다. 특히 광대에게만큼은. 그에겐 권위가 없었으므로. 그 권위를 신하들은 두려워했고 저마다 머리를 써댔기에 광대에게만 관대해진 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시 왕의 권위가 없어졌다. 특히 신하들에게만큼은. 우스워졌다. 잘 만들어진 농담처럼. 이 텁텁한 공기 안에서. 밖에 끼어 있는 안개가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여차하면 이들을 뒤로하고 박차고 나갈 수도 있겠다. 몇 사람이 낄낄댔다. 그 웃음의 의미가 뭔지 이해가 되었다. 답답했던 모양인지 한 사람은 좀 전에 나갔다. 여기 모두는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일에 신경쓰는 사람들은 그다지 없는 듯했다. 이후로는 그런 사람이 더 나오지 않았다. 옆의 창문에 안개가 끼어 흐렸다. 뭐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점점 더 후텁지근하게 되고 있었으니. 지루한 눈들. 밖에 있는 광대가 놀렸다. 안개는 광대가 하는 마임이었다. 왕은 그 사실을 알았다. 광대가 창밖에 안개를 불러낸 것을. 광대가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짐을 싸고 있다. 떠날 생각이었다. 왕은 광대 대신 안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한참 동안이나 보고 있었다. 안개는 광대가 마지막으로 왕에게 준 선물. 우정의 증거. 안개가 하는 농담을 가까이서 들으시길. 광대가 어딘가로 저 멀리 떠나간다. 먼저 뛰쳐나간 이가 우리들의 상상을 들고 나간 듯했다. 그가 광대였다. 왕에게서 떠나간 사람, 여기가 답답해서 나가버린 사람! 멀어져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자기만 손해지. 그러니까 그는 돈키호테야. 말 안장에 타고 안개에게 싸움을 걸려고 칼을 허리께에 걸고 박차고 나가는! 

2024년 10월 11일 금요일

다락, 꿈

꿈. 모이. 허락받지 않은 다락으로 들어가기. 아이는 커다란 새를 껴안고 있다. 포근해. 깁슨은 법정 서기였다. 아이의 꿈은 왼쪽으로 가는 것. 깁슨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경사진. 내려가거나 올라갈 수 있는 것 중에서 분별되지 않은 그 경사를 걷고 있다. 공기는 텁텁하고 어떤 이들은 신경 쇠약. 어떤 이들은 졸리다. 피곤하고 또 피곤해. 항상의 체험. 깁슨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일을 시작한다. 권위 있게. 자신의 일로 능숙을 저한테 붙여가는 사람들은 교훈적이다. 미덕이다. 여름처럼. 존재한다. 지나간 여름. 새가 뒤쫓고 있다. 아이가 뿌려주는 모이들을 향해 고개를 낮추고 뚜벅뚜벅. 돌아온 여름은 지나간 여름의 어깨 위에 얹혀 민들레 동산이 되었고. 또 어정쩡하게 다락으로 들어가기. 넌 괴상하군. 괴상한 사람들은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왜냐하면 괴상하기 때문이었다. 깁슨은 법정 서기로 일했다. 그는 서류에 아이의 괴상한 점들을 적었다. 처벌을 위해서는 아니었고 부모에게 조언을 주기 위해서. 가을이 와 있었고 좋게 이야기하라고 타일렀다. 호의적인 이미지가 인간에게 지닌 중요성은 컸다. 큰가? 가을은 커다랗다. 겨울은 작은 소품 상자 안에 담겨 있고. 그것을 열면 안 되노라. 꿈이 거기 담겨 있으니. 손가락에 낀 반지로 그것을 열 수 있다. 아버지가 남긴 물건. 아이는 이해받고자 했다. 이미 열었으므로 이젠 어른들의 책임. 깁슨이 빠르게 속기했다. 아이의 꿈을 보전해 줘야 해. 왜냐하면. 나에게도 아버지가 물건을 남겼으니까. 아버지가 내 등 뒤에 매달려 있네. 피곤하군. 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곳이 좋아요. 날 사모한 이들을 무죄 방면할 수 있으니깐요. 아이는 봄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친구인 것처럼. 그 일은 다락으로 들어가기. 거위 깃털 침대에 누워 한잠 자고 싶어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평안에 대한 좌석을 꿰어 찼다. 밀리고 밀리기. 그것은 예전엔 욕망이었고 지금은 이룬 것. 잡동사니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쉴 수 없고 고달픈데.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군. 길가의 쓰레기를 보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쓰레기를 대신 주워 올바른 곳에 버리는 사람들. 용서인가? 아이는 더 어릴 때 까르르 웃었던 아기. 아버지가 남긴 그림이다. 그는 화가였다. 왜냐하면. 허락받지 않은 다락을 그렸다. 잘 그리진 못했다. 아이의 눈으로 보기에 길가에 가끔 보이는 쓰레기들이 더 나았다. 왠지 모르게. 귀부인들이 걸어 다니는 거리. 법정은 어설프고 어정쩡했다. 그것이 주된 기억. 망치로 세 번 두드릴 때 아이는 실소를 지었다. 아니면 끼루룩 웃었다. 법정 창밖으로 새들이 날아와 머릴 부딪쳤다. 아이는 안쓰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긴 그림이 담긴 소품 상자에 대해 위증했다. 법정 사람들은 옥신각신 다투었다. 아무도 아이의 증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어떤 사람은 그들의 행태가 한심하다고 욕했다. 왠지 그랬다. 역할 놀이 같은. 그 점을 말해봤자 어른들은 긴 잠에서 깨우지는 못한다고 깁슨은 판단했다. 깁슨은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일을 떠올렸다. 오히려 부인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피곤했다. 권위 있게. 서기로서. 그는 잠시 쉬었다. 그 순간 법정은 멈춤. 기록되고 싶었으므로. 누구도 깁슨의 트랙 밖으로 나가길 꺼렸다. 서기의 처지는 건드려지지 않았다. 잠시의 거위 깃털 낮잠. 일어나자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시간이 빨리 지났군. 아니, 시기를 놓쳤군. 어른이 된 아이가 말했다. 고려해 봐야 할 테죠. 이젠 그럴 마음이 없구나. 그때 겨울이 증언자의 품속 브로치 안에 들어 있었다. 판사가 정숙하라고 그랬다. 아이의 심리와 희망은 지나갔다. 그건 보는 이들의 몫. 그래서 어떤 절망이 넘실거린다. 그렇지만 이미 해결된 일이었다. 증언자는 단지 자신의 말에 신뢰를 더하기 위해 겨울을 모사했고 사람들은 그 말보다 겨울을 더 믿었다. 법정 안은 차가워졌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으므로. 나른한 하품을 하던 이들이 오들오들. 증언자는 아이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거든. 책임감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았어. 저런 어른 말고 아이를. 왼쪽에 계류 중인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속기해놔야 한다. 법정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바로 했다. 권위 있게. 꿈. 모이. 사건. 커다란 새가 창문을 깼다. 아이를 처음에 데리고 온 황새의 시조 격이었다. 진정한 아버지인 황새. 여기선 알바트로스. 우아하다. 이번에는 그 새가 아이를 껴안았다. 보호해 주려는 듯이. 날개로 뒤덮었다. 용서하노라. 그건 모든 사람들의 눈이 아이의 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용서였다. 그래서. 아이는 갑자기 편안해졌다. 이게 울음이군. 엉엉. 거위 깃털 잠을 아이는 졸면서 설명했다. 선생님 앞으로. 계류 중인 사람들은 그런 학교에 신경 쓰지 않는다. 민감하고 저촉되거나 위배됨. 오른쪽에 있는 검사들의 얼굴. 볼에 뾰루지가 난 이. 그 잠이 부러워. 아이에 대한 재판은 모조였다. 검사들은 최선을 다해 공격했다. 장난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화냈다. 어떤 모조이든 감쪽같음을 갖고 있으므로 깁슨은 객관적으로 써야만 했다. 이야기를. 그것이 결국 모조라는 사실을. 검사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이라면. 그런 것을 서사시같이 올바르게 쓰는 게 그의 욕심이었다. 깁슨은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가 없었다. 퇴행. 법정이 끝나고 암전이 된 뒤 그는 집에 가서 잠을 잤다. 아이의 거위 깃털 잠은 아니었다. 용서받는 잠. 괴상한 아이였어. 그는 꿈을 꿨다. 그 아이가 천사로 나왔다. 용서받은 것이 진짜인지 잘 모르겠다. 그 아이는 밖에서도 천사였다. 하지만 그 새는 창문을 깨고 들어왔지. 벌금을 매겨야 했는데. 엑스 마키나에게 매기는 벌금. 그런데. 실은 용서를 해주지 않고. 새를 통해, 특히 알바트로스를 통해. 내가 지어낸 이야기겠군. 난 그 나이 때 용서받은 적 없으니. 자야겠다. 봄 속에 있었다. 몇 달 전에 법정에 갔었지. 음악이 들려왔지. 커다란 새를 표현한 그런 음악. 그 새가 날 데려갔어. 봄 안으로. 이 봄. 신경질적인 시선들을 막아준다. 그 사람들은 왜 신경질적이었을까? 내가 거짓을 말했는데 그걸 제재할 방법이 없어서였을까? 난 누구의 눈에 보이지 않았거든. 잠시뿐이었지만. 나이가 어렸어. 모든 부분이 깃털에 덮여 있었어. 그건 기억나. 기억이라니. 이게 어른들의 일인가? 새 안에 감싸여 있을 때 나는 천사. 케루빔. 친구들이 되지 않아도 좋아. 같은 신만 섬긴다면.

텔레파시 입문

오류가 이 인터넷을 집어삼킬 것이다. 디지털 쓰레기와 오염된 유사 정보가 이곳을 가득 채워 가고 있다. 가짜뉴스들, ‘견해’들(오해된, 오해한, 곡해된, 곡해한, 모자란, 과한), 개소리를 반박하려는 개소리들, 끝을 모르는 농담들, 되다 말기를 스스로 택한 ‘시’들과 ‘소설’들, 그 비슷한 예술 잔해들, AI잼, 밈, 포르노(인간과 동물과 사물 들), 광고 이미지와 텍스트, 더 많은 조회를 원하게 하려는 그 모든 경사로들 사이에서, 인터넷은 표면을 위한 표면에, 표면의 바다에 미끄러지며 가라앉고 있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모든 것을 재현하고 재생산하려는 이곳에서, 더 실감 나게 옮기려 할수록 진실(이것은 미래와 관련된 개념이다)과 더 멀어진다고 하는 언어의 특질은 극대화되고 있다. 어떤 빛나는 진실이 공급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겉에 펴 바를 뿐이다. 감각되는 아무것도 옳을 수 없게 됨으로써 모두가 더 옳음을 원하게 되고, 더 많은 그름 자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그친다. 모든 것이 있고 아무 뜻도 없는,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인터넷은 총문학(總文學)이 되려 하고 있다. 이곳은 쓰레기-문학의 정점이자 전범이 되려 하고 있다. 감관을 붙잡아 두려는 자본과 자본을 붙잡으려는 강박이 함께, 공산주의 문학 이상理想의 악몽판을 도래시키는 중이다. 모두가 함께 쓴, 그리고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을. 역사가 그것을 쓰이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종말에 관해 쓰고 있다. ‘더 큰 숫자’라는 하나의 이념을 따라 그것은 만사를 분열시키며 영원한 미완을 향해 수렴하는 역류가 되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읽기 기계가 되어 간다. 그것(우리와 인터넷)은 미래로부터 불길하게 뻗쳐오는 에스에프다. 또는 종말 미래로의 고속화도로다. 우리는 무오류의 감정 노드가 되어 간다. 맹신과 불신을 향해 우리는 치닫는다. 언어가 드디어, 현실에 대한 오랜 열세를 역전시키고 있다. 문자는 숫자의 노예가 되어 간다. 노예들의 감관과 손을 통해서다. 드디어 우리는 꿈에 도달하고 있다. 무정한 현실을 파괴하면서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현실은 실제로 파괴되고 있으며, 우리의 머릿속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병에 걸리고 있고, 병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한가? 인터넷인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책을 살펴보자. 그것은 한때 가능성으로 여겨졌고, 그 가능성은 이제 이렇게 되었다. 우리가 다시 종이책을 볼 때에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은 ‘검색’ 기능의 부재다. 색인이라는 야만은 우리의 책들을 뒤에서 꽉 밀어붙이고 있다. 아니면 우리의 책들이 색인이라는 야만을 붙들고 있다.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듯, 그 또한 해방되어야 한다. 책 안에서 우리가 검색하고 책들 사이를 검색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 된다면, 표면을 향해 가라앉아 가는 문자의 미래를, 우리의 것이었던 적 없었던(그러나 우리가 파놓은) 미래의 물길을 다시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책들이 공유하는 완전색인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다면... 도래 중인 총문학의 꼬리를 잡아 뒤집어 뺄 수도 있을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고 해보자. 그것이 인터넷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르지 않다. 그것(인터넷)을 총문학이 아닌 그것의 완전색인으로 쓴다면, 본문이 아니라 색인으로 읽는다면. 그것이 스스로 현실에 대한 사전임을 참칭하지 못하도록, 먼저 분명히 해둬야 한다. 무한과 영원이라는 착시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총문학의 노고(불가능이 아니라)를 헤아림으로써, 유한과 한계가 진실로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2024년 10월 8일 화요일

심장을 위한 모티프

  물과 얼음 사이에서 침묵이 태어날 때마다 나는 어딘가로 그 마음을 보냈지

  햇빛을 따라 죽어가는 말들은 썩지 않는 거울 같아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답장이 없으니 그저 그 안의 모두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라 여겼어

  그렇지만 심장은 자꾸만 투명한 이별을 흘려보내고


  슬픔의 상이 잘 맺히는 그곳에선

  매일 목이 희게 만드는 의식이 일어나지

  충직함, 부끄러움, 신성함

  가장 출구가 필요한 것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

  해서 사라지기 위해서 잉태한 것들을 내보내기 위해서


  누가 먼저 도망쳤다고 생각해?

  부러지거나 깨진 것은 없었는데

  무슨 미래가 태어난 것도 아니었는데

  아직 없는 말을 만들기 위해

  그저 녹아내리는 중이었는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로 할 때마다 혹은 애인이 자신의 언어를 까먹을 때마다 말 없는 언어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어느새 길게 늘어선 심장들의 그림자 그 사이 알 수 없는 계절을 베껴온 철새들이 들어오고 있어 애인의 인사는 다시 새로운 외국어가 되고 있어 나는 또 불가능으로 가득 찬 내 심장을 녹이고 있어

불투명함을 위한 투명함

사람들에게 나를 갖다 대었을 때 생각보다 나를 잘 꿰뚫어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한참을 헤매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나를 다시 자라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나를 흩트려놓는다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사람들 곁에서 투명해져 있다 꿈에서 깨어도 나는 눈을 뜨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언제쯤 그 부패의 과정을 사랑할 수 있을까

기껏 사라지지 않을 준비를 마치고도 나는 자주 나가지 못했다 나가도 자주 말하지 못했다 슬퍼하는 것과 외로워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해서 점점 더 투명한 사람이 되었다 네게는 날개도 성대도 없어 나는 나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걸었고 안에서 밖으로 자꾸만 악취가 나는 질문들만 만들어냈다 너는 내 안에 있을 수 있어? 너는 나를 제대로 볼 수 있어? 너는 내 몸과 마음이 아닌 나도 사랑할 수 있어?

나는 조난당한 사람들과 함께 잠든다 눈을 뜨면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믿는다 하필 그런 사람이 나였다 때를 놓쳐 떠나지 못한 지평선에 눕는다 더 이상 투명해질 수 없는 그림자 위로 나를 눕힌다 내가 나를 나에게 포개했을 때 생각보다 나를 잘 꿰뚫어 보고 있는 내가 있는 반면 한참을 헤매고 있는 나도 있다 어떤 나는 나를 다시 자라나게 만들고 어떤 나는 나를 흩트려놓는다 조용히 내 안에서 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내 안에서 투명해져 있다

2024년 10월 1일 화요일

24년 9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2,691원 (0원 + 302,192원 + 499원)

2024년 9월 26일 목요일

속, 동지들과 여섯 개의 비유

피와 해골 신도


그리고 이제 피는 쏟아져 있다. 비명 사진처럼 쏟아지자마자 굳어 가고 있다. 동지는 손바닥으로 피를 그러모은다. 동지의 시뻘건 손은 굳어가는 피를 제단에 바른다. 아니, 제단에 올리려 하는 것 같다. 피는 제단에서 죽는다. 그다음 잘 마른 해골을 새하얀 그대로 제단에 올려야 한다. 씻을 곳이 없기 때문에 동지는 손을 쳐들어 말린다. 자신을 겨눈 총구를 앞에 둔 듯. 시원한 바람이 젖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간다. 해골의 눈구멍은 머리 없는 동지를 향해 뚫려 있다.


지옥에서 밭 갈기


그리고 이제 동지는 괭이 자루 끝을 양손으로 누르며 턱을 괴고 서 있다. 밭 가운데서. 얼마나 일했는지 보기 위해서인지, 얼마나 더 일해야 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인지, 이쪽저쪽으로 흔들거리는 동지는 곧 무너져내릴 것처럼 위태롭다. 밭은 더할 나위 없이 기름지고 비옥하다. 동지가 자신의 피와 림프를, 근육과 장기를 거름으로 흘리면서 갈아놓았기 때문이다. 뼈 동지는 밭 가운데 그대로 서 있다. 그곳에는 씨앗도 날씨도 없다.


핵 광야의 피케팅과 라디오 방랑


그리고 이제 짙은 방사능 안개도 헤치고 온 동지를, 그 일이 쓰러뜨린다. 갑자기 도시에 다다라 놀란 표정의 군중과 만나는 일이. 동지의 라디오 방랑은 그렇게 끝난다. 동지의 놀란 얼굴과 함께.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목소리도 거짓말처럼 멎고, 드디어 벗어 본 널빤지 위의 글자는 이미 다 바래서 한 획도 남아있지 없다. 동지는 자신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지옥을 통과해 온 것인지 드디어 지옥에 도달한 것인지 궁금하다.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았고 아무 데도 도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동지의 텅 빈 머리통 속에서 윙윙거린다.


연자매


그리고 이제 동지의 얼굴로 비린내가 훅 끼쳐 온다. 맷돌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못 본 틈에 쥐라도 뛰어든 걸까? 거적떼기를 걸친 또 다른 동지가 쫓기듯 방앗간에 들어온다.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표정이다. 그렇지, 교대를 하러 왔구나! 새로 들어온 동지는 묻는다. “혹시 선생님을 보지 못하셨소?” 이건 또 무슨 타령인가? “누가 당신의 선생이오?” “쥐... 쥐가... ” 이 동지는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다. “헛소리 말고 교대하시오. 당신의 선생은 방금 막 저 사이에서 으스러진 참이오. 불쌍한 선생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이 채를 힘껏 미시오. 내가 줄곧 이 방향으로 밀었으니 당신은 이 방향으로 미시오.” 해방된 동지는 방앗간을 나서기 전 양동이에 든 숯덩이들을 매 위에 쏟아준다. “선생은 반드시 되돌아올 거요.”


불타는 들판


그리고 이제 재가 된 들판에 숯덩이 일곱 개. 하나는 커다랗고 둘은 둥그렇고 다섯은 길쭉하다. 둥그런 것 하나를 발로 차보는데, 뜻하지 않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그것이 동지가 들고 있던 양동이였음을 뒤늦게 안다. 남은 일곱 개의 숯덩이를 양동이에 주워 넣는다. 채 다 들어가지 않아 발로 밟아 바숴야 한다. 아홉 개로, 열한 개로, 그 이상으로. 온통 검댕이 묻는다.


늪괴물


그리고 이제 동이 트며 비가 내린다.

2024년 9월 20일 금요일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❷

 



“당신은 언제나 새로운 최악을 보여주네.”

치니언이 쏘아붙였다. 유스프는 담담했다. “당신은 나를 떠나겠다고 했어.” 그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죽은 나무껍질을 꺼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뒷말 없이 떠났어.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이었지.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던 거야. 누가 칼로 찌르려고 할 때, 황급히 몸을 틀어버리는 그런 거.” 그는 아직 울지는 않았다. “첫 번째로 시간을 되돌렸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뭔지 모를 묵직한 것이 몸 안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고 아주 그랬고 사방으로, 그래서 당장은 그걸 어떻게 해야 했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당신에게 당해보라는 듯 욕부터 내뱉었지. 거기 있는 의자를 집어 던졌는데. 맞으라고 던진 건 아니었지만 맞아도 된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맞았지. 당신 머리를 맞췄어. 피하지도 못하고 넘어진 당신은 피 흘리면서 죽을 듯이 떨고 있었고..."

먼저 울기 시작한 것은 치니언이었다.

당한 사람이 먼저 울다니 억울한 일이었다.

“당신은 여길 빠져나갔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았어. 알어줘, 치니언. 그때의 내 기분은.”

“그래봤자 죽고 싶었겠지.”

치니언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알고 싶지 않아.”

잠시 조용했다. 한참을 머리챌 만지고만 있던 치니언이 내뱉었다. “계속 말해. 어쨌든 이걸 끝내야만 하니까.” 유스프가 말을 고르려는 듯 침을 삼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말을 쉬다가 그는 말을 재시작했다. “며칠을 그저 보냈지. 그리고 두 번째로 시간을 돌렸어. 당신 마음을 돌리고 싶었으니까. 당신 말을 듣다가 듣다가 참기 어려워져서 무릎을 꿇고서 우리에 대한 모든 것, 모든 것을 다 얘기했어. 순례를 가서 보았던 수정의 바다. 비를 피해 성주 몰래 마굿간에서 껴안고 잤던 일. 처음으로 입을 맞췄던 성인의 축제 같은 거. 묵묵히 듣고 있는 당신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슬픈 미소를 입에 올리고 여러 번 힘에 겨워하면서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의 당신은, 당신은 어떤 끔찍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어떤 죄악과 참상의 이야기라도 어떤 끔찍한 학살이라도 전부 다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너그러워 보였지. 그러나 당신은 앞서처럼 떠났어. 같은 일에는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듯이.”

유스프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렇게 세 번째야.”

계속해서 매만졌다.

“세 번째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약속할게. 당신이 이 집을 떠나고 나면 두 번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오지 않을게.”

꽤 오랫동안 치니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묘하고 복잡한 상념들이 치니언을 몸 속을 조였다가 풀었다. 잠시 후 의자가 일어섰다. 다리를 모아 앉으며 치니언은 안면을 무릎에 부볐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점심을 거르고 왔었지. 웃음이 나왔다. 배고프고 피곤하구나. “알겠지만 어리석은 짓이었어, 유스프. 당신은......” 치니언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사용한 거야. 그 마술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킬 수 있는 힘이야. 무고한 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힘이고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힘이고 아이와 여자, 어쩌면 세계를 구해낼 수도 있는 힘이지.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될 수 있다고 입 닳게 말했는데. 마지막일 수도 있는 기회를 이따위 일에 낭비하다니. 이렇게 지친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정말로.”

“작지 않아. 내게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어.”

유스프가 구걸하듯 말했다.

“당신만의 생각이잖아.”

치니언이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 필요에 따라 모욕 당해야 하는 사람이 아냐.”

“당신이 아니면 안 돼.”

“......오.”

마지막 말에는 날이 서 있었다.

“예전에는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어. 당신이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다고. 그러나 진실은 아니었지.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다시금 피어오른 적개심에 유스프가 움찔했다. “이런 얘길 듣고 싶었던 거지? 다 말해줄게. 뭐가 듣고 싶어?” 치니언이 잔인하게 웃었다.

“어제까지도 나는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은 나를 본 게 아니야. 게으르기 때문에 익숙한 것들만 골라내서 본 거지. 진짜 내가 아닌, 실루엣이나 커튼 그림자 같은 무언가를. 지금까지의 일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있다고,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믿고 믿고 또 믿었을 뿐. 한참 전부터 난 그랬어. 침대가 모래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여긴 사막이었어. 그리고 말이야.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돼......”

질끈 치니언이 눈을 감았다 떴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흘렀다. 뺨을 타고 가서 쇄골에 모였고 유스프도 울었다.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두 사람은 악에 받친 동시에 상처받고 있었다.

“몰랐을 리가 없었다고 생각해. 우리 여기서 죽어가고 있었잖아, 안 그래?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는 방. 여긴 말이 죽어버린 공간이야. 공간 자체가 죽어가고 있었다고. 그 죽음에, 내가 기여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진지함을 잃어버린 당신이 밖에서 불쌍한 어린아이나 죽이고 돌아다니는 동안...”

“그럴 이유가 있었어!”

“우리가 거둔 아이였잖아!”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자 큰 소리가 났다. 상체를 탁자에 얹다시피 한 치니언은 몸을 들썩여가며 흐느꼈다.

“내게도 물론,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이 있지만 당신처럼 하지는 않아. 불쌍한 그 아이. 우리한테 풀잎을 접어주던 그런 아이를 죽여가면서까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손에 잡힐 리도 없고. 잡고 싶지도 않은데. 당신은 변했어!”

“먼저 변한 건 당신이잖아.”

“미친 여자라고, 부정한 여자라고 했잖아. 은연중에 하는 그런 비난도 아니었지. 무릎 꿇고 빌라는 듯이. 알아서 조아리길 바라는 듯이. 부응하지 못하니까 화를 내는 것도 모, 모자라서.”

치니언이 으르렁거리고 이를 드러내며 손목을 어루만졌다. 가장 싫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유스프는 비겁하게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치니언이 싸늘한 조소를 보냈다.

“왜? 못 보겠어? 봐, 보라고. 보라고!”

치니언이 유스프의 얼굴에 손목을 들이밀었다. 피하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아내가 남편의 뺨을 후려쳤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났다. 남편은 뺨이 돌아간 모습 그대로 흐느꼈다.

“노력하려고 했지. 당신을 믿으려 했어. 그 믿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진창에 박혀 당신이 죽인 어린애 시체랑 굴러다녀! 당신이 겹겹이 저버린 내 믿음들과 함께!”

수치심에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스프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어 눈을 숨겼다. 그러나 눈을 가리면서 귀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치니언의 말이 꼬챙이처럼 유스프를 찔렀다. 그럴 때마다 뿌옇고 축축한 것이 가슴 위를 흐르면서 죽죽 떨어졌다. 하기사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죽여야만 하는 아이에 대해서. 그 아이가 죽지 않으면 세상 전체가 불행해질 역사가 있다고. 그런데 정말 그것뿐인가? 홧김에 아내를 때린 일에 대해서는? 노력하는 아내를 가혹하게 대했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사죄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대체 누가 누구를 설득하고 앉아 있는 건가? 대체 왜 시간을 돌렸단 말인가? 이 모든 걸 왜 뒤늦게 깨닫는단 말인가?

봐!

치니언이 달려들어 유스프의 손을 낚아챘다. 뜨겁고 축축한 손으로 치니언은 유스프의 턱을 붙잡아 강제로 돌렸다. 두 사람은 마주 봤다. 직면한 충혈된 눈이 원망의 신인 것처럼, 원망이 유일한 권능인 신의 눈처럼 유스프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을 보란 말이야! 시간을 되돌려서 한다는 게 겨우 이런 짓이야. 당신이 돌아올 때마다 난 계속 모르고 있을 거고, 당신은 다 알면서도 미안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겠지. 난 대체 무슨 죄야?”

“치니언, 제발.”

“한때는 내가 아주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 덕에 말이야. 당신을 떠올리면 외롭지 않았고 마음이 알싸했고 두 뺨이 화끈거렸어. 당신은 박식하면서도 섬세한 남자였지. 내 행복에 천을 덧대는 사람이었어. 부정할 수는 없어. 사실이지만 끝났어. 이제 남은 건 당신이 공들여 선물한 냉담뿐이야.”

치니언이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마지막 신호처럼 느껴졌다. 다급하게 유스프는 필요도 않고 쓸모도 없는, 누구에게도 공해만인 말을 되는 대로 꺼냈다. “다른 사람이 될게.”

벙찐 치니언이 유스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늦었어.”

“늦었다니?”

“당신이 하나 맞춘 게 있어.”

다음에 올 말을 알 것 같았다. 알고도 남았다. 흔한 이야기였다. “거짓말이지?” 아찔했다. 어딘가를 어루만지려던 치니언의 손가락이 멈칫하고 뒤로 숨었다. 유스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믿을 수 없어. 어찌나 얼얼한 고통인지 유스프는 다 끝났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단 한 번 쓸 수 있는 시간 마술을 왜 지금 써버렸는지 모르겠네. 이제 중요한 것은 치니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치니언의 새 남자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순간 얼음장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자세히 말해줘?”

이해한 치니언이 사악하게 웃었다.

“세네카는 용병이야. 범죄를 저지른 마술사들을 추적하고 처리하는 전문 용병. 거기서 가장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었지. 공적이 아주 많은. 나나 당신 같은 사람을 수도 없이 굴복시킨.”

젖어있던 치니언의 옷 앞섶이 어느새 말라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를 혐오했어. 다른 마술사들, 친구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젠가 나를 죽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지만 어떡하겠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데. 학회로 날 찾아왔었지. 자문을 구할 게 있다면서. 마술사가 되고 싶었는데 액운이 깃들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게 무슨 생각 없는 소리냐고 쫓아냈지만 아랑곳 않고 찾아왔어. 조금씩 호기심이 생기더라. 자신의 일을 싫어했고 세네카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 일을 그만두고 마술사들 편에 서라고 매몰차게 얘기했거든? 그 다음 날 전부 때려치우고 내게 와서 웃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는 게 놀랍고도 황홀했어. 곰처럼 커다란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니까 귀여웠고 기다려졌어. 글도 곧잘 쓰더라. 날 그린 그림과 함께 편지를 주고는 했는데 열 번째 편지를 받고 나니까 알겠더라. 내가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또 뭘 말해줄까? 그 사람에게는 꿈이 있어. 책을 쓰겠다는 꿈.”

유스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부족하지, 여보? 더 말해줬으면 싶지?”

“그만해. 제발 그만.”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당신이 만들어 낸 내 모습, 당신에 대한 최악의 인상만을 가지고 영원히 나가는 이 모습을 제대로 기억해. 경고하는데 다시는 이 순간으로 돌아오지마. 만약 또다시 시간을 되감는다면...”

마지막 말을 뒤로 하고 치니언은 그를 떠났다.

“기다리고 있다가 머릴 찔러 죽일 거야.”


*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되감아진 시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술의 주인인 유스프뿐이었기 때문이다. 유스프가 시간을 되감는 순간, 이전까지의 모든 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있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할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른 마술이 간섭할 수 없는 유스프 고유의 작동 방식이었다. 몇 번을 되돌아간들, 치니언은 조심스럽게 유스프의 고통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고, 나름의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불어오는 바람에 치마 윗단을 붙잡을 것이고, 함께 만든 이 집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올 것이었다. 그러니 기다렸다가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상처 주기 위해 지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말은 유스프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이 순간 무언가 왔었다...... 여기가 하강나선의 종점이었다. 미끄러지며 저주하듯 함께 도달한 이 순간에는 진실이 있었다. 깃들어 있었다. 먼 훗날 세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덕분이다. 저 말이 단지 불가능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는 불가능한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칼을 들고 기다렸다가 죽여버리겠다는.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생각할 거리다.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어둑한 밤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유스프 혼자 쓰러져 있었다. 일어서다 휘청이던 유스프의 발에 무엇인가 툭 채여 문 쪽으로 날아갔다. 자수 주머니였다. 약간의 금화와 함께 치니언이 두고 간 작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무심코 서 있던 유스프는 바람이 거슬려 문을 닫았다. 비는 아주 그쳐 있었다. 침입을 성원하던 빗방울들이 매가리 없이 창틀에 모여 있었다. 창의 크기를 두고 밤새 고민하던 때가 떠올랐고 당장은 그 생각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틀을 자다 깨며 유스프는 삼일째가 되고서야 더 잘 수 없었다. 치니언이 놓고 간 주머니를 들고 빵집에 갔는데, 미친 사람처럼 중얼대다가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빵을 사버렸다. 마실 것도 없이 퍽퍽한 빵을 온종일 먹으면서 유스프는 외로운 중독자처럼 마술 반지의 예쁜 고리를 계속해서 매만졌다.

언젠가 유스프가 시간을 되돌릴지. 네 번째, 다섯 번째, 백 번째의 치니언을 보게 될지. 하다가 그만두는지, 아니면 약속을 철저히 지키며 살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유스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했을 수 있고, 그렇기에 그는 안 했을 수 있다.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 하루가 지났고, 한 달, 일 년, 십 년이 지났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처럼 좋은 사람이 됐다. 부분적이지만 달라졌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것을 바꾸는 데 성공했으며, 모든 부분에서 예전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이미 고정되어 있었지만 잘라낸 자리에 다른 손가락을 붙여 다른 마술을 익혔다. 많은 사람을 구했다. 절망하던 누군가를 절망에서 꺼냈다. 감사를 받았다. 선물을 받았다. 새로운 사람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다르지 않고 그대로였다.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누구로도 스스로도 그 자신을 지옥에서 구해내지 못한다는 사실. 그래서 그는 애도했다. 사후세계에서도.

2024년 9월 16일 월요일

톱니바퀴

개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희미하고 따스하고 안온한 것처럼 나는 그 개를 안아 들었다. 그 개는 주인이 있었고 그 주인이 멀리서 천천히 조급해하지 않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흥미와 애정이 헤픈 개에게 익숙한 모양인 듯했다. 개에게 떠올라 있는 것은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으나 금방 그칠 것도 같았다. 내 몸에 묻은 파스타 냄새가 그 개에게 아련한 느낌과 안길 수 있는 품을 상기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주인이 다가와 먼저 사과의 말씀부터 꺼냈는데 미안해하지는 않기도 하는 눈치였다. 그 개가 민폐가 아니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에게도 귀여운 개였으니만큼. 그런 느낌에 주인은 익숙한 듯했다. 그 개가 몇 번이고 자신을 앞질러 나갔던 것에도. 개는 그 주인과 나 사이에서 네 발 달린 전령인 양 앞발을 들고 나에게 기대어 발자국을 찍고 있었는데, 주인이 먼저 웃고 나도 그것에 뒤따라 웃었다. 그 주인과 나는 별다른 일 없이 인사를 하고 각자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 개는 내 옷에 흙 묻은 발을 올려 거웃을 남겨놓았는데 그 귀결은 무의미함 같은 것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이 옥상에서 그런 생각을 피하며 어렴풋한 감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이런 도회지의 밤하늘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밤하늘에 희끄무레한 모래들이 뿌려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 모래들은 별들의 온도에 녹아내려 윤무를 만들어내었는데, 나는 그 광경이 좋았다. 별들은 거기 어슴푸레 잠겨 있으면서 자기 아래 부수된 인형 별들을 만들기도 했다. 인형 별들은 아름답고 우아했는데, 그것은 주인 별들이 오만하고 공포의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별들도, 오만하고 공포의 권위를 자랑하는 인형들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별은 겉에서 이 모든 극을 꾸며내고 있었을지 몰랐고, 내가 오늘 그 개와 주인을 만났던 것은 그럼에도 인형극이라 할 순 없었는데, 나는 그 순간의 일을 충분히 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별은 가운데에 선 지휘자였고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떤 무대에서 나른하게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는 것은 내가 배운 것 중 값진 것이기도 했다.

2024년 9월 13일 금요일

관광객 같은 것

여기는 관광지 안에서도
유난히 북적이는 골목

아무 식당에 들어가
가장 낯선 이름의 음식을 주문하면
황금 같은 감자들과
자유로이 풀 뜯는 소들이
식탁 위로 펼쳐진다

올림픽 선수처럼
활달한 기분은
앞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그러나 목적지 없다
진짜 마음도 없다

마음에도 없는 건
어디서 나오나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2024년 9월 6일 금요일

텔레파시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말이면서 생각인 동시에 글인 무엇이다. 문자와 음성과 영상을, 그것들의 교환을, 공간(CYBER~~~)을 포함한다. 이것은 ‘바깥’에서 보면 일종의 초보적인 텔레파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이런 식의 언어를 이렇게 대규모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 이 조건 위에서 우리는 타인과 전례 없는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영향 도중 약하거나 강하게 온갖 방식으로 유형적으로 미쳐버리는 사람들(나 자신 포함하여)을 많이 보았다. 아니 그보다는, 함께 미쳐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변해버린 언어 환경에 맞는 언어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주먹도끼도 모르는데 손에 기관총이 들려 있다. 초등교과에 매스커뮤니케이션(집체대화?) 과목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어 교과 자체가 일신되어야 할까? 어른들도 자신이 알던 언어와 이곳의 언어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하릴없이 녹아든다. 곤란에 처한 건 키오스크 앞의 노인들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문자화되고, 문자 특유의 곤란이 모든 것 위에 내려앉는다. 인터넷이라는 입체 지면을 들여다보면, [표현의 자유]와 [가짜뉴스]라는 두 개의 날개로 우리는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날개로. 진실의 어려움, 정확해지기의 고난이 이제 모두의(대규모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문자와 실제가 일치될 수 없음에 대한 자각이, 언어의 힘을 불완전한 방식으로(독점할 수 있다고) 자각하면서부터 생기는 묘한 마음이, 이제 더 이상 특별함의 표지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인터넷-읽기에는 문학을 읽을 때와 매우 유사한 조심성이 요구된다. 거짓이며 진실이고 진실이며 거짓인 것들을 상대해야 한다. 인터넷-쓰기는? 거기서부터는, 이건 그야말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하지만 생각하다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차근차근 헤아리다 보면, 어떤 교육 가능한 규범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순을 배워야 할까? 시간을 배워야 할까? 노이즈를 배워야 할까? 크기를 배워야 할까?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함을? 혼란을? 내가 나를 쥐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네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내 것은 없다는 것을? 풀어헤쳐지는 나를? 또는 너를? 거미줄 같은, 자본의 용납불가능한 지도편달을? 또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라는 것을? 망해가던 세상에서 텔레파시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예행연습을 벌인 것뿐이고... 이 생각은 분명 누군가 했던 생각이다. 그게 나였나? 아니면 너였나?

2024년 9월 1일 일요일

24년 8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2,192원 (0원 + 301,789원 + 403원)

2024년 8월 29일 목요일

부고

내 친구들은 모두 죽거나 다치거나 불구가 되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부고는 여태 익숙해지지 않는다 부고를 반으로 접어 넣으니 네가 기억나지 않는다 망각이 아니었다면 우린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네 유언이 무엇이었는진 내가 입을 열 때쯤 기억나겠지


우린 아침에 괴로웠고 저녁엔 더 괴로웠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그 다음 날이, 그리고 그 다음 해가. 이렇게 우리는 미래를 앞세워 나아갔다

“절뚝이는 널 기다려줄 사람은 우리 말곤 없어 눈먼 너를 위해 길을 터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입을 열지 않는 너를 위해 하루가 다 가도록 너를 기다렸어 우린 네 유일한 친구가 되었어 네 입꼬리에서 내 존엄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둔 것도 우리였어.”

“그래 널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 바로 우리였어.”

내가 사랑한 이들은 모두 미치거나 살해되었다 대기를 떠돌다 불타 죽었다 우린 찬 바다 위에서 불탄 너를 수습했다 단 한 번 멈춘 우린 다시 미래를 앞세워 너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그래 널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 바로 우리였어

우리 절대로 죽지 말자, 우리 절대 미치지 말자, 우리 절대로 아프지 말자, 그러다 한 번이라도 멈추면 우린 끝장이잖아

네가 죽으면 나는 네 머릴 밟고 앞으로 나갈 거야 네가 죽으면 저 시체가 내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릴 거야 우린 단 한 번 너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거야 너보다 훨씬 앞서 나갈 거야 네가 죽은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나아갈 거야

난 결국 네가 될 거야.

넌 죽은 나를 발목에서 떼어내며 말할 거야 그때 내 유언을 너는 기억할 거야 내가 입을 다시 열 때가 되어서야 네 유언이 기억나겠지 그러니 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 우리 절대 다시 만나지 말자 그러지 말자 널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 바로 나야.

그러니까

너만큼은 내가 잊기 전에 나의 부고를 써 보내주렴

2024년 8월 27일 화요일

새를 위한 집 같은 것

가게 주인이
어깨에 새 한 마리 앉혀놓고
말한다

말하는 새 이백만
말 못하는 새 팔만
날 수 있는 새 오만
못 나는 새 십만
앞에 있는 새 삼백만
저 끝에 있는 새 삼만

각양각색의 새들 사이에서
주인의 새는 말할 줄 안다

나는 이백만!
나는 이백만!

사 오지 못한 새는
며칠 전부터
앵무
앵무
앵무
내 머릿속에서 떠들고

새와 함께하는 삶은
해보지 않아서 몰라
종이새 접는다

말을 시키면
말을 하고
날게 하면
날고자 하고
이걸 다
못해도 여전히 새인
종이새

어깨에 새를 올려놓으니
그의 삶
날아갈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새의 집 같아
마음에 난로 켜고
이불을 깐다
불은 꺼줄까?
좋다

나는 이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집이 되어본다

2024년 8월 22일 목요일

대기권 밖으로

ㅍㅍ는 늘 화나 있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었다. ㅉ는 그와 사귈 때 한창 그가 미워한 것들, 그를 화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정리를 해둔 적이 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가 싫어한 것들
패배한 비폭력, 천박한 변명, 불가피성, 불필요한 배려, 시도―단지 시도, 실험: 보고서가 없는, 진정성, 스스로가 어른이 아니라 주장하는 40대, 부코스키 같은 주정뱅이를 좋아하는 남자들, ‘결국’ 좌파가 아니라고 호소하는 비겁자들, 가난을 정당화하려는 수사적 시도들, 부모탓 하는 멍청이들. 맛없는 공정무역 커피, 지가 예술가인지 거진지 구분 못하는 거지 새끼들, 안일한 자기비하, 정당에 자아를 탕진한 등신들. ‘우린 등단과 비등단을 구분하지 않는’ 천둥벌거숭이들. 분명치 않은 모든 것들, 옳은 문장의 옳지 않은 배치, 옳지 않은 법으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 ‘상황의 어려움’, 모두에게 선할 수 있다는 믿음, 거의 모든 믿음, 선량한 씨발것들, 새로운 시도가 무언갈 보장할 것이라 말하는 스테이트먼트들, 새로운 것은 없다는 천박한 신념들, 거의 모든 신념들, 기술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순진한 착각, 엔지니어링과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텍스트들, 씁쓸하다는 비열한 논평, 구호와 호소로 시작해 또 다른 세기마저 구호와 호소만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노조들, 정당들, 정치인들, 정치적 결단을 내릴 줄 모르는 진보정당들, 정치적 결단만을 내리는 모든 정당들, 손에 피 한 방울 묻힐 줄 모르는 책임자들, 퇴근 후의 자기위안―오늘도 무척 힘든 하루였어. 인내와 노력, 그것이 미덕이라 말하는 사람들, 세계의 불행과 개인의 불행이 온전히 떨어져 있다 말하는 낭만종자들, 그것이 완전히 붙어있다 말하는 인문학 좌파들, 주정뱅이들.

어쨌든 나이를 먹다 보면 점점 좋은 것들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되고, 그럴수록 주변에 좋은 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게 된다. 이를테면, 머리가 꽃밭인 사람들이 아니라, 좋아하는 걸 곁에 두는 것에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한 사람들 말이다. 아무래도 미움을 나누는 일은 오래 하기 힘드니까. 이렇게 ㅍㅍ처럼 꾸준히 싫다는 소리만 하는 인간들은 지긋지긋해지니까, ㅉ는 ㅍㅍ와 헤어지기로 했다. ㅉ는 곁에 좋아하는 것들을 두기 위해 애쓰기로 했다.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몇 달 전 ㅍㅍ가 나오는 꿈을 꾼 ㅉ는 수소문해 ㅍㅍ와 연락하게 되고, 세상을 그렇게 미워하던 그가 꾸역꾸역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란 한편 안도하게 된다. ㅉ는 ㅍㅍ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그를 곁에 두었던 거다. 이렇게 ㅉ와 ㅍㅍ는 이전과는 좀 다른, 다소 거리를 둔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ㅍㅍ가 말한 싫은 것들을 정리하면 또 다음과 같다.

그가 미워한 것들 2
죽음으로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들, 결국 죽고 나서야 밝혀지는 진실들,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모든 상황들, 도취된 모든 예술가들, 자신이 옳다 믿는 사람들, 사장의 말을 잘 듣는 관리인들, 여전히 자본가가 특정될 수 있다 말하는 무식쟁이들, 상황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솔루션, 정치적 옳음. 예술과 음란을 가르는 논리: 여기 숨어서 거유로리나 빨고 자빠진 비열한 새끼들. 정당한 폭력이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할 것인 양 현실에 도취된 게으름뱅이들, 믿음, 전체를 말하는 단 하나의 언어가 있을 거라 말하는 믿음, 어쩔 수 없었다는 호소, 플랜b, 수사학적 개수작, 할인행사, 1+1, 열심히 하는 모든 이들, 진심, 말해지는 모든 진심,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안일함,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는 등신들, 세계의 복잡성에 좌절한 지식인들, 좌절한 모든 지식인들. 그럼에도 지식인을 자처하는 모든 이들.

여전히 ㅍㅍ와 사귀는 일은 무척 지긋지긋한 일이었기에 ㅉ가 ㅍㅍ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로 한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ㅍㅍ가 ㅉ에게 연락해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ㅉ는 ㅍㅍ와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기에 그러자 말했다. 한 시간 뒤에 만난 ㅍㅍ는 양손에 정수기 물통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정수기 통을 택시 트렁크에 실은 ㅍㅍ는 기사에게 말했다.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가주세요. ㅍㅍ가 ㅉ에게 말했다. 너는 곧 놀라운 걸 보게될 거야.

ㅍㅍ와 ㅉ는 하늘이 보이는 곳에 도착해 정수기 통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준비한 돗자리 위에 나란히 누웠다. ㅉ가 ㅍㅍ에게 말했다. 넌 대체 어떻게 사니, 어떻게 이 모든 걸 감당하고 사니. ㅍㅍ가 말했다. 몰라, 이걸 다 미워할 수 있는 내가, 그러고도 살아남은 내가 너무 좋은가봐. ㅍㅍ가 빈정거렸다. ㅉ는 다시 물었다. 이걸 어떻게 감당하고 사는 거야? ㅍㅍ가 ㅉ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는 내가 미워하는 걸 내 눈앞에서 치워버릴 만큼 용감하지 않아서 그래. 내가 그렇게 용감했다면, 날 치워버렸겠지. 둘은 말없이 하늘을 봤다. 그러다 ㅍㅍ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내가 언제나 하늘로 가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이 대기권을 탈출하고 싶어했다는 거. ㅉ는 ㅍㅍ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ㅍㅍ가 말했다. 잘 봐, 놀라운 걸 보여줄게.

그는 정수기 통을 안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처음엔 빨대로, 다음엔 사이폰으로, 나중엔 누워서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오도록 물을 마셨다. 가끔 구역질이 나왔지만 참고 마셨다. 그에겐 목표가 있었다. 그에겐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는 야망이 있었다. 그가 불룩 튀어나온 배를 꾹꾹 누르자 팔다리가 부풀어올랐다. 그는 다시 두 번째 정수기 통을 안고 물을 마셨다. 처음 정수기 물통이 등장했을 때 그 용량은 20리터였다. 지금은 18.9리터로 정수기 용량은 1.1리터가 줄었다. 이는 국제도량형총회에서 킬로그램 단위를 백금원기에서 플랑크상수 기준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이이다. 정수기를 다시 비워 배가 부풀어 오른 그는 다시 배를 꾹꾹 눌러 팔다리로 물을 밀어냈다. 그의 아랫배와 팔, 종아리 살이 붉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구역질을 하며 말했다. 내가, 우웩, 너에게, 우웩, 멋진 걸, 우웩, 보여줄게, 우웩. 그는 힘들게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는 쉼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벌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도록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부러진 뼈가 피부를 밀어내도 그는 멈추지 않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몸은 아침에 만났을 때보다 세 배 이상 부풀었다. 옷은 몸에 맞지 않아 이미 벗어던졌다. 그가 발꿈치의 대일밴드를 떼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자 양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가 가장 낮은 구름에 닿을 때 팔과 다리를 떼어냈다. 그의 팔 한쪽은 경기도 모처에 떨어졌고, 나머지 팔 한쪽은 강남 한복판에, 무릎 한쪽은 영등포 쪽방촌 골목에 떨어졌다. 한쪽 무릎은 내 눈앞에 떨어져 지름 약 2미터의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추락하던 그는 다시 항문과 요도에서 물을 뿜어내며 하늘로 날아갔다. 양 어깨에서 물을 쏘며 경로를 조정했고, 아무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성층권 근처에서 남은 몸통을 떼어냈고, 결국 그의 머리는 대기권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몸통이 떨어진 곳은 러시아의 퉁구스카 숲이었고,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고 한다. 주변의 러시아인들은 소문을 듣고 숲으로 달려갔다. 운석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ㅍㅍ의 머리가 보낼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신호가 올 것이고, ㅉ은 응답할 것이다.

2024년 8월 20일 화요일

예술 생각 같은 것

팔레트 나이프로
불타는 커튼을 푹 떠서
전면에 바르기
시원하게 바르기
그리고 커튼
사라지기
현실은 이렇게
흔적 없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가설극장에 틀어놓은 순수예술 비디오는
벌써 삼분의 일 재생 중이다
아무 논쟁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는 침묵이
객석을 점령,
임시 거처에 방치된
너무 많은 꿈들이
젖어서 천장 높이에서
흐느끼며 떨어진다
이 지겨운 누수 사건!
프레임 속 멍한 인물이
개선될 수 있을까
시대에 뒤떨어진 잿더미에서
어떤 비밀이 드러날까
가장 가까운 것은
현장에 완연한
무겁고 갑작스런 앞사람의 뒤통수
화면을 가릴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스크린에
앞사람을 틀어놓았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중지되는 예술이 가능하도록 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진 말자.
조금 전까지 사용된 나이프를
스크린에서 꺼내자.
눈앞의 정수리를 세게 두들기자.
이윽고 그의 두개골이 열리고
축축하고 흥건한 생각들이
쏟아져
쏟아진 걸 전부
보았다고 말하기.
이런 식으로 좀 더
볼만해질 장면을 상상하지만
이렇게 하는 건 예술이 아니다
시에서 한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나도 쉽고
예술적인 이야기이고
예술적인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클라우스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클라우스를 찾아갔다고 하면 무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 클라우스, 정신 나간 성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 클라우스를 잠깐 소개하는 편이 좋겠다. 성당지기였던 대머리 클라우스는 쉰을 넘긴 나이에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이상한 음성’을 들은 뒤 그 뜻을 헤아리겠다며 스스로에게 맹약하고 성기사를 자칭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여러 모험을 펼쳤다. 그중 특히 수염군주 이야기가 ○○지방에서 아직도 유명하다. 실제로 일이 일어났던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그 이야기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물론 그 일행 중 한 명이 ○○지방 출신인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이야기 특유의 신비하고 비의적인 뉘앙스가 ○○지방에 없는 뭔가를 자극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산문적이고 지루한, 계산으로 가득한 ○○지방의 지독한 분위기는 나도 싫어한다. 어쨌든 그다음, 클라우스가 이러저러해서 붉은 갑옷을 얻은 다음부터 모험의 끝까지는 ○○지방에서도 불명확하게 남아 있다. 음유시인들의 마무리말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두어 문장뿐이다. 그리고 늙은이는 음성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거나 음성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거나. 클라우스는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나는 클라우스가 정말로 죽기 전에 직접 들어보려고 찾아갔다. 자칭으로 시작했지만 어쨌든 진짜 성기사가 되긴 했으니, 이 정신 나간 노인에게 얼마든지 퇴치당할 수 있어 바짝 긴장이 됐다.

내가 클라우스의 오두막에 나타난 때는 그가 막 잠에서 깨어났으리라 생각되는 저녁이었다. 아마 그가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을 오두막과 움막의 중간쯤 되는 무언가는 주변의 울창한 풍경 속에 어둠과 함께 더 짙게 섞여들고 있었다. 짐승들조차도 모를 곳, 최소한의 손길만이 느껴지는 거처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과 그에게는 바로 이런 곳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문앞에 서서 최대한 공손히, 나직하게 말했다.

“계십니까?”

삼백 살이 넘은 성기사, 동시에 흡혈귀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는 일찍 죽었지만 이런 경우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죽음으로 따지면 내가 선배인데? 좀 더 위엄 있게 부를걸 그랬나? 나는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대는 앞으로 나오라...’ 운명책에 따르면 그는 곧, 두 달이나 세 달 안에 죽는다. 왜 죽는지는 모른다.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렸다. 영기 때문인지 쉽지 않았다. 죽어도 그런 게 남아 있다는 얘긴 들어봤다.

“나 클라우스는 이상한 방문자의 목소리를 들었노라... 방문자는 오래된 목소리에 대하여 물으러 온 것인데...”

문이 열리고, 클라우스의 녹색 눈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가운데 있다. 나는 그 연극투의 말에서 기쁨과 반가움을 감지했다. 마물에 훨씬 더 가까워진 클라우스에게도 아직 인간적인 부분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해설인가? 어쩌면 이 노인은 시간과 관련된 혼란에 휩싸여 있는지도.

“그것은 그가 아직 인간이었을 적, 종탑 옆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대는 앞으로 나오라... 이제야 클라우스는 알게 되기를...”

2024년 8월 14일 수요일

[24호 서신]

*24년도 가을 진입
- 환절기 대비
- 막판 말복더위 개소리 주의/섭식위생 관리 철저
- 과過 또는 저低활동 모니터링
- 격렬해지는 국내외 정세 대비(주변 연락망 조직화/조직화 참여 준비)

*종합 현황 보고
- 곡물창고 저장기금 30만원+ 달성
- 알림판 팔로어 310+에서 안정세
- 보름간 81호 발송. 구독자 100+에서 안정세
- 순간 필진 수 10인 달성(역대 최대)

*관리노동 합리화
- 곡물창고 양적 확대로 인한 관리 노동 증가 대처
- 개별필자에 대한 마감 지연 문의 중단, 필자로부터 요청이 없다면 일주일 유예기간 뒤 자동 권한해지
- 사용조례 개정: 현 필자의 3편 이하 마감 지연 태그 즉시 단편화

*보름간 72호부터 서비스 교체
- 편집기 불안정성으로 인해 스티비 → 메일리로 교체
- 댓글 기능 확인

*권장사항
- 공용태그 작성
- 월 1회 입하
- 투고 권유
- 게시판 활용
- 보름간 댓글
- 기금 사용 방안 모색

이상

2024년 8월 13일 화요일

추심업자에 관한 메모

채권추심업자. 굉장한 직업이죠. 저는 채권추심업자들이 살해당하는 비율이 생각보다 낮다는 점이 대단히 놀랍다고 봅니다. 2017년에는 단 한 명의 추심업자도 살해당하지 않았어요. 이건 사실은 비상식적인 일이죠. 왜냐면 추심업자를 살해하는 것이 자본주의적으로 더욱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추심업이라는 직업이 어떤 조건에서 성립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채무 계약을 성립시키는 최소한의 조건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채무가 성립하기 위해선 일단 돈이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이 되돌아가기 위한 조건을 설정해야죠. 보통 우리는 그걸 시간으로 설정합니다. 즉 A는 B로부터 돈을 받고 그걸 되돌려주는 시점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A와 B의 채무 계약이 성립하고, 서로의 관계가 규정되죠, 채무자와 채권자로.

사실상 남한과 같은 과정상국가[주석]에선 이미 성립된 채무는 반드시 상환됩니다. 상환하지 않고선 최소정상생활마저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추심업자는 채권자를 대변합니다. 채무자의 채무 관계는 추심업자가 아닌 채권자와의 관계죠. 추심업자는 채권자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만 채권자의 계약 이행은 추심업자와 채권자 사이의 계약에 따라 추심업자의 이득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이 추심업을 성립하게 합니다. 이 이득의 가능성은 비용으로 환원됩니다. 이 비용은 곧 채무의 이자를 통해 충당하게 되죠. 분명 여러 경제적인 법칙에 의해 채무에 일정한 이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타당하게 설명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자는 사실 추심을 위한 비용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 아래의 대화를 눈여겨봅시다. 2020년 있었던 추심원과 채무자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 후 추심원은 쓰리잡을 뛰다 회사에 걸려 해고되고, 이후 구직기간 동안 진 채무로 인해 추심당하다 자살했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신나는 부분입니다. 그 사람은 빚에 허덛이다 자살했어요. 자살햤어요. 자살했어요. 우린 이 일련의 대화를 통해 추심업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왜 돈을 갚지 않습니까? 돈이 없으니까요. 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습니까? 돈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부책임한 사람입니다. 뭐, 일단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갚을 수 있습니까? 나는 돈이 없는데요? 돈이 없는데 왜 돈을 빌렸습니까? 돈이 있는데 돈을 왜 빌립니까? 지금 저한테 화내는 겁니까? 씨발 그러면 안 됩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너무 감정적이네요. 그게 이 대화의 쟁점입니까? 쟁점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지각 있는 한국인이 맞습니까? 저는 지각한 적이 없습니다. 너 오늘 지각한 거 다 알거든? 니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단어 하나 모른다고 나보고 조선족이라고 한 겁니까? 한국인이 아니면 조선족입니까? 그럼 외노자라고 한 겁니까? 니가 외노자면 안 됩니까? 저는 외노자가 아닙니다. 중명해보세요. 아니 제가 그걸 증명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고요. 언제까지 돈 갚을 수 있습니까? 월급이 나오면 갚을 수 있습니다. 월급은 언제 나옵니까? 오늘이 월급날입니다. 왜 안 갚습니까? 이미 당신들이 내가 가진 전부를 가져갔는데요? 아뇨, 갚을 돈이 더 남았잖습니까. 갚을 돈은 남았으나 내 잔고는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25일이니까 다음 달 2일까지 갚으세요. 그건 안될 겁니다. 왜죠? 내 월급날은 한 달 뒤이기 때문입니다. 갚으셔야 합니다. 압니다. 근데 왜 안 갚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저랑 말장난 하십니까? 돈을 갚아야 하지만, 내겐 돈이 없고, 돈이 생기려면 다음 달 월급날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갚을 수 없다. 이걸 이해하는 게 어렵습니까? 투잡이라도 뛰어서 갚으셔야죠.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갚을 돈이 있으니까요. 갚을 돈이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까? 당신이 투잡을 뛰어서 제 돈을 대신 갚아주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당신은 받을 돈이 있으니까요. 저랑 장난치십니까? 제가 장난치는 것 같습니까? 이 채무가 당신의 채무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추심인입니다. 추심인의 목표가 뭡니까? 채권자가 채권을 회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채권자를 돕지 않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왜 돈 없는 채무인을 대신해 투잡을 뛰어 돈을 더 벌어 채권자를 위해 채권 상환을 돕지 않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갚아줘야 할 돈이 있는데 왜 말로만 때우려고 합니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내가 돈이 없으면 당신이라도 갚아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저는 무책임하지 않습니다. 아뇨, 당신이 책임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채권자에게 돈을 갚아줬을 겁니다. 돈은 당신이 갚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록을 보셨겠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씨발 돈은 당신이 갚아야지, 왜 나한테 갚으라고 하냐 개새끼야. 니 엄마도 니가 돈 안 갚고 이러는 거 압니까? 저에겐 엄마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사실은 있지롱. 씨발새끼야. 또 욕했어. 어제 당신 어머니랑 떡쳤는데, 당신 어머니는 당신이 이런 일 하는 걸 모르더군요. 울엄마는 건들지 마라 개새끼야. 울웜마는권듈지뫄라괘쇄끼야. 당신 어머니가 울며 안에 싸달라고 한 것도 기억납니다. 당신 어머니는 제게 오빠라고 부르며 행복해했죠. 오빠 안에 싸도 돼, 나 폐경 지났어. 당신은 당신 어머니가 폐경 지난 걸 알고 있었습니까? 당신은 당신 어머니가 임질을 옮기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자 이렇게 상상해봅시다. 한 명의 추심업자의 목이 잘려 광장에 내걸렸습니다. 그렇게 세계의 추심업자의 수 a가 a-1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추심업자를 위한 전체 비용 b를 상정했을 때 추심업자 1에게 할당될 비용은 b/a에서 b/a-1로 증가하게 되죠. [그래프] 이렇게 당분간 전 세계적인 추심업자 살해가 지속된다면 추심업자 한 명이 가져갈 비용은 b/a-a’으로 계속해서 늘어나겠죠. 이때 마지막 남은 추심업자가 살해되면 b/0으로 추심업자를 위한 비용 b는 모두 채권자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즉 채권자는 추심업자를 모두 살해하는 것이 이득이 되는 것이죠. 또한 채권자는 추심업자가 살해될 때마다 채무자와 비용 b’를 나누어 채무자에게 환원해 채권 회수를 가속화할 수도 있죠. [다이어그램] 이런 측면에서 추심업자는 채권자에게, 혹은 채무자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고, 대단히 상식적인 일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추심업자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는 점을 지적하시는 분들이 있을텐데요. 제가 왜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 나한테 뭐 맡겨뒀냐, 개새끼야?

2024년 8월 12일 월요일

마왕 토벌기

이것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을 치고 싶다는 이유로 동네 상가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한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마왕을 베기 위해 그 아래 사악한 졸개들, 악마 간부들을 쓰러뜨리며 나아가는 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손가락에 피가 맺힐 때까지 싸우고 나면, 상대가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내 곁에는 피아노 선생님이 힘겹게 복사해 준 악보라는 이름의 동료들이 있다. 한때 그들은 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디 세상을 구해줘!” 이것은 언젠가 마왕을 무찌를 때까지 동료를 늘려가는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스승을 얻은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사형을 얻은 나의 이야기다. 이것은 토벌기다. 마왕 토벌기.

2024년 8월 10일 토요일

앨범

최근에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이상하게 잊어버리기가 힘든 일이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어이없이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그 어이없는 일이 정말 내가 지금 살아온 방향과 아무 관련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길로 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어이없이 좋은 일이 일어났다. 아무튼 그 어이없이 일어난 좋은 일이 정말 좋은 일인지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니다. 아직 진행 중이다.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다. 최근에 겪은 어떤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근데 더 어이가 없는 건 내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중간에 무언가 배달이 안 되었거나, 내 이름과 다른 사람의 이름이 실수로 바뀌었거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건 없다. 그냥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이다.

며칠 전에 앨범 커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A는 자신은 앨범 커버가 별로면 음악이 궁금하지도 않다고 했다. 나는 A가 이것도 별로고 저것도 별로고 그런 식으로 커버를 보고 음악을 고르는 걸 보고, 또 어떤 음악을 고르는지도 봤다. 그건 A의 취향이고 기준이다. 나도 앨범 커버를 본다. 근데 내가 앨범 커버를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냥 디자인이 내 마음에 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앨범을 다시 한번 봤을 때도 좋을까 하는 것이다. 그 앨범을 한 번 듣고 말 것이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계속 들어도, 계속 들어도, 계속 마음에 들 것 같은 앨범 커버 말이다. 그건 한 번에 알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앨범 커버는 대체로 처음에는 큰 인상이 없는 것 같다. 심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A는 아마도 그런 앨범 커버는 그냥 걸렀을 것이다. 그게 그 사람의 기준인데, 나도 내 기준이 있고, 누구의 기준이 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나는 A가 어떤 앨범 커버를 거르는 걸 보면서, 아...... 저 앨범 커버에 한 번만 더 기회를 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2024년 8월 8일 목요일

작은 일에 너무 큰 힘을 ❶

 


치니언.

하고 유스프가 치니언을 불렀다. 깜짝 놀란 치니언이 고개를 쳐들었다. 유스프가 보고 있었다. 슬픔과 절망이 무작위한 비율로 뒤섞인 표정이었는데, 밑바탕은 또 성직자의 얼굴처럼 신중하고 간절해 보였다.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눈밑이 까맸고 움푹 꺼진 볼을 보자니 굶은 사람 같았다. “괜찮아, 당신?” 충분한 시간을 주었지만 유스프는 답하지 않았다. 치니언도 더 물으려다 말았다. 여기 온 건 할 말이 있어서였고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얘기를 좀 하고 싶어서 왔어. 우리에 대한...” 하지만 다음 단어는 뻑뻑해 잘 나오지 않았다. 치니언은 퍼지고 없는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오래되지 않은 집. 둘이 함께 몇 년을 지은 집이었고 직접 만든 가구 몇 개에는 아직도 좋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아주 먼 미래와 아마 없을 노년까지 생각하며 준비했는데 이제는 모두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

하고 치니언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버드나무로 만든 아기 요람. 거기에는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마중 나온 아픔이 쓰라렸다. 정신을 차려야 해. 치니언은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매만졌다. 이제 저것은 어떻게 될까 하는, 시답잖고 우울한 생각은 관둬야 했다. 오늘은 끝을 위한 날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어수선하지? 갑자기 들린 빗소리에 치니언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인데도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억수로 쏟아붓고 있었다. 들여보내달라는 듯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이 거셌다. 걸어올 때 치마 윗단을 부여잡았던 게 떠올랐다. 묘한 풀향을 풍기던 그때의 바람은 어쩐지 괴상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되뇌다가 치니언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고 말았다.

앗.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슬퍼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미련이 있어 보이면 붙잡을 것 같았으니까. 머뭇거리면 안 돼. 홀가분해지는 것을 정말로 원했다. 목전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인지, 마음을 압도하는 위화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치니언은 주위를 둘러봤다. “당신도 들려?” 말하면서 치니언은 귀를 움찔했다. 방 어딘가에 규칙적이고 미세한 소음이 있었다. 무의식을 살살 긁는 건 빗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였다. 무심코 치니언의 눈길이 유스프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같은 보석을 셋으로 쪼개 만들었던 유스프의 마술 반지. 어? 빠른 몇 초가 느리게 지나가는 동안, 의식 밑바닥에서 옴짝대던 치니언의 불안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왔다. 왜 갑자기 오한이 들었는지, 왜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 진실은 솟으면서 뜨거워지는 마그마처럼 분노로 변했다. 내가 할 말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유스프는 우두커니 죽은 나무처럼 서 있었다. 아는 거야? 치니언이 캐물었다. 당신 아내가 묻잖아, 알고 있냐고! 마침내 유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니언은 벌떡 일어섰다.

쾅!

하고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래도 한때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믿기지 않네.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이 아닌 건 아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꼬리가 죽 올라간 치니언의 입으로 노여움이 흘러나왔다. 기가 찼다. 그래서 치니언은 헛웃었다. 하! 그러나 유스프는 보기만 했다. 그는 거리낌 받아 마땅한 처지임을 아는 사람처럼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치니언의 눈밑이 가늘게 떨렸다. 게워낼 것 같은 분노를 억눌러가며 치니언은 물었다. 확실히 말해. 여기 쓴 거지? 유스프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을 살짝 감았던 치니언이 악몽을 파하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따졌다.

왜?”

하고 물었지만 유스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렸어? 유스프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치니언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묻는 말에나 답해. “세 번.” 세 번이라고? 순간 치니언의 모든 것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2024년 8월 7일 수요일

골드러시

전략.

몹시 덥군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의외로 연구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가 부족해서 오래 버틸 수 없을 거라고…… 그게 무엇이었지요, 아마도 근성? 염려해주신 것이 무색하게도 저에게는 이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에 어울리는 이야기 둘을 두고 무게를 견주다 임의로 하나를 골랐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목이 떨어지는 혁명가의 유령 이야기보다는 이쪽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원하신다면 이 이야기도 다음 편지에 쓸 수는 있겠습니다). 어느 고대 생물의 체내에 있는 정류장에 대한 것입니다.

생물의 종은 용으로 추정됩니다. 추정된다고 하는 까닭은 이 생물의 외관이 용에 대한 문헌 기록에 상응하는 영역이 크기 때문, 한편 행동 양식상 용이라는 생물의 문헌 기록과 배치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물은 날지 않습니다. 날아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섭취와 소화, 배설 등 기초적 생명활동에 연관된 행동도 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체내(말했듯이 이 생물의 체내에는 정류장이 있습니다)에서 감지되는 느린 고동소리로 미루어 수면중이라는 가설이 믿음직합니다.

그건 그렇고 체내에 정류장이라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정류장을 만든 이들(정확히는 그들의 후손) 말로는 큰 바위산 가운데에 낸, 산 앞과 뒤에 있는 마을을 잇는 터널을 그 생물이 마치 자기 자리라는 듯 차지해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모양입니다. 그야말로 그 생물의 몸길이와 둘레를 자로 재 만든 듯 몸이 꼭 맞았음은 부연할 것도 없겠지요.

버스는 하루에 네 번 이 생체터널을 통과합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두 차례, 다시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 두 차례. 벌리고 있는 입으로 들어갈 때나 거의 직선에 가까운 체내를 달릴 때에는 이것이/혹은 이곳이 어떤 생물의 몸 안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유롭지만 반대쪽으로 빠져나갈 때(또한 그리로 진입할 때)는 차체에 지나치게 꼭 맞게 줄어든 버블 세차장 시설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건 그렇고 정류장이라는 것은 그곳에 내리려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런 수요가 충분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용(으로 추정되는 생물)의 몸 안에 인간의 볼일이 무엇일까요. 이 생체터널이 생기고 한동안은 이 생물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횡행했던 모양입니다. 그 수단은 무엇인가 하면, 한마디로 먹어서 없애자는 것이었지요. 터널을 틈 없이 메우고 있는 거대한(덩치값을 하노라면 아마도 강력할) 생물을 처치하기 위하여, 자진하여 기생충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도축보다는 시추를 연상시키는 기구를 사용해 용(이라고 주장되는 생물)의 살점을 채취하고 그것을 운반하는 일은 일약 이 터널 앞뒤의 두 마을을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고 그에 따라 생체 터널 내부에 정류장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끔찍하지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정류장만 남아 있고 살점 채취 산업의 흔적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만 인근 마을에서는 지금도 ‘용의 고기’를 특산품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기 종류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육질이 매우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 듯합니다. 정류장 옆에는 간이 화장실이 있고 정류장 뒤편으로 가면 희미한 빛을 발하는 상처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벌어진 틈 바깥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원래의 터널이 있던 바위산과는 무관한 장소일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예전에 선생님께서 제게 부족하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떠올랐습니다. 그건 근성 같은 게 아니라 ‘인애’였어요. 그거라면 충분히 갖고 있는 인간을 별로 본 적이 없기도 해서 특별히 불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답이 생각났으니 답장은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것으로 줄입니다.


추신, 더위와 추위를 소중히 여기라고 하셨지요. 그것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라고요. 날씨가 유난할 때마다 그 말씀을 곱씹곤 합니다. 안녕히.

2024년 8월 6일 화요일

교정의 악마

아직도 반도 처리 못한 곤란한 책 박스가 집구석에 놓여 있다. 다들 처치 곤란한 책들 때문에 시름하고 있다. 주는 일에 별 기쁨 없다. 유쾌한 내용도 아니고... 애초에 출판사에 보내지 마시라 했어야 했다. 알라딘 가져가서 팔까? 팔리긴 할까? 요즘 잘 안 사준다던데...

저번에는 사인본이 필요하다 하시기에 퇴근하고 ㅁ사에 갔다. 역지사지로 저자들이 사무실 찾아오는 거, 심지어 그 시간에 그러는 건 여간 죽이고 싶은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책 박스 들고 다니면서 씨름할 시간도 없고, 어쨌든 한번 가보고 싶은 맘도 있었다. 다들 이런 마음으로 그랬던 거겠지...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ㅁ사는 그야말로 혼곤해지는 동네에 있었다. 가는 길에 스콜이 쏟아졌다. 회의실 같기도 하고 포장실 같기도 한 방에 앉아서 사인이란 것을 했다. 그런 시간까지 저자라는 녀석들을 기다리고 심지어 밥도 먹여야 한다니... 교정공의 그것과는 또 다른, 편집자들의 노고(내가 싫어서 도망쳤던)를 새삼 느꼈다. 그래도 난 저자 새끼들이랑 직접 부대끼지는 않아도 되니 다행 아닌가? 예전에 딱 1년 1대 사장님을 모셨던 때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은퇴한 판사라는 녀석이 자비 시집을 내는데...

어쨌든 진짜 문제는 이제 이 연재를 어쩔 것인지다. 그냥 완결을 낼 생각은 없다. 일 같은 일이란 게 다 그렇듯 출간도 기습당하듯 일어난 일이다. 내 비틀린 욕심을 거슬러 ‘인간적’인 책꼴을 위해 나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면 내가 원래 쓰려던 것은 뭐였냐? 세상은 이렇게 열심으로 망해가고, 저마다의 아우성 악다구니로 가득하고 자욱한데... 대체 뭘 쓰려고 했었지? 침착해라... 겁먹지 마라... 생각을 다시 해라... 너무 어려우면 쉬운 것부터 해라...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가라...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으로 가도 좋다... 그 이상을, 그 이상을 해라...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해야 한단 말인가? 쉽다면 뭐가 쉬운 것이며 도대체 어떻게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간다는 말인가? 교정공기라고? 뭐지? 뭐였지?

어떤 일은 끝나야 알게 된다. 실마리를 풀기 위해 재밌는 이야기를 하자. 나는 교정의 악마를 생각하고 있다. 그 악마는 요정의 반대편에 있다. 完全校正완전교정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한 자도 한 틈도 틀리지 않았다면 그 책에는 교정의 악마가 강림한 것이다. 말이 변하는 것이므로 그것도 잠시간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다 인간의 일인데 어떻게 불가능하겠는가! 다만 (역시 악마적으로) 등급이 매겨질 뿐이다. 이 책이 바로 19XX년도에 교정의 악마가 강림했던 바로 그 책, 단 한 권의 책입니다... 이건 틀리지 않았나요? 그때는 맞았습니다... 페이지가 많진 않군요... 스타일이 복잡하진 않군요... 문장 자체가 단조롭군요... 재단이 비뚤지 않나요? 이것이 교정의 악마다. 그렇다면 교정공은 교정의 악마를 강림시키려 노력해야 할까? 전혀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악마는 악마를 가리키는 손끝에 도사리고 있다.

포도 기사 ➌


폭죽처럼 솟은 고더린의 손목이 붉은 원호를 그리며 멋지게 돌았다. 기사들이 함성을 내뱉었다. 이내 그것은 바닥에 툭하고 떨어져 꿈틀거렸다. 대장이 짓이겼다. 발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기사들의 눈알이 고더린에게 모였다. 손을 잃었으니 끝난 싸움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고더린은 거뜬히 서 있었다. 기사들은 무슨 말을, 저 비열한 자식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내뱉을지 눈여겨보고 있었고 기대도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는 킥킥 웃으면서 왼팔 견갑을 벗어던졌다. “뭐 하나 내놓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왼손 정도면 꽤 값싸네요.” 기사 몇 명이 침을 삼켰다. 과연 우리가 아는 대로의 고더린이구나. 저 나쁜 자식. 이상하게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더린도 마찬가지였다.

한 손 검술도 좋지. 이 나름의 장점이 있으니까. 그는 검을 한 손으로 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옆으로 몸을 틀어 검과 자신을 일직선으로 만드는 형태였다. 팔이 처졌다. 한 손으로 든 장검은 무거웠다. 목숨이 걸린 것이니 당연한 건가? 그는 아린 통증을 외면하며 이렇게 말했다. “검을 처음 쥔 게 여섯 살 때라고 하셨던가요?” 노기 어린 눈이 고더린을 쳐다봤다. 순간 무섭게 빛이 어른거렸다. 대장이 얼굴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가까스로 쳐낸 고더린이 반격하려는 순간, 가슴 밑으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급급하게 검격을 쳐내고, 손목을 틀면서 내려 베었는데 힘이 실리지 않아 속도가 느렸다. 비웃음 같은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대장의 공격은 간격이 짧으면서도 묵직했다. 어떤 점, 혹은 선, 또는 면을 보고 있다는 듯 대장은 도망치기 어려운 궤적으로 찌르고 휘둘렀다. 고더린은 악 소리를 질렀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는 중이었다.

“여섯 살 때 난 아버지 밭에서 포도를 따 먹고 있었어요.” 뒤로 굴러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고더린은 턱과 귀, 코끝이 보기 흉하게 잘려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죽일 생각이 아니로군.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하던 고더린이 갑옷을 벗었다. 처참하게 죽이려는 거야. 추한 모습으로. 기사들이 목을 길게 뺐다. 갑옷을 벗다니 무슨 생각이지? 자살? 투구만 남기고 다 벗은 고더린은 제자리에서 통통 두어 번 뛰고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다. “좋은 놈들만 골라서 따 먹었죠.”

“그때부터 야비했구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대장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대장 주도의 공세가 이어졌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고더린은 맞받아치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장이 여섯 번을 휘두르는 동안 고더린은 한 번도 먼저 휘두르지 못했다. 그 사이 대장은 강경한 진압자처럼 점점 더 고더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평민이 기사들 박력에 맞설 수는 없는 법이라고 고더린은 생각했다.

“야비했다니, 틀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족을 이겨 참수된 평민에 대한 노래를 알았다. “사실 맞출 거란 기대도 안 했어요. 무식하단 건 미리 알았으니까.” 그는 그 노래를 좋아했다. 돈을 내고 청해 듣기도 했다. 뒷맛이 안 좋은 얘기이지만, 좀처럼 찾기 힘든 통쾌함이 있었다. “아버지가 시킨 거였어요. 어떤 게 좋은 녀석인지 알려주려고 그랬던 거였죠.” 어쩔 수 없군. 고더린이 손가락 하나를 내주며 물러났다. 그는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린 항상 제일 좋은 것만 먹었어요. 그런 게 가족이고, 그런 게 사랑이겠죠.” 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 방정맞은 입 좀 닥칠 수 없느냐고 그가 물었다. 고더린은 대장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나와 내 가족은 황제보다 좋은 포도를 먹었다 이겁니다. 아셨어요?” 대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더린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고더린의 경우에는 쓰고 있는 투구 때문에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여튼 한계였다.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여간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지겠지. 죽을 수밖에 없을 테지. 죽음을 감지한 뇌가 넘쳐흐르도록 생각을 짜냈다. 돈으로 기사 작위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얘기에 홀렸고. 말도 안 되게 비싼 값이었음에도 기회라고 여겼다. 뼈저리게 후회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지. 그게 기회가 아니었다는 걸. 그건 단지 기사라는 계급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지. 그들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신화가 큰 바람을 맞은 구름처럼 흩어졌다는 것을 의미했어. 작위를 사는 데 필요한 액수가 점점 더 낮아졌고 이제는 돈을 주며 애원해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나는 제일 비쌀 때 샀고... 나를 기사로 임명한 왕국은 사라졌구나. 그때 하던 전쟁을 아직도 하고 있구나. 나는 그저 부유한 자가 되고 싶었어. 커다란 밭 수십 개를 가지고서 내 이름으로 된 포도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홧병을 앓던 부모는 전쟁통에 죽었고 기사란 모름지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의 이야기는 평민에 대한 높으신 분들의 통념을 강화할 뿐이겠군. 쓰레기 노래에 나올 법한 지극히 어리석은 평민의 이야기잖아.

“그러니까 내가 황제보다도 대단한 거죠.”

대장의 귀가 쫑긋했다. 씩씩거리며 코를 벌름거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분을 삭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반응을 고더린은 놓치지 않았다. 다음의 말, 가장 좋은 말을 찾아내야 했다. “이해 못했어요?” 그 말로 생각할 몇 초를 벌었다. 머릿속에서 피가 격렬하게 돌았다. “검을 버리고 이 대단한 강도 밑으로 기어라, 이 말입니다.” 막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진 듯 대장이 고함치며 달려들었다. 무섭게 전진하며 든 상태 그대로 검을 휘두르는 그는 쇠로 된 풍차 같았다. 고더린의 장검이 대장 것을 맞고 튕겨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우와, 지는 건가. 고더린은 납득한다는 식으로 품을 내주며 대장의 장검을 내려다봤다. 쇄골과 가슴이 무참히 갈려나갔다. 뿜어지는 피가 보기 좋았다.

‘졌다.’

그 순간을 비집어 고더린은 대장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대장이 내미는 검을 제 가슴 깊이 움푹 박아 넣었다. 검의 뿌리가 몸에 닿는 것을 느꼈다. 아팠다. 그러나 별로 아프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깨에 턱을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바싹 붙어 있었다. 혀로 과일을 굴리듯 고더린이 달콤하게 말했다.

“투구를 안 쓰고 계시네요.”

고더린이 대장의 귀에 괴성을 질렀다. 크고 또 악에 받친 괴성을. 대장이 비명을 내질렀다. 검을 놓은 그가 허겁지겁 귀를 막자, 고더린은 한껏 물려둔 단단한 투구를 대장의 턱에 내질렀다. 내던져진 그 벼락이 대장의 턱뼈를 박살내고 박살냈다. 박살나고 박살난 많은 것들이 대장의 입 안팎으로 무자비하게 뛰쳐나갔다. 이제 두 번 다시 무언가를 씹고 다질 일은 없다는 듯. 고꾸라지며 대장은 공주에게 씌워주었던 자신의 투구를 떠올렸고, 머리에 쓰고 있을 것을 괜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진 것이 아니라 당한 것뿐이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을 때에는 이미 쓰러져 정신을 잃은 뒤였으므로, 그 모든 것들은 했다고 생각됐을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고더린은 피범벅이 된 투구를 벗어던졌다. 깨진 머리통의 머리채를 움켜쥐고서 고더린은 잘린 손목을 불로 하듯 흰자뿐인 대장의 눈알에 지졌다. 그것은 정말이지 오줌이 새어나올 정도로 통쾌한 일이었다. 그는 온갖 천박한 욕설을 대장에게 내뱉었다. 그는 삶의 한 부분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았다. 다시 평민이 되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자신만의 이야기를 얻었음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해방했음을 알았다. 자신을 옭아매던 직업윤리가 보기 좋게 부서졌음을 알았다. 민중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벌떡 일어난 고더린은 자신을 둘러서 있는 기사들을 매서운 기세로 돌아봤다. 다들 입을 벌리고 얼치기처럼 서 있었다. 나서야 하는지 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장검을 주우러 그들 발께에 다가가자 놀란 그들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고더린이 말했다. “저 새끼도 나를 죽일 생각이었을 거야.” 힘이 다 빠져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주워 든 그에게, 대장은 뭉개진 포도알처럼 보였다. 마저 뭉개기 위해 악귀처럼 걷던 그에게 누가 외쳤다.

“받아!”

발치로 반들거리는 동그란 약병이 굴러왔다. 높은 수준의 장검보다 비싼, 사람들의 희생이 모이고 모여야 만들어지는 고급 물건. 멈칫한 고더린은 멍한 얼굴로 묵묵히 보다가, 문득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강도가 될 건 아니지?” 무스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상처에 약을 바르며 고더린은 싱글벙글 웃었다. 저 앙큼한 자식. 귀여운 공범. “몰라, 이 개자식아.” 고더린은 빈 약병을 발로 터뜨린 다음 대장을 내버려두고 말에 올랐다. 죽지도 지지도 않았지만 또 한 번 누군가와 싸운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몸으로. 하지만 그조차 확신해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뭐가 다른지.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아니면 마술인지. 어째서 자신에게 그같이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 것인지. 누군가는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고더린은 마지막으로 한 번 기사들을 눈으로 훑었다. 맹렬한 적의와 맹렬한 존경이 섞인, 선망과 원망이 반쯤 섞인 눈빛이 투구 속에서 빛나고들 있었다. 그래, 너희가 알 턱이 없지. 고더린은 전우였던 개새끼들의 이름을 하나씩 전부 불렀다. 그리고 결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승자는 폭군처럼 강해지도록 하소서!”


*


멀어져 가는 강도를 기사들은 바라보았다. 따라가고 싶다는 욕망에 몇 명의 기사가 제풀에 놀라 두리번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망해도 왕은 하나 있어야지.” 그러나 무스트는 말했다. “찾아내자. 왕에 어울리는 사람을.” 기사들이 하나둘 말에 올랐다. 아직 죽지 않은 대장이 쓰러진 자리 그대로 뉘어 있었다.

2024년 8월 5일 월요일

시민을 위한 워크숍 같은 것

작가님,
저는 작가님만큼 많은 단어를 알지 못해요
평소에 국어사전을 가까이하지도 않구요
거의 TV만 봐요, 유튜브 아니구요,
여기에 왜 왔는지도 까먹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 참석해보니
작가님이 권유한 대로 상상,
그런 걸 해보자면 가끔은
자연이, 야간 광역버스처럼 저한테 돌진하는 것 같아요
그 앞에서 겁이 났던 적은 없어요
밤에 버스 많이 타본 분들은 알 텐데
아니라면 제가 하는 말. 이해가. 가시나요
너무 나만 아는 얘길.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저는 상점에서 그릇, 컵, 이런 걸 팔아요
제일 잘 나가는 건
한 손에 쥐기 좋은 파이렉스 유리컵인데
저는 그 상품을 다른 이유로 좋아해요
설명이 필요 없거든요
있는 그대로 전시만 해두어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가거든요
제 삶의 어떤 순간은
그런 무렵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점심시간, 가끔 배회하는 손님들 있어요
딱히 뭘 사려는 건 아닌데
그냥 매장 안을 돌아다니죠
그 손님들을 위해 타임세일을 외쳐요
가끔 제 확성기가 유리 확성기 같은데,
외쳐봐도 아무도 모이진 않거든요
손님들은 그냥 마음대로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참, 저 너무 길게 말하죠?
혼자 너무 말이 많은 건 아닌가요?
제가 이렇게 두서없이 말해도
다들 들어주시다니
참, 좋네요…
꼭 작가님이 된 기분이에요
그냥 요 앞을 산책하다가
사람이 많아서, 재밌어 보여서,
이 멋진 공간에 불쑥
들어왔던 것 같네요
한번 들러보길 잘한 것 같아요
상상, 저도 좋아하거든요
오늘을 꼭 기억하게 될 것 같거든요

2024년 8월 2일 금요일

살수차 같은 것

너무 더운 사람들이 막
뜯어진 실밥처럼 걸어가는데
마침 시청에서 보낸
살수차가 지나간다
도로가 식으며
엎질러진 냄새가
총체적으로 아마
여길 지나간 것들의
전부 냄새일 텐데
깨어나 일어나
죽은 사람들이 죄다
묘지에서 부스스 일어난 듯한
풍경이 폭염과 어울린다
살수차는 아무 생각이
아니면 책임만이
너무나 부피 큰
파란색 그 임무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
이어지는 냄새
평소 내가 알던 도로는
잠깐 듣고 지나가는 로고송처럼
아무 냄새도 분명
잠잠했었는데
내가 처음 본
오늘 시청에서 나온
살수차는 아주 잠시만
역할을 다해도
지금까지,
지금까지 그러하다.
나는 지금 팔 걷고
살수차의 뜻밖의
영향력 아래에서
풍부해진 저질러진
도로에
털썩,
여름의 석유를
마시며 돌연
큰불 되고 있었다
다시 살수차
내게로
기다리고 있었다

2024년 8월 1일 목요일

24년 7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0 (59)
―――


이달의 총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해당사항 없음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해당사항 없음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1,789원 (0원 + 301,387원 + 402원)

2024년 7월 25일 목요일

끝이 없는 장난

테이블 위에 모자가 놓여 있다. 누가 놓고 간 것일까? 술집에는 바텐더와 나만 있었고 모자가 바텐더의 것일 리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번 물어봤다. 저 모자의 주인이 혹시 바텐더 당신이냐고. 바텐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의 것으로 할 수도 있다고. 나는 모자를 집어 들어 머리에 쓰곤 말했다. 나는 사물에 관심이 많다고. 바텐더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들도 모두 사물일 수 있다고.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물은 입장을 가지지 않는다고.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는다고. 바텐더 옆에 있는 사슬 장식이 조금 기울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드문드문 떠들어댔고 바텐더가 내 술잔에 위스키를 조금 따랐다. 컵에는 얼음이 차 있었다. 바텐더가 내 머리 위에 있는 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어느 날 내가 술에 취해 여기에 두고 간 것이라고. 그게 이 모자를 나에게 돌려주려고 한 이유라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고. 술에 조금 취한 나는 웅얼거리며 뭐라고 하며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모자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모자에 탐욕스러워지려면 이 모자는 내 것이 아니었어야만 했다. 나는 그런 느낌과 별 상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나를 우스꽝스럽게 부정당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이 말에 대한 흐릿하나 분명하고 확실한 어떤 근거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잊어버렸다. 나는 술에 취해 있었던 탓이다. 나는 곧바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입을 열어 말했다. 바텐더가 내 잃어버린 기념품이란 사실을. 한순간에 사물로 여겨진 그는 눈썹 사이를 좁히며 조금 더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어질 내 말과 상관없이 이미 그는 빈정이 상한 듯했다. 아깐 우리 모두가 사물일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입구에서 한 명이 들어왔다. 바텐더는 내 눈앞에 서서 이어질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방금 들어온 사람을 입을 벌리고 봤다. 그는 놀라운 생김새를 지녔다. 그가 다가오더니 콧김을 내며 말했다. 술 한잔을 달라고. 나는 모자를 내 머리에 쓰고 술집 안을 나왔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끝이 없는 장난에서 그만두고 나온 것이라고.

2024년 7월 24일 수요일

동지들과 여섯 개의 비유

피와 해골 신도


복수할 것이다. 교정의 제단에 교정된 피와 해골을 바칠 것이다. 시발… 복수한다…


지옥에서 밭 갈기


지옥에서 어떻게 밭을 갈 수 있을까? 지옥은 불타고 있다. 지옥은 형형색색으로 녹고 있다. 지옥은 너희의 것이 아니다. 지옥은 우리의 것이다. 다름 아닌 우리의 지옥이다. 여기가 즉 지옥이다. 사후세계…… 우리에 앞서 죽은 이들의 死後世界는 어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우리가 사후세계로 가는 게 아니다. 우리가 간 뒤 이곳에 사후세계가 남는다. 이 사후세계에 죽은 이는 없으되 죽음은 남았다. 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너희 죽은 이들은 이곳이 더 나아지리라 믿으면서 죽었을지 모른다. 또는 반대로 ‘드디어 이곳을 떠나면서’ 죽었을지 모른다. 어쨌건 사후세계는 너희 자신이 없는 미래이고 우리에게는 지금이다. 그리고 이곳은 지옥이다. 같은 식으로 아직 죽지 않은 우리에게도 사후세계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 우리는 없다. 우리는 너희의 사후세계에 틀림없이 살고 있다. 지옥에서 어떻게 밭을 갈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가 하려는 일이라면


핵 광야의 피케팅과 라디오 방랑


커다란 널빤지 두 개에 끈을 달아 어깨에 앞뒤로 걸쳐 멜 수 있게 만들었다. 널빤지에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정확하다. 그 밑으로, 동지는 입은 것 같지도 않은 거적때기 같은 걸 입고 있다. 동지는 그런 차림새로 광야를 헤매고 있다. 한 손에는 라디오를 들었고, 라디오에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나오고 있다. 그 역시 널빤지에 쓰인 것과 같이 정확한 내용이다. 녹음된 목소리가 무한히 반복 재생되고 있다. 십중팔구 죽은 이의 목소리일 것이다. 아마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죽었을 것이다. 모두 죽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다. 동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모를 광야를 돌아다니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적힌 패널을 걸치고, 원래부터 자신의 목소리였던 것만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건전지가 도대체 언제 다할 것인지, 이미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어째서 라디오가 꺼지지 않는지 불안해하면서.


연자매


연자매에 동지가 매여 있다. 누가 매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맨 것이다. 동지는 그것을 밀고 있다. 동지는 자신이 무엇을 찧는지 알고 있다. 매의 윗돌과 아랫돌 사이에서 무엇이 이겨지는지, 정확히 무엇이 거기에 들어갔는지 오직 그 동지만이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것들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동지에게는 모두가 주기만 했고, 아무도 그것을 가져가지 않기에, 매를 통과해 나온 그것은 켜켜이 쌓이고만 있다. 동지의 일은 다만 미는 것이므로 그것을 가져갈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돌의 힘과 낱알의 으스러짐만이 동지의 팔과 몸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자매의 부속인 동지는 애써 잊으려 한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찧어 오라고 한 것인지, 그 일이 무슨 뜻인지. 민다는 것은 돌린다는 뜻이다. 돌린다는 것은 찧는다는 뜻이고. 동지는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파묻히고 있다. 자유로운 동지의 육신이 연자매에 붙들려 있다. 동지는 영혼의 노예다. 영혼은 연자매이고, 그것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불타는 들판


넓고 마른 들판이다. 들판이 어디서 끝나는지는 모른다. 끝나기는 끝날 것이다. 강을 만나거나 산을, 절벽을 만나면서, 도로를 만나거나 마을, 도시를 만나면서 끝날 것이다. 어쩌면 들판은 시간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어디서 끝나느냐보다 언제 끝나느냐가 중요한지도 모른다. 이 들판은 지금 불타고 있는 들판이다. 반년 뒤나 몇 개월 뒤면 잿더미가 되며 끝난다고 해 보자. 이 불타는 들판을 갈피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끄려고 하는 동지가 있다. 이 동지가 들판의 끝을 잘해야 1분이나 늦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지의 주변에 다른 이는 없다. 다른 이는 그 동지의 머릿속에 있다. 들판의 끝이 미래에 있는 것과 같다. 머릿속의 그 동지는 뛰어다니는 그 동지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이 들판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냥 타게 두십시오! 동지는 양동이를 들고 머릿속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불을 끄러 뛰어다니고 있다. 나에게 제발 그것을 묻지 마라! 왜 불을 끄려고 하십니까? 제발 그것을 묻지 말고 꺼져라!


늪괴물


늪괴물이 여기에 있다. 늪괴물을 뒤덮고 있는 녹갈색 수초들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뒤덮고 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늪괴물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늪괴물은 바깥에서부터 구성되고 있다. 안에서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어떤 힘에 의해 밀어 넣어지고 있다. 늪괴물 모양의 공백을 향해서다. 늪괴물을 함부로 헤집다가는 늪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늪괴물을 향해 뭔가를 밀어 넣는 힘의 정체는 늪에 빠진 것들의 외침이다. 늪괴물은 늪 밖으로 서서히 이동당하고 있다. 이별하지 않으려는 진창의 외침으로. 하지만 늪괴물은 늪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떠도는, 늪괴물은 늪의 유일한 늪 아닌 것이다. 나의 늪괴물 동지는 별빛 아래서 늪과 싸운다.

2024년 7월 23일 화요일

유령들을 위한 미술관

새들의 숨결이 꽃에 닿는다. 꽃은 자신을 오므렸다가 펴낸다. 어떤 사람이 본다면 움직일 수 있는 꽃이라고 오해될 것만 같이. 그러나 그것은 카메라 영상을 빨리 감기로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면 현실의 꽃은 움직이지 않는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느리게, 천천히 움직인다. 물론 어떤 사람이 판단한다면 그것은 움직일 수 있는 꽃이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꽃은 움직이는 것이다. 하루에서 며칠 동안 오므렸다가 펴지며…… 펴졌다가 오므린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어떤 사람은 꽃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답답할 테니까. 꽃이 오므렸다가 피는 것은 ‘늘 이런 식이었다.’라고 생각하는 다른 뿌리와 줄기, 잎들의 명령에 근거한 움직임이다. 꽃은 그 명령에 따르기엔 움직이지 않는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이 답답하다. 그러나 꽃은 그 움직임을 느리지만 충실히 수행해 내는데, 따라서 꽃을 찍은 영상을 빨리 감기한 엉뚱한 것도 세상엔 필요한 것이다. 뿌리와 줄기, 잎들의 명령은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온정적이며, 관대할 것이다. 어쨌든 간 해내는 것에 그것들은 만족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남 때문에 시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그 생각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시킬 수도 있으며 안 그럴 수도 있다. 답답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남들과 비교해 빠른 속도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더 많고 다양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줄기와 잎, 뿌리가 꽃에 대해 긍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독재적인 품성을 동경했다. 새들의 숨결이 꽃에 닿지 않더라도 그 꽃은 줄기, 잎, 뿌리들의 명령(제안)에 근거하여 움직일 터이다. 어쨌거나 꽃은 새들의 숨결을 맞은 것이다. 앞으로도 맞을 것이다. 전에도 맞았기 때문이다. 새들의 숨결은 꽃에 영양분이 되지도 햇빛을 주지도 않지만 꽃잎을 살짝 떨리게 한다. 이는 꽃의 문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우리와 같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같은 데가 있는데 다르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데 같은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문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과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꽃은 줄기와 잎, 뿌리와 다른가?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여지도 있다. 여기에 적합한 말이 [일부]인 것 같다. 나는 나의 [일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초과이기도 한데, 나를 초과하는 것은 나와 같거나 다른 것들이 갖고 있다는 생각을 근래에 한다. 나는 잎과 뿌리, 줄기와 잎일 뿐만 아니라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만큼 인간과 유령 사이를 오간다. 다큐멘터리들은 죽어 있어서 좋다. 나는 살아 있는 것들보다 죽은 것들이 좋았다. 그런 것들을 보면 긴장되지 않고 안온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 있는 것들을 봐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사랑] 때문이었거나 그랬던 것 자체가 사랑이 되었다. 살아 있는 작품들을 보는 일은 사랑 자체를 내게 느끼고 묘사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 나와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꽃은 새들의 날갯짓과 다르지만 하나의 문화를 같이 구성한다. 자연이라는 문화다. 문화는 자연을 정의하고 또 이용하지만 그 자체가 자연에 속한다고 하는 생각. 그런 것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하게 되는 생각이다. 죽어 있는 다큐멘터리들은 내가 위에서 말한 카메라 영상을 빨리 감기한 것을 이따금씩 보여주는데 그것은 답답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꽃의 움직임의 시간 진행에 따른 차이. 많은 예산이 들어간, 죽어 있는 다큐멘터리라는 그릇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다.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동일함을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두 부류와 같거나 다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식의 오묘한 비율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문화와, 문화를 보는 사람들의 눈. 당신은 이 좌우 중 어떤 것에 속하는가? 내가 속한 문화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죽어 있는 것에 가까운데, 나는 죽어 있는 것과 가까이 해야 마음이 편하고 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때때로 살아 있는 작품들을 보고 간단히 코멘트하고 있다. 물론 죽어 있는 작품들도 본다. 더 많이 본다. 살아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나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죽어 있는 것들은 지루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 문화는 재미를 위해서 살아 있으며, 그와 비슷하게 가끔씩은 살아 있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물론 조금의 같거나 다름이 있긴 하겠지만.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는 그렇게 조금의 같거나 다름이 있는데, 그것들은 너무할 정도로 살아 있다는 결론에서만큼은 동일한 편이다. 죽어 있는 것에는 그와 비교해 무분별할 정도의 차이들이 있다. 어떤 죽어 있는 것들은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 아주 기품 있게 관리되지만, 다른 어떤 죽어 있는 것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급속히 풍화되고 썩는다. 문화들이 자연을 이용하거나 또 [일부]로 삼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랑]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좌와 우가 다르듯. 살아 있는 것을 정의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어떤 독자군들에겐 기사도 로맨스 소설 같은 통속적인 재미를 안겨준다. 숨결을 뱉어내는 새들에게 보이는, 꽃들이 가득한 화원처럼 말이다. 그런 그림이 미술관에 걸려 있다. 그것을 보는 유령들. 여기는 유령들을 위한 미술관이다.

2024년 7월 22일 월요일

마네킹 같은 것

시내의 쇠락한 상점가를 지나다보면 허물어지기 직전의 마네킹들을 보게 된다. 지금은 없는 상점 주인들은 입혔던 옷을 가차 없이 벗겨놓았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가로등에 의지해 몸을 빛내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도 마네킹인 걸 알아볼 수 있다. 어떤 자세로든 조금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옷을 입고 있는 몇 안 되는 마네킹들은 최상의 멋진 자세를 하고 있지만 옷이 벗겨진 마네킹들은 뭐든 벗겨내기에 최적의 자세이다. 그러고 강박적으로 서 있다. 지능이 없어 중립인 채로, 할 일 없는 채로. 그들이 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할 것이다. 하지 않는 채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 그들도 노동자다. 어떤 얼굴들은 경직된 표정이고 대충 화장한 듯한 얼굴도 있다. 행복한 얼굴은 없고 아무도 그런 경험을 원하지 않는다. 표정 연습, 그런 걸 할 뿐이다. 그런 걸 잘할 수 있다면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마네킹 인구총조사를 한다면 남녀 숫자가 비등비등하겠지, 그런데 하반신이 밋밋한 애들도 많이 보인다. 그런 애들까지 다 뭐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이런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니, 제발 말들 좀 해라! 명령이다...

2024년 7월 20일 토요일

초월일기 16

 

다시 일기를 매일 쓰고 있다

친구가 명상을 알려줘서 명상에 흥미가 생겼는데 명상을 하려고 하다 보니 명상과 일기 쓰기가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기 쓰기는 명상만큼의 파급력이 있다 그 친구는 명상을 하면 달라질 거라고 말했고 명상이 주는 쾌락이 너무 커서 술도 끊었다고 했다 내게 일기가 주는 쾌락도 그와 맞먹는다는 생각이 든다 명상의 핵심은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다 일기의 핵심 역시 마찬가지다 명상은 <지금>에 집중하되 생각이 아니라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지만 <일기>는 생각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일기를 쓸 때는 내가 하는 생각들을 실시간으로 언어화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나는 최근에 <말>을 좀 기피하게 되었고 왜냐면

말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난 떳떳하지 못한 말을 할 바엔 그러니까 거짓말을 할 바엔 안 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말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다 떳떳해지면 되지 않겠냐고 

그리고 이 생각은 놀랍게도 내가 2년 전에 쓴 일기를 읽다가 하게 된 생각이다 그때 내가 나를 너무 잘 설득시켜놔서, 지금의 나 역시도 그때의 내게 설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기를 쓸 때 가장 먼저 설득하게 되는 대상은 나 자신인 것 같다 나는 그게 때때로 합리화처럼 여겨지고 그래서 가끔은 모든 일기가 역겹다 그런데 그 설득이, 어떤 순간에는 굉장한 애정처럼 느껴지고 강한 힘처럼 여겨진다

결국 사랑이 중요하다



2024년 7월 9일 화요일

머리를 붙들고

하하힛! 히하힛!

오전부터 앞마당에서 기묘한 소리가 울린다. 나가보니 요정이 으스스한 춤을 추면서 창고로 들어오고 있다. 손에는 네모나고 판판한 뭔가를 들고 있는데... 판떼기? 과자곽? 온통 형광색으로 물들어 무슨 물건인지 제대로 분간이 되질 않는다.

뭐가 그렇게 신나세요? 그건 뭐예요? 요정은 춤을 멈추고 선다. 자신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생각하려는 듯,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말은 다른 차원에서 듣는 중인 듯, 미동 없이 서서 나를, 아니면 내 뒤편을 빤히 바라본다. 너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지? 당연하지만 요정은 숨을 쉬지 않고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다. 저럴 때마다 정말 미칠 것 같다.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요정의 눈길을 피해 그 손에 들린 것을 유심히 보니 책이다. 요정의 쓰리고 차가운 손아귀에 엉망으로 얼룩져 제목을 알아볼 수 없지만 하여튼 책이다.

요정은 속삭인다. ...니까.. 관업....랑... 뭐라고요? 너...랑은 상관없..으니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요정은 하하힛 하힛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춤을 춘다. 그러다 책을 획 공중으로 던지는데, 나는 머리를 가리고 얼른 도망쳐 들어간다. 책은 바닥을 향해 펼쳐져 있다. 춤을 멈추지 않는 요정의 발이 책을 마구 짓밟는다. 정수리에 얹은 손을 지그시 누르며 나는 지켜본다.

2024년 7월 1일 월요일

생활 같은 것

너는 벽난로 가까이에 앉아
옷깃을 데웠다고 한다
종일 털로 된 닭 인형을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인형들은 한결같이 슬픈 모양을 하고 있었고
창밖에선 누가 심었는지 모를
사과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몸이 크지 않은 이들이 모여서 기도하듯이
입으로 웅얼거리는 소망이
새잎처럼 돋아나듯이
너는 매일의 생활을 반복하며
이 모든 현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가을이면 사과들이
달아오른 얼굴 되었다
나무 수레 가득 실려 나갔고
그중 몇 알은 수레가 덜컹거릴 때마다
개울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사과들은
사과들끼리
이별하고
그 뒤의 일은 서로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바깥에서 살아가다
오랜만에 방문한 나는
이제 정착하겠다고 다짐하기 전에,
사과처럼 부푼 꿈들이 썩어가는 장면을
숱하게 보고 왔다고
풀 죽은 얼굴로 말하기 전에,
늦은 밤 너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지금은 인형들이 자고 있으니
말소리를 낮춰달라는 너의 부탁을
우선 듣고 있는 것이다
들으며 자작나무 향이 나는
너의 집 서가를 찬찬히 둘러본다
아름다운 삽화들로 가득한 동화집이 꽂혀 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과의 인기척이 들린다
너는 인형을 팔아 번 돈으로
한 철 휴식기를 보내며
이 책을 구상하고
쓰고
그렸다고 했다
그때마다 지난 계절의 사과들이
눈에 밟혔다고……
나는 아주 집중해야만 들을 수 있는
너무 조용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24년 6월의 모금통

이달의 격려 수 (누계)

모든 격려: 1 (59)
―――


이달의 총격려금

5,000원


상세:
일자 / 들어온 격려금 ― 입금자명

11일 / 5,000원 ― 빙터 내놔


전달:
격려된 태그 [입하여부] ☞ 전달된 격려금

빙터 [入] ☞ 5,000원


총기금 (당월 기금 + 이월 기금 + 예금이자)

301,387원 (0원 + 300,890원 + 497원)

2024년 6월 29일 토요일

포도 기사 ➋


기사들 싸움에는 언제나 세 개의 국면이 있었다. 탐색과 공세(수세), 그리고 종막. 그것은 하나의 발레 또는 연극 같은 것이어서 기질과 성격, 선호에 따라 다르게 연출되었다. 중요한 것은 계산이었다. 지상전이란 오후 내내 걸어야 하는 뻘밭 같은 것이어서 갑자기 끝나거나 물리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앞선 이를 죽이면 다음 이를 죽여야 했다. 그 작자를 쓰러뜨리고 나면 저 작자를 쓰러뜨려야 했다. 전력을 다 할 지점은 어디인가? 마지막 싸움까지 몇 번의 싸움이 더 남아있는가? 그들 몸은 그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생산한 문법이었고 정답을 구해낸 순간이 전부 있었다. 따라서 기사란 밖에서는 예술가였고 안에서는 수학자였으며 안팎으로는 군인이었다. 하지만 고더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수학자라고, 군인이라고, 그 집체인 기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한낱 평민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을 어디 두고 내리는 것이 걸리적거렸을 뿐 아니라 굳이 두고 올 필요도 못 느꼈다. 그에게 싸움은 무언가의,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만큼은 절대로 아니었다. 농가 출신으로 입신양명이라는 헛꿈 때문에 가족을 배신한 저 자신에게 그 같은 생각은 애들 놀음이었다. 그에게 싸움은 거머쥐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일확천금에 대한, 완전히 다른 삶에 대한 조바심이자 발판이었다. 그것이 다른 기사들과 고더린의 차이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적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겉돌았고 무기력했고 남들이 이길 때 혼자 무너지고는 했다. 그의 스타일은 바로 그 부분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발레는 그가 줄곧 경멸하고 조롱해온 것들, 의무와 고결함, 그것에 대한 리액션이었다. 전투의 세 가지 국면 따위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기사 고더린의 싸움에는 딱 두 가지만이 존재했다.

도발과 살인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이 싸움을 통해 자신을, 적확하게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이 그를 구제불능이라고 여겨왔듯, 자신 또한 그들을 구제불능으로 생각해왔음을. 그는 웃음과 함께 뜸들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잘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

“이 시시하고 멍청한 것들에 복무하는 일이 드디어 끝났어요, 대장.”

오른발을 한 걸음 뒤로 물리며 고더린은 말을 이어나갔다.

“대장. 저것들은 진작 다 죽어 없어져야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것들, 세상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함에도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쥐고서, 우리를 헐값에 쓰던 저것들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기사가 된 이래로 단 한 번도 저들에게 충성한 적이 없어요. 저들은 내 마음을 산 적이 없어요. 그러려고도 안 했고요. 그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으니까, 저들은 왕이고 우리는 신하이니까 따르라는 말에 따르고 있는 척했을 뿐이에요. 난 돈을 벌고 싶었어요.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하고 앉아야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가, 뭐 그런 것만을 생각했죠. 그리고 난 지금 늙은 기사인 당신을 봐요.“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다. 다들 고더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장은 미간을 움찔거리며 장검을 쥔 손을 옴짝거렸다. 그의 마음이 죽은 공주와 죽일 고더린 사이 어딘가를 맴돌았다.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흉터와 관절통과 후유증, 지키지도 못한 왕국 말고는. 당신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그것마저 어떠한 고난으로, 기사의 삶의 맹렬한 한 부분이라며 비탄에 도취되겠죠. 불가에 앉아 슬픈 얼굴로, 누군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기를 기다릴 거고요. 내 말년이 그런 것이길 바라지 않아요. 비아냥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니까요. 당신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솔직합니까? 동지들은 나를 물욕에 미친 강도놈이라고 비난하지만, 언제나 나는 내가 당신들보다 훨씬 더 낫다고 여겨왔어요.“

울컥하고 대장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대장이 성큼성큼 고더린에게로 걸어 들어갔다. 고더린은 대장과 자신까지의 걸음을 읽어내며 한 발에서 두 발, 절제된 보폭으로 물러났다.

“당신이 공주에게 씌워준 투구를 가져가 내다 팔 거예요. 아뇨, 공주의 시체도 팔 겁니다. 모든 것을 노략하고 모든 것을 능욕할 거예요. 한때 왕국의 기사였던 강도. 그 같은 악명을 거머쥐고, 내게 오는 모든 이들을 받아주며, 폐허에 군림한 다음 포도주로 된 목욕물에 몸을 씻을 거예요. 말하고 보니 왕과 다를 바 없네요. 내게 충성하겠다면 지금이 기회랄 수 있어요, 대장. 그러니까 검을 버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더린의 왼손이 날아올랐다.

2024년 6월 26일 수요일

그림자놀이

불빛은 딱 하나의 공간에서 시작되고 그 앞을 비추는 데 반해 벽에 생긴 그림자는 더 커다랗다. 결말이 정해진, 예상되는 말들인 것처럼 그곳에는 손전등이 있었다. 그것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빛에다가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손으로 빛을 가린다. 손전등에서 집약되었던 빛이 내 손바닥에 막혀 벽면에서 내 손바닥 모양을 볼 수 있게 된다. 손전등이 벽까지 향하는 그 중간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면 그림자 또한 움직인다. 나는 아예 벽을 보면서 날갯짓하는 새를 손으로 만들었다. 빛은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으로 구별되고, 다시 다르게 말할 수 있다. 빛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구분된다. 내 손이 만든 빛이 가려진 부분으로 이루어진 새는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어두운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생김새는 어떠한지. 동화책에 나오던 파랑새와 닮게 하느라고 파랑새의 모습을 앞서 상기해야 했다. 어린 시절 해보기도 했던 이 그림자놀이는 딱히 의미가 없는 행동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어떤 신은 그림자를 회수한 뒤 그것을 향신료처럼 쓴다고 그랬다. 그것은 새로운 그림자일수록 더 값비싸다고. 그림자의 표현 범위는 빛의 표현 범위를 역으로 가진다. 그런데 그림자의 표현은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언젠가 신발에 풀잎이 묻은 걸 보고서 잊어버렸듯이. 빛의 표현들의 느낌은 기억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림자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나 어차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부재의 흔적으로 빈 데를 그림자들은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에 족적을 남기지 않는 것일까? 어떤 차원에선 족적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태양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생겼는데 그걸 보면 닫혀 있는 옷장에 그림자가 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옷장 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그림자가 문을 열자 사라진다. 나머지 열지 않은 부분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다시 옷장을 연다. 그림자로 된 담비가 뛰쳐나간다. 그걸 본다. 그 형상의 구분은 오로지 명도에 의한 것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자음 문제를 맞췄다고 생각이 되듯 말이다. 손전등이 비추는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너무 오래 그림자놀이를 한 것이다. 손전등은 으레 잘 망가진다. 고장이라고 하기엔 손전등은 다시 사는 일이 흔하다. 그림자를 소유한다는 일은 드물다. 쇼윈도 너머로 그림자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액체라고 쓰여 있다. 바닥에 쏟으면 원래 가졌던 형상으로 된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의 대체품일 뿐. 나는 모양을 보지 않고 그중에서 하나 샀다. ‘그림자의 모양’이라 생각하고서 잊어버렸다. 집에 가서 그것을 쏟아보니 새, 파랑새처럼 보이는 것이 그려졌다. 그것을 담을 새장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새의 형상을 벽면에 그리고 있었다. 그 쇼윈도가 비치는 가게는 그림자였다. 형상으로 만들어보진 않았으나 그림자들 중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아직 하지 않은 말들이다. 그 새는 그림자로 울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림자로 된) 새가 한 말이다.

밀밭의 낱알들

넓게 펼쳐진 밀밭에 수많은 낱알들이 맺혀 있다. 

2024년 6월 22일 토요일

초월일기 15

기분 관리

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것일까? 




2024년 6월 16일 일요일

풀들

 

날씨도 좋아졌고, 이제 발코니에 풀만 심으면 될 것 같다. 이 풀은 그냥 풀이 아니다. 그냥 풀같이 보여도, 얘기하자면 길다. 아무튼 풀을 심으려고 보니 화분에 잡초 같은 풀이 자라고 있다. 내가 심은 건 아니다. 그냥 공중에 홀씨 같은 게 떠다니다가 어쩌다 보니 여기 자라게 된 풀 같다. 이끼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같은 풀처럼 보이지만 이 모르는 풀은 화단 같은 데 버리기로 한다.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히틀러를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한 것이 약간은 그 사람의 정책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풀은 버리고 잘 검증된, 정체성이 확실한 풀만 발코니에 모아 놓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건 그런 발코니인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내 발코니에는 내가 선택한 풀들만 놓자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내” 집에는 “나”에게 검증된 것들만 들여놓겠다는. 그런데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집이 정말 어수선하다. 예기치도 못한 물건이 예기치도 못한 곳에, 예를 들면 커피를 만드는 모카포트가 화장실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 생각하면 화장실에서 대변을 누면서 커피를 마시고 그것을 깜빡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나는 정돈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날 집을 청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런 생각만 해도 피곤하긴 하지만, 구석구석 청소하고 정리하는 편이다. 정리를 위해 상자 같은 걸 사고, 이 상자에는 케이블 같은 걸 넣어야지, 이 상자에는 상비약을 넣어야지 하다가 상자들이 늘어나고, 만약 상자 하나하나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상비약이 있어야 할 곳에 케이블이 있게 되면, 갑자기 기운을 잃고, 아무 상자에 아무것이나 막 넣게 되고, 결국에는 청소한 듯 보이지만, 그 상자들 속에 혼란을 숨기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튼 무슨 얘기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일상 속에 그렇게 아무렇게나 자라서 거기 자라고 있는 풀을 뽑아 버리는, 그래서 모든 것이 깨끗하고 깔끔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통제와 관리가 무섭게 느껴지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게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그건 무섭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것 같다. 



헤매기